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75화 (75/276)

7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4)

저릿저릿한 손발, 오한으로 떨리는 몸, 점점 흐려지는 시야.

자신의 몸이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변화를 느끼며 르베나는 생각했다. 언제나 외롭고 언제나 혼자였던 그녀에게 드디어 기다릴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누군가를 믿고 누군가에게 믿음을 준다는 게. 생각보다 꽤 즐겁다고. 이렇게 힘없이 누워있는 무력한 순간조차.

“윽…!”

하지만 복부의 고통은 그녀와 함께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점점 강하게 르베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 이대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르베나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달은 순간.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혹시나 몰라 그에게 경계태세로 다가갔지만 르베나를 가뿐히 제압한 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이, 아를이었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의 마력이 참 반가웠다. 그녀의 기대가 헛되지 않아 기뻤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모습은 르베나가 상상하던 대로가 아니었다.

사정없이 구겨진 그의 반듯한 얼굴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그의 금안. 언제나 차갑게 웃던 입가를 세게 악 물어 버티는 그의 모습.

르베나는 지금 이 기다림이 저와는 달리 아를에게는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소식이 끊긴 단장을 찾으러 가는 길.

‘내가… 잘못했네.’

그래서 어떤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또 그런 표정을 짓게 해서, 또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해서. 너희의 단장으로써, 동료로써.

“아를… 하… 미안…….”

르베나의 마음을 힘겹게 전한순간.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단단하고 강한 아를의 팔이 르베나를 놓칠세라 그녀의 몸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었고 넓고 따뜻한 품이 그녀의 차갑게 식은 몸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이… 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안심해버리면… 이렇게 놓아버리면… 안… 되는데… ’

툭.

아를이 르베나를 들어올려 제 품으로 감싸기 무섭게 르베나가 곧바로 기절해버렸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본 아를이 서둘러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이유를 모르는 분노가 전신을 휘감았다. 자신의 품에 안긴 르베나가 이렇게 작은 줄 몰라서.

주체할 수 없는 절망이 제 심장을 난도질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던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서.

그리고. 탁…!

곧장 아를의 발이 세차게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은 또다시 힘겨운 울음소리와 함께 거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두근두근.

자신의 품에서 곧바로 정신을 잃은 르베나가.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정말.

사랑스러웠다.

찰칵.

문을 닫고 나오는 궁의에게 순식간의 세 명의 남성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왔다. 하나같이 큰 키에 수려한 얼굴들을 굳힌 채 다가오니 긴장한 궁의가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상태는.”

질문을 던진 건 다한이었지만 궁의는 그 중 그나마 가장 친근한 바흐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일단 복부의 상처는 치료를 해두었지만 장기를 크게 상하셨습니다.

마력이 돌아오면 금방 치유될 수도 있지만… 현재 다량의 출혈로 인해 마력의 생성이 더디신지 치유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마력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궁의는 차마 뒷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잇는 순간 눈앞에 선 세 명의 장정이 자신을 단숨에 죽일 것만 같은 살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끔찍한 살의를 느낀 순간 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궁의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그 순간 제 각기의 눈들이 빛을 발하며 그를 향했다. 다시 입을 여는 궁의가 꿀꺽 침을 삼키며 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실력이 아주 좋은 세츠가 치유마법을 걸거나 실력이 아주 좋은 베이라가 마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를이 다한에게 물었다.

“가스트님을 부르는 데 얼마나 걸리지?”

아를의 말에 다한 역시 제 미간을 구기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가능하다고 하시더라도 이 먼 거리를 한 번에 오실 수는 없어.

일단은… 통신구를 통해 연락해보도록 하지. 최대한 빨리 오실거다.”

말을 마친 다한이 황급히 사라지자 아를이 고개를 바흐란에게로 돌렸다.

“자칸에는 세츠나 베이라가 정말 한 명도 없나?”

아를의 말에 바흐란이 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있었으면 애초에 아벨디온을 부르지도 않았어. 하아… 젠장!”

그의 말에 아를 역시 표정을 굳히고는 곧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본인이 할 수 방법을 찾아보러 간 것 일 테다. 그리고 순식간에 혼자만 덩그라니 남겨진 바흐란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는 눈앞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방에 들어서는 모습을 본 궁의는 서둘러 자리를 뜨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달칵.

조심스럽게 연 문의 소리가 새삼스레 크게 들려왔다. 하지만 바흐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흐란의 손이 조심스럽게 르베나의 얼굴로 다가갔다. 자신의 손이 긴장으로 떨리는 모습이 순간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바르한은 조심스레 제 손을 들어 식은땀으로 얼굴에 붙은 르베나의 머리칼을 아주 조심히 옆으로 쓸어주었다.

“미안… 말로는 왕자라고 큰 소리 뻥뻥 쳐놓고… 전혀 도움도 못되네… 하아… 진짜… 한심하다.”

바흐란이 르베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힘겨운 듯한 표정으로 잠든 르베나를 한 번 보고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처음이었다.

여성을 보고 설렌 것은. 여성이 아름답지 않고 멋지다 생각한 것도. 아니 아름답기까지 한 건지도. 적당히 제게 어울릴 사람이 아니라 제 옆에 나란히 서 줬으면 좋겠는 누군가를 상상해본 것도 그에겐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지 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 그녀는 이렇게 제 앞에 누워있다. 하지만 바흐란은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순간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바흐란은 스스로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여성 하나를 제대로 지키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자칸의 남자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자칸인이 있을까?

“실력 있는… 세츠라.”

바흐란의 녹안이 다시 르베나를 향했다. 분명 그에게는 아주 조금의 신력이 있기는 했다. 신검에 불어넣어 그것에 새겨진 마법을 발동시킬 정도의 신력.

“하지만 이게 전부입니다, 왕자님. 이건 이미 새겨진 마법이라 큰 신력이 필요치 않으나 마법을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의 신력은 왕자님께 없습니다.”

언젠가 자칸의 왕궁에 들렸던 한 마법사의 말이 생각났다. 바흐란의 손이 다시 르베나를 향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르베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안… 허락 없이 잡아서. 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바흐란이 신검에 주입하듯 자신의 손끝에 신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을 느끼며 맞잡은 르베나의 손으로 주입했다. 그렇게 있는 힘껏 제 모든 신력을 넘기려고 했지만 언제나처럼 넘어가는 신력의 양은 보잘 것 없었다.

“하… 더 비참 하네.”

조그맣게 중얼거린 바흐란이 아직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르베나를 한번 보았다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보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붉고 선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찰칵.

바흐란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불어오는 자칸의 더운 바람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한 바퀴 돌고 나갔다. 그와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르베나의 숨이 조금은 편안하게 바뀌어갔다.

저녁.

몇 시간 사이 부쩍 수척해진 모습의 아를이 르베나의 침상 옆에 앉아있다. 이미 저버린 해로 르베나의 머리카락을 닮은 까만 어둠만을 남겨놓은 밤하늘에는 무심한 별들만이 잔뜩 떠 빛을 발했다.

그 어둠 속, 여전히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르베나를 바라보는 아를의 얼굴에는 점점이 고통이 번져나갔다.

“이제 겨우 네 옆인데… 이제 겨우 너랑 함께인데. 왜 계속 누워있어, 르베나. 나… 정말 이러다 미쳐 버릴 것 같아.”

아를의 금안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아 르베나를 향했다.

* * *

“들었어? 르베나 공주가 후벤 경한테 검술을 배운데.”

“정말? 하녀들한테 꽤 오래 학대당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 일로 꽤 시끄럽더니 갑자기 검을 배운다고…….”

한참 수다를 떨던 견습 기사들이 눈앞에 나타난 소년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들끼리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소년은 조용히 검을 손질하다가는 가만히 제 붉은 입술을 열었다.

“…르베나 공주.”

소년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이를 들은 이도, 대답하는 이도 없었다. 소년 역시 큰 관심을 두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는지 곧 하던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점점 빛이 나기 시작했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칼에 어린데도 불구하고 드러난 날렵한 턱선.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은 차갑지만 매력적인 소년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올해 열 네 살. 디오니스 역사상 최연소 정식기사 입단을 눈앞에 둔 견습 기사이자 메이슨 공작가의 둘 째 아들, 아를 드 메이슨.

“공작가의 막내 아드님이죠? 그 형과 열 살 터울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너무 잘 생겼네요.”

“아니 대대로 문가인 메이슨가에 기사라니! 공작님은 소문처럼 아들들의 의견을 존중하시는군요.”

“디오니스에서 가장 미래가 촉망되는 신랑감이요? 당연히 메이슨가의 둘째죠! 첫째는 결혼을 일찍 해 버렸으니!”

그를 따라다니는 이야기는 많았고 거의 다 사실이었다. 그렇게 집안의 후견으로 발견된 뛰어난 재능과 꾸준한 노력 덕분에 그는 이른 나이에 디오니스 왕궁의 견습 기사가 되었고 곧 있을 정식기사시험에도 그가 떨어질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 우리 아를 말이요? 우리 집안에서 기사라니! 대견할 따름이지!”

메이슨 공작은 그런 아를을 자랑스러워했고 왕국에서도 흔치 않은 재능을 가진 아를을 모두들 입을 모아 칭찬했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절로 눈길이 가는 그의 외모는 그를 사람들의 입에 더 오르내리기 충분한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토록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제대로 된 친구가 없는 이유는 귀족임에도 갖고 있는 그의 독특한 생각 때문이다.

아를은 디오니스 최고 공작가의 아들이면서도 누구보다 귀족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 할 때마다 뱉어지는 새치 혀 놀림, 끊임없이 반복되는 배신과 음모,

겉과 속이 다른 귀족들의 언행, 언제나 점잖게 굴지만 속은 시커먼 집단.

그것이 아를이 본 귀족사회였다.

아를은 디오니스 공작가의 아들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귀족들의 예법이 가식적이라 생각했고

귀족들의 특권의식이 못마땅했으며 날 때 부터 사람의 계급이 정해지는 제도가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메이슨 공작가의 막내 아들이면서도 사치와 향락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가문의 덕으로 출세 길이 보장되어 있는 문관으로의 삶도 싫었다. 오로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본인을 대변한다 생각했고 아를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릴 때부터 검술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열 네 살 아를에게 있어 검과 가족 이외에 가치가 있는 것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르게는 십 대 후반, 또 이십 대가 대부분인 다른 견습 기사들이 이런 아를을 어려워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그런 아를의 심장이 처음으로 다른 이를 향해 뛰었던 조금은 생소하고 더없이 강렬한 어느 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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