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3)
아를의 금안이 왜인지 더 싸늘한 느낌으로 그녀를 향하자, 스릴 공주가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마, 마지막에 저희를 텔레포트 할 때… 나, 나쁜 놈들이 들어와서… 그, 그래서 아마 저희만 보내신 거 같아요…….”
스릴 공주의 말에 조금 떨어져 있던 다한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르베나 님을 보셨습니까? 그곳에… 남으신 게… 확실합니까?”
아를보다는 더 유하고 반듯한 느낌의 사내가 물어오자 스릴 공주가 좀 편해진 낯으로 답하였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검술과 마법을 함께 쓰셨어요. 르베나 님이냐는 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셨고요. 그리고 저희가 여기로… 이동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건물이… 무너졌어요.”
스릴 공주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참담함이 흘러 넘쳤다. 특히 좀 전까지 기대와 설레이는 표정으로 다가오던 디오니스 기사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히잉-!
그 침묵을 갈라낸 건 아를이 타고 있던 말의 울음소리였다. 아를이 다시 말을 몰며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공주의 얘기를 들으니 한시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르베나가 무너진 건물 아래에 있는 거라면 시간만이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또다시 이어진 스릴 공주의 말에 아를의 발은 신경질적으로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멈칫한 아를의 금안이 그녀를 향하자 순간 두근대는 가슴께를 꼬옥 잡은 스릴 공주가 말했다.
“그분은 정말 강했어요! 혼자서 저희를 구하러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우고 지하로 오셨고… 어, 그리고 저희를 모두 풀어주고 두 번이나… 텔레포트를 해 주셨어요… 그렇게 아픈데도… 그러니까 꼭 무사할 거예요.”
마치 기도문을 외우듯 말하는 스릴 공주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착하고 예뻐 보였다.
그들을 구해 준 르베나가 꼭 무사하기를 바라는 듯한 그녀의 말이 마치 기도문처럼 들리기도 했고 지금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르베나의 생존을 장담하는 그녀의 말이 위로같이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아를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뚜벅뚜벅.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스릴 공주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움찔!
찰나의 순간 보았던 처음의 미소 따위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냉정함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 스릴 공주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이렇게도 무서운데도, 그의 모습이 이렇게도 위압적인데도,
스릴 공주가 지금 느끼는 떨림은 꼭 공포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아프… 다고?”
하지만 말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녹안 가득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내재한 그, 바흐란의 물음이었던 것이다. 뜻밖의 사람에게서 나온 질문에 스릴 공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니까 배에서 엄청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어. 고통… 스러워했던 것도 같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릴 구해 줬으니까, 분명 르베나 님은 무사하실… 꺄앗!”
말을 하던 스릴 공주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우악스럽게 잡힌 팔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스릴 공주의 팔을 거세게 잡은 아를을 보며 바흐란이 흥분하자 자칸의 기사들이 일시에 검을 아를을 향해 겨누었다. 자칸의 왕녀를 허락도 없이 잡았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다한 역시 뜻밖의 상황에 아를에게 다가와 그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아를이 더 빨랐다.
훅!
아를의 얼굴이 스릴 공주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자 공주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순간 스릴 공주의 팔을 잡은 아를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다쳤음에도… 너희를 모두 구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멍청한 생각 따위를 할 수 있는 거지?”
아를의 금안이 마치 금방이라도 스릴 공주의 목을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대는 스릴 공주에게 아를의 소름끼치게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르베나를 뭐라고 생각 하는거지? 너희는 그녀가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너희를 구해주러 왔으니 그 정도 상처쯤은 입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를!”
흥분한 듯한 아를을 말리려 바흐란이 그를 불렀지만 아를은 답하지 않았다.
아를의 말에 스릴 공주 역시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투둑, 뚝.
떨어지는 스릴 공주의 눈물을 보며 아를이 차갑게 피식 웃었다.
“무조건 울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 이봐 공주님, 이건 알고 있어? 르베나는 한 나라의 공주이고 한 기사단을 책임지는 기사단장이기 전에, …평범한 열아홉 살의 영애이기도 해.”
아를의 말에 스릴 공주의 녹안이 떨려왔다.
‘열아홉 살……?’
“너희랑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아니, 어쩌면 너희 몇몇보다는 어릴지도 모르는 그녀가 너희를 도와 다치고 피를 흘릴 동안 너희는 무얼 했지? 아마 꺅꺅 소리나 지르며 방해만 해댔겠지. 그리고 이제 너희의 목숨이 안전해지니 뭐라고 지껄여 대는 거야!”
아를의 눈은 이미 지독한 경멸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르베나는 강하니 무사할 거라고? 아프고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괜찮을 거라고? 그것 참 편리하고도 이기적인 생각이네.”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아를에게 소리치는 바흐란을 보며 아를 또한 그를 향해 소리쳤다.
“르베나도 똑같은 사람이야! 르베나가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도, 베이라라도 칼에 맞으면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으면 아프고 죽기도 하는 사람이라고! 똑같은 여성이면서, 비슷한 나이면서, 저 건물 밑에 르베나가 있다면서!”
바흐란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스릴에게로 향해 있었다.
“무사할 거라고? 차라리 그냥 솔직히 말해. 너희를 구해준 르베나가 죽었다고 말하기엔 같잖은 너희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래야 그 같잖은 마음이 더 편해질 테니까!”
아를의 말에 스릴 공주와 바흐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닌데, 스릴 공주의 생각과는 다른 게 분명한데, 틀렸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녀가 열아홉 살이라는 이야기가. 그녀도 똑같은 사람이고, 평범한 영애라는 그의 이야기가… 그 소리만이 스릴 공주의 머릿속을 점령해 가는 건지 모르겠다.
툭.
던지듯 놓인 팔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를의 눈이 금방이라도 바흐란을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자칸의 여성들이 소중하다고? 하. 정말 참 소중도 하겠군.”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에 올라탄 아를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그런 아를을 바라본 다한이 스릴 공주에게로 다가가 애석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장님이 걱정되어서 저런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아를 경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그리고 그와 아벨디온 기사들 역시 아를을 따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스릴 공주가 마지막으로 곁에 남은 바흐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작아지는 그들을 향했다가는 스릴 공주를 향했다.
“오라버……!”
“기사들과 먼저 돌아가. 아버님이 기다리실 거다.”
그렇게 말을 마친 바흐란마저 그들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분명 모두 그녀만을 기다렸을 텐데, 그녀가 걱정되어 와 주었을 텐데.
스릴 공주의 곁에 남은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칸의 병사들뿐이었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스릴 공주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지금의 눈물은 살아난 게 다행이라서도, 빠져나올 수 있어 기쁘기 때문에도, 드디어 풀린 긴장 때문도 아니었다.
“창피해… 흑… 내가… 내가, 너무… 창피해… 흑…….”
스릴 공주의 작은 웅얼거림과 눈물만이 그들이 떠난 자리를 조용히 메꾸어 가고 있는 어느 늦은 오후의 시간이었다.
“……!”
빠르게 말을 달리던 아를의 눈에 점점이 이어진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이 붕괴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 핏자국은 인적이 드문 나무들 사이로 이어져있었다.
사막지형의 자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나무는 푸른 잎 없이 하늘을 향해 길게 솟은 막대기모양의 나무뿐이었다. 그리고 핏자국은 그런 나무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 마치 은신하듯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르베나 단장님!”
“단장님 대답 좀… 크흑… 해 주세요!”
여기저기서 르베나를 부르는 아벨디온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한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말에서 내린 아를이 커다란 검을 뽑고는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르베나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흩뿌려진 피가 르베나의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다투며 아를의 심장을 박동케 했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가던 아를이 누군가 제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빠르게 뒤로 돌아선 아를이 제게로 향해지는 검을 쳐내고는 상대를 그대로 넘어뜨려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검을 그 자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하아… 하… 아… 를…….”
거친 숨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검을 든 아를의 금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토록 보고 싶던 사람. 그토록 아른거리던 사람. 그토록 마음 졸이게 하던 그녀,
르베나가 그의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르베나의 얼굴은 아를이 그토록 보고 싶던 모습이 아니었다.
재빨리 르베나의 위에서 내려온 아를이 르베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르베나의 복부에서는 다량의 출혈을 일으킨 자상이 크게 나 있었고 르베나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아를을 경계해 다가온 것 자체가 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를… 하… 미안…….”
하지만 르베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단장으로써 모자란 모습을 보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 르베나의 사과에 아를의 표정이 더 무참히 구겨졌다. 하지만 아를의 표정을 보고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도 르베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전부였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 르베나는 간신히 텔레포트를 했지만 다량의 출혈과 연이은 마법시전에 충분히 멀리까지 이동할 수 가 없었다. 아니, 중간에 분명 마력이 모자랐는데 사지 멀쩡하게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 안의 마력은 거의 바닥이 났고 다량의 출혈로 르베나의 몸은 급격히 식어갔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르베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몸을 숨길만한 곳에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어색했다. 예전이라면 분명 죽는 한이 있어도 움직였을 것이다. 움직이다가 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의 목숨은 스스로만이 구할 수 있다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르베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일지도 선명히 알고 있다.
‘아를과 다한. 그리고 아벨디온 기사단. 그들리 분명 나를 찾으러 올 거다.’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제 목숨을 맡기는 모습이, 르베나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퍽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아니,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죽도록 꿈꾸던… 삶이자 죽음이었으니.’
안 그래도 창백한 르베나의 얼굴에 핏기가 더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