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2)
‘아마도 내가 주문을 완성할 시간이면 저들은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텔레포트가 정상적으로 구동된다 하여도 저들의 공격에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
결국 누군가는 적들을 막아야만 혹시나 모를 부상도 죽음도 막을 수 있다는 말인데…’
르베나가 지하 감옥까지 달려오면서, 그리고 검에 맞았어도 힐링이나 마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텔레포트에 쓸 마력이 모자랄까봐였다.
이곳에 있는 단 한명도, 어느 누구도 두고 갈수가 없어서. 겁에 질려 르베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누구도 이제 다시는 놓고 갈수가 없어서.
곧 르베나의 붉은 눈이 공포에 떨고 있는 여성들을 향했다가는 이내 결심에 찬 듯 어둡게 빛났다. 문득 그 눈빛이 불길하게 느껴진 스릴 공주가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한번 보인 르베나의 검붉은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왜인지 지금 르베나에게 어떤 말이든 건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가 더 빨랐다. 르베나는 순간의 판단을 마치고는 빠르게 주문을 완성했다.
곧 르베나의 몸에서 나온 검붉은 기운이 좀 전보다도 더 빠르게 여성들을 감쌌다. 그리고 르베나를 바라보는 여성들의 눈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으로 떨려왔다.
그녀들을 감싼 기운은 절대적이었다. 르베나의 마력이 몸에 닿자 혹시나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따위는 깨끗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강인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힘은 그녀들이 무조건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여성들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입가에 번진 검붉은 피의 흔적. 옷과 몸을 모두 적신 검붉은 상처. 온통 여기저기 다치고 베인 상처투성이의 여린 몸.
지금 르베나의 마력이 밝힌 빛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몹시 위험했던 것이다.
당장 기절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눈은, 무표정한 표정은, 처음과 한 치의 틀림도, 흔들림도 없었다.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스릉, 은빛의 검을 꺼내어 드는 그 모습이, 검붉은 마력에 휩 쌓인 여성들을 향해 등을 지는 그 모습이.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선연하게 모두의 눈에 박히어 왔다.
그녀의 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크지 않았다. 하지만 곧 사라 없어질 여성들의 앞을 지키는 그 등은 그녀들이 살아오면서 보았던 어떠한 등보다도 크고 믿음직스러웠다.
제 목숨이 제일 귀하다는 귀족가의 여식들과 스릴 공주마저 눈앞의 르베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울컥 솟는 무언가를 느껴야 했다.
“당신이 진정한 왕족이라면 저들을 겁박하고 저들의 순서를 욕심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당신이 평소에 배우고 익히며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베풀고 내놓아야 할 때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아까 들었던 르베나의 말이 어쩐지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그 때문에 르베나의 등이 더 크고 견고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검붉은 빛과 함께 모든 여성들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곧 따뜻하고 강인한 빛은 그녀들을 어두운 지하 감옥이 아닌 곳으로 인도했다. 밝고 따뜻한 그리고 조금은 더운 사위가 그녀들을 반기는 곳으로.
“아……!”
털썩.
스릴 공주는 순간 풀어지는 긴장감에 그 자리에 툭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투둑. 투두둑.
그리고 곧 스릴 공주의 맑은 녹안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자신들을 등진 르베나의 뒷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디를 간다는 거야!”
바흐란의 물음에 아를과 다한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흐란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를 간다는 거냐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걔 말만 듣지 말고 누구라도 하나 딸려 보내는 건데!”
바흐란의 말에 다한과 아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거야말로 지금 그들이 제일 후회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움직이기라도 해야 했다. 벌써 하루가 지났지만 자칸의 하늘 어디에도 르베나의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라도 움직여 르베나를 직접 찾아다녀야 불안한 생각이 덜 들 것 같기도 했다. 아를과 다한을 위시한 아벨디온 기사단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서둘러 준비를 마친 그때, 헐레벌떡 큰 소리가 들려왔다.
“와, 왔습니다! 왕자님! 지금 왕궁 앞에 여, 여자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에 아벨디온을 말리던 바흐란과 준비를 하던 아벨디온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박혔다.
왕궁의 입구, 서둘러 그곳에 다 달은 일행은 스무 명 남짓의 여성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익숙한 느낌이 났다.
훈련할 때 자주 보았던, 느꼈던. 강하고 따뜻하면서도 올곧은 그녀의 마력.
아를이 서둘러 일행에게 다가가 물었다.
“모두 빠져나온 것인가? 르베나, 그녀는 어디 있지?”
갑자기 다가온 남성에 여성들은 겁을 먹은 듯 움찔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납치를 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나타난 곳에서 큰 키에 외모가 수려하긴 했으나
제법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남성이 선뜻 다가오니 모두 겁에 질린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중 한 노인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르베나… 그분의 이름이 르베나… 이신가요.”
노인의 물음에 아를이 다급히 말했다.
“그래, 어딨냐고! 르베나는 어딨어!”
아를의 기세가 무서울만도 하건만 노인은 차분하게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발대와 후발대를 나눈 이야기, 그리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곧 무너질 거라는 이야기까지도.
“…하!”
노인의 말이 끝났을 때 아를은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갈 때까지 후발대와 르베나 누구도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에 젖어 침통한 얼굴을 적시고 있을 때.
콰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놀란 시선들이 하나같이 먼 곳을 향했다.
왕궁에서 꽤 떨어진 어느 곳에서 엄청난 모래바람이 일고 있었다. 마치… 어떤 건물 하나가 폭파된 것처럼.
“르베… 나.”
아를의 떨리는 금안이 멀리서 솟구치는 모래바람 속으로 초점 없이 섞여들었다.
곧 건물이 무너질 거라는 노인의 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르베나.
자연스럽게 상상되는 불길한 결말에 아를이 제 주먹의 모든 핏줄이 터질 듯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대 안 돼… 절대로… 절대로!”
“……!”
“왜 그래, 폐하?”
납치되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아직도 남은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굴 초입을 향하던 중. 루드바하가 갑자기 멈춰서자 라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멈춰선 그의 몸에서 어느새 새하얀 신력이 새어 나오더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곧 다시 뜬 그의 눈이 분노로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이에 루드바하가 제 주먹을 꽉 쥐고는 무언가를 힘들게 참는 듯한 어조로 라웅에게 말했다.
“급한 일이 생겼다, 라웅. 먼저 돌아가라.”
역시나 라웅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 루드바하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루드바하가 사라진 빈자리를 보던 라웅의 눈이 주위를 한번 죽 훑었다.
남겨진 라웅을 바라보며 올망졸망 눈을 빛내고 있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성기사단과 적들의 싸움 소리. 이미 피비린내에 절어 버린 듯한 제 기사복의 냄새.
곧 비명 같은 외침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야 이 나쁜 자시이이익아! 죽어버려!”
다그락… 다그락…….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아를의 손이 세게 말고삐를 쥐어 잡았다. 가뜩이나 사막지형으로 말을 잘 타지 않는 자칸에서 빌린 말은 꽤 왜소한 편이었다. 게다가 평균 남성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한 아를이 빠르게 말을 달리니 달리는 말마저도 힘에 겨운 듯 눈에 띄게 지쳐 갔다.
하지만 아를의 눈은 아직도 엄청난 먼지를 흩뿌리고 있는 그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곳으로 가야 해! 르베나라면 분명… 분명 무사할 테니, 좀 더 빨리……!’
그녀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디.
아를이 다시 한번 말을 세차게 걷어차고 히잉-! 우는 말의 소리가 근처에 울려 퍼친 순간!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말을 멈춘 아를이 그들을 살핀 후 서둘러 달려 갔다. 딱 보기에도 왕궁입구로 온 여성들과 비슷해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내 그들을 발견한 아를의 눈에서는 밝은 이채가 어렸다.
‘…르베나!’
빠르게 달려오는 말소리에 이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남성이 다가오자 여성들은 역시나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가오는 남성을 보고는 겁을 먹은 것도 잠시,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았다.
새카맣고 부드러워 보이는 흑발은 자칸의 더운 바람에도 제 결을 따라 춤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진하고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찾는 듯 애절했으며 하얗고 날카로워 보이는 선의 얼굴형은 누구도 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어딘가 옅게 짓고 있는 미소는 한순간 그에게 다가가고 싶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곧 그가 무리로 다가와 조금 기쁜 듯 소리를 높였다.
“르베나! 어딨어? 빨리 나와!”
그의 소리에 여자들이 서로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저런 남자가 이곳에 찾아와 찾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르베나!”
하지만 그가 다시 소리를 높여 불러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곧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덩달아 그들의 앞에 멈추어 섰다. 모두가 급히 멈춰선 탓에 말발굽이 가득한 바닥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 중에서도 단정하고 반듯한 모습의 남성과 그와 같은 표식을 단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떤 기대감과 설렘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자칸인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오라버니!”
애처로운 부름과 함께 누군가가 뛰어나와 그에게로 달려갔다.
“…스릴!”
바흐란의 외침과 동시에 스릴 공주가 그에게 다가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윽… 오실 줄 알았어요… 흑… 흑…….”
언제나 명랑하고 발랄하던 동생의 눈물에 바흐란도 마음이 먹먹해져 가만히 스릴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사한 동생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말의 히잉-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옅게 짓던 미소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느새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돌아간 아를이 다시 제 말에 올라탄 것이다.
그리고 싸늘한 그의 금안이 바흐란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스릴 공주를 잠시 스쳤다. 아를의 눈이 공주와 바흐란을 무감각하게 한번 지나쳐서는 다시 앞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말의 배를 차려는 순간,
“르, 르베나 님은 저기에 계셔요!”
작은 말소리가 아를의 발을 붙잡았다. 아를의 금안이 향한 곳은 바흐란의 곁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스릴 공주였다. 그리고 스릴 공주의 가늘고 여린 손가락은 저 멀리 먼지 속에 가려진 잿더미 건물더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아를은 저 여자의 작은 손가락이 자신에게 향하는 저주와도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