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72화 (72/276)

7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1)

쾅쾅!

“야, 해머 가져와! 빨리!”

밖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일하게 기대던 저 여자는 그들의 생사를 두 부류로 나누어 놓았다.

그중 노약자로 분리된 여성들은 묵묵히 스스로 절망과 공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부족의 사람들이었다.

“어서 보내 주세요! 당장이요!”

“전 후틀레 가문의 여식이에요! 아버지께서 꼭 사례하실 거예요!”

“어서어서 빨리요 당장!”

르베나가 순간 그녀에게 다가와 소리치는 이들과 노약자로 분리된 이들을 잠시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귀족의 여식이 다수 포함된 무리는 점점 르베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의상으로 보아 부족민이 대다수인 노약자 무리는 점점 르베나와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곧 상황을 파악한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먼저 이동하는 것은 당연히 노약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감옥 안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르베나의 말에 노약자 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곧 귀족들이 속한 무리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늦게 가는 쪽은 죽을 게 분명한데 귀족인 그들보다 부족의 노약자가 먼저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상황을 재빨리 파악한 귀족가의 여식들이 어느새 노약자 무리에게 가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먼저 가면 너희 부족의 씨를 말려 버리겠어!”

“귀족보다 우선시 돼야 할 건 없어!”

“저기 뒤로 가! 안 그러면 남은 가족들의 피눈물을 보게 될 거야!”

선발과 후발을 나눈 의미가 없게 그녀들을 어느새 노약자 무리로 가 고함과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는 텔레포트도 무엇도 할 수가 없음을 르베나는 깊은 피로감과 함께 깨달았다.

‘도대체 노약자가 먼저라는 당연한 이치를 가지고 왜들 저러는 거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르베나에게는 지금 그들을 설득하고 달랠 시간 따위도 없었다. 심지어 이 곳은 곧 무너질 것이고 르베나는 빨리 그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참다못한 르베나가 소리쳤다.

“스릴 공주님! 어디 계십니까? 스릴 공주님!”

르베나의 소리가 꽤 긴박하고 컸음에도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르베나가 더 소리 높여 스릴 공주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들려야 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조금 놀란 듯한 르베나의 시선이 노약자의 무리로 향했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 속에서 벌벌 떨며 제 몸을 숨기고 있는 스릴 공주를 발견했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급격하게 실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애써 그 빛을 지워내며 스릴 공주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주님, 제가 이들을 텔레포트 할 동안 후발대 무리를 달래 주십시오.”

“시, 싫어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어 쉰 르베나가 스릴 공주를 잡으려 손을 뻗자, 스릴 공주가 르베나의 손을 탁, 소리 나게 쳐내며 소리쳤다.

“…다 했잖아!”

공주의 히스테릭한 모습에 르베나가 조금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스릴이 다시 소리쳤다.

“나, 난 납치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품위를 잊지 않았다고! 당신이 다시 왔을 때도 왕족답게 당신을 달래주었잖아! 근데 뭐라고? 나보고 저 후발대에 섞여 뒤늦게 가라고? 그러다 이곳이 무너지면? 그럼 나보고 이곳에서 죽으란 거야?”

소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들이 아니라 날 구하러 온 거잖아! 근데 감히 나보고 후발대에 섞여 저것들을 위로나 하란 말이야? 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는 스릴 공주의 모습은 영락없이 겁에 질려 있는 열다섯 살 소녀였다. 감옥에서 르베나를 위로하고 르베나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

그 순간까지가 스릴 공주가 낼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였던 듯했다.

그리고 다시 감옥에 돌아온 르베나가 스릴 공주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쓰면서부터 스릴 공주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누군가 날 구해 주러 올 거야. 난 자칸의 하나뿐인 공주니까.’

그 생각으로 그녀는 차분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처럼 르베나가 나타났을 때 언제나처럼 그녀가 왕족인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가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르베나는 스릴 공주만 챙기지 않았다. 심지어 텔레포트를 먼저 하는 기준에 자신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런 차례에서 자신이 밀린다는 것은 왕족인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스릴 공주를 보던 르베나가 냉정한 손짓으로 스릴 공주를 그 무리에서 떼 내었다.

“싫어! 이거 놔! 놓으라고!”

스릴 공주가 몸부림쳤지만 르베나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곧 무리에서 억지로 밀려난 스릴 공주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자칸에서 열다섯 살이면 성인식을 하는 나이인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공주님께서는 올해 성인식을 치루셨지요. 그러니 공주님이 계실 곳은 이곳이 아니라 후발대입니다. 게다가 선발대는 이미 그 수가 많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후발대에 가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고저 없이 전하는 르베나의 말에도 스릴 공주는지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그녀는 이제 마치 자아를 잃은 것처럼 발악하고 있었다.

“싫어! 난 공주야, 공주라고! 자칸에 하나밖에 없는 공주란 말야! 어떤 상황에서도 날 후발대에 둘 수는 없어! 난 왕족이라고! 저런 것들보다 훨씬 고귀한 왕조…!”

짜악.

스릴 공주의 발악과 함께 큰 마찰음이 났다. 갑작스러운 소리로 아비규환이던 지하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후발대에 가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여성들마저 뜻밖의 상황에 놀란 듯했다. 지금 그 소리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칸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르베나의 시선이 그녀에게 뺨을 맞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릴 공주를 향했다. 공주는 제 뺨을 부여잡고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르베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스릴 공주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아 자신의 눈을 마주 보게 하였다.

붉은 눈.

더없이 어둡고도 선명한 붉은 눈이 흔들림 없이 스릴을 향했다. 그 눈은 아무 감정, 아무 느낌도 없어 보였으나 언뜻언뜻 비치는 일렁이는 어두운 빛이 순간 스릴 공주의 전신에 소름을 돋게 하였다.

“똑바로 들으십시오.”

고저 없는 르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의 뺨을 때린 이 상황에서도 목소리의 높낮이, 무감각한 표정 등 르베나의 무엇도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스릴 공주의 공포심을 더욱 부추겼다.

감옥 문을 부수려는 적들의 소리를 제외하고는 감옥 안은 온통 고요만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귀한 존재란 없습니다. 단지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이치는 있습니다. 아이와 약자는 보호받아야 하며 무릇 성인이란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반항하며 입을 열려는 스릴 공주에게 르베나가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말했다.

“귀족이라는. 왕족이라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부와 권위, 명예를 평생 지니고 사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의무와 책임을 동시에 짊어진다는 것. 어떠한 귀족도! 어떠한 왕족도! 그들을 받쳐 주는 백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르베나의 잇새로 앙다문 소리가 울렸다. 억지로 무언가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진정한 왕족이라면 저들을 겁박하고 저들의 순서를 욕심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당신이 평소에 배우고 익히며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베풀고 내놓아야 할 때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스릴 공주를 지나쳐 귀족 여식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차가운 그녀의 눈을 본 모든 이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지금의 르베나는 이제껏 그녀들을 점잖은 목소리로 통제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그녀가 명에 따라 그들을 구하러 온 정의의 기사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마치 그들을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살기를 흩뿌리는 절대자였다.

곧 르베나가 멍하니 있는 스릴 공주를 지나쳐 선발대의 무리로 갔다. 그리고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자, 노약자 무리의 곁에 붙어 있던 후발대 사람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르베나가 그들을 시린 눈으로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돌려 선발대의 사람들이 모두 맞는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확인을 마치자마자 조용히 마력을 모았다.

“와아!”

누군가의 탄성과 같은 소리와 함께 선발대의 주위로 검붉은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빛은 차츰차츰 그들을 하나하나 감싸더니 빠르게 모두를 감싸 안았다.

“아아……!”

“맙소사…….”

선발대에 선 사람들이 저들을 감싼 강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와 지옥 같은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이곳을 나간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귀족과는 구분되는 노약자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생각했었다.

‘귀족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우리 무리는 무조건 후발대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언제나와 같이 느꼈던 무력함과 공포, 그리고 체념이 아니었다. 강하고도 따뜻한 느낌. 그러면서도 꼭 지켜주겠다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은 그 느낌에, 무리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르베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노인이 자신의 어린 손녀를 감싸 안으며 르베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 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 노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강렬한 검붉은 빛은 그들 모두를 환하게 감싸 안으며 곧 모두를 스산한 이곳에서 내보냈다.

르베나가 그들을 보내고 나자, 쿵! 하는 진동과 굉음이 지하 전체를 울렸다. 아마 르베나가 쳤던 물리적 실드가 다 되어 적들이 문을 부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르베나가 남은 무리를 보며 급하게 소리쳤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이쪽으로!”

르베나의 말에 남은 이들이 하나같이 재빠르게 모여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방금 노약자 무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광경을 보고는 르베나가 정말 대단한 마법사인 것 같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쪽 뺨이 붉게 물든 채 있던 스릴 공주도 르베나의 곁으로 주뼛주뼛 와서 섰다.

사람들이 모두 제 곁으로 모이자 르베나가 다시 마력을 끌어모았다. 르베나의 손에서 아까와 같은 텔레포트 마법이 거의 완성될 때 즈음, 그녀의 복부에서 왈칵, 피가 흘러내렸다.

울컥.

순간 르베나의 입가에서 그녀의 마력을 닮은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여성들이 놀라 기겁하는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이때까지 한결같은 강함과 카리스마로 그녀들을 이끌었던 르베나에게 그런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을 이제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지하가 워낙 어두워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만큼 르베나는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거나 아픈 내색 한번 없이 그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여성들의 경악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르베나가 입가에 나온 피를 대충 닦아 내는 순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감옥 문을 연 적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르베나가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얕은 숨을 뱉어냈다. 안 그래도 복부의 고통이 마치 저를 잊지 말라는 듯 거세게 다시 시작되려는 찰나 급박한 상황이 더욱 박차를 가해 왔기 때문이다.

‘피를 토한 걸 보면 내상이 있다는 소린데…….’

르베나의 눈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과 적들을 보며 공포에 질려 있는 여성들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