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0)
“악! 이게 뭐야 폐하 때문에!”
사악.
다가오는 적을 베어내며 라웅이 소리쳤다.
“난들 알았겠나?”
평이한 어조로 답한 루드바하의 손바닥 가득 광활한 빛이 퍼져나가며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러자 그의 앞을 막고 있던 대여섯의 사내가 모두 동굴 위와 옆쪽 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라웅의 걱정과 같이 루드바하가 텔레포트를 한 지점은 적진의 한 가운데였고 그래서 이들은 지금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다가오는 적들을 무작정 베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을 향해 마법을 쏘면서도 루드바하의 벽안은 끊임없이 동굴의 구석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폐하!… 뒤!”
그때 들려온 라웅의 외침에 뒤로 돈 루드바하의 눈에 바로 제 코앞까지 다가온 적의 검이 보였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제 손에 신력을 집중해 상대방의 검을 손으로 스치듯 가볍게 튕겨냈다. 이어 그가 매서운 눈을 빛내며,
“루드.”
라고 속삭이자 그의 손에서 맹렬한 빛이 새어나간 것과 동시에 검을 든 자의 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아아악!”
그의 비명과 함께 검붉은 피가 루드바하의 새하얀 제복을 적셨다. 그때 동굴의 앞쪽부터 들려오던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금세 루드바하의 옆으로 다가온 라웅이 앞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늦었잖아!”
그러자 순간 들려오던 적들의 비명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마도 입구를 뚫고 진격해오던 성기사단이 가사단장인 라웅의 질책에 더 힘을 낸 것이리라.
문득 루드바하가 대각선 방향의 동굴을 바라보더니 라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라웅, 난 저쪽으로 간다.”
라웅이 채 대답하기도 전, 루드바하는 다가간 벽의 주변으로 그의 신력을 끌어 모았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루드바하를 향해 달려가는 적들을 혼자 상대하는 라웅이 마치 그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빨리 안와, 이것들아! 이 예의없고 제멋대로에다가 괘씸한 것들아!”
순간. 새하얀 빛이 온 동굴에 폭사하듯 퍼져나갔다. 크고 어두운 동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넘실거리는 빛 무리가 모두의 전신에 닿아왔고 동굴의 가는 틈으로 빠져나갔다.
우웅--!
마치 동굴이 그 빛에 공명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퍼져오는 빛이 자신들의 몸에 닿자 모든 움직임과 싸움이 일시에 멈췄고,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가 없었다.
모든 분노와 갈등, 살의와 전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성스러운 빛이 이들 모두를 감싸 안은 탓이다. 순간 앞을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파란 눈이 잠시 떨려왔다.
루드바하의 신력에 반응해 결계가 파훼되며 그 안에서 고이 잠든 아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성기사단의 표식이 새겨진 새하얀 로브를 앙증맞게 입고 있는 아이들.
곧 루드바하의 얼굴에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찾았다. 이 녀석들……!”
자신의 손에서 폭사하던 빛처럼 번져 가는 미소와 함께 그의 새하얀 신력이 따뜻하게 잠든 아이들 모두를 감싸 안았다.
다가오는 적들을 모두 베어내며 르베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주인 없이 날뛰는 마력과 신력은 그 자체로도 위험했다. 하지만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마법이 누구의 통제도 없이 뒤섞이면 일어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대폭발뿐이었다.
게다가 그 원석 안에 있던 것들은 보기만 해도 불쾌한 힘. 그것들을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를 르베나는 무시하지 않았다.
이 순간 빠르게 달려 나가는 르베나의 눈은 예리하게 빛났고 그만큼 몸을 움직이는 동작은 기민했다. 다가오는 적들을 사정없이 베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고 제 몸에 그어지는 자잘한 칼날의 피맺힘에도 개의치 않아했다.
지하 감옥으로 달려가는 길이 넓지 않은 덕에 한꺼번에 많은 적들이 달려들지는 못한 것이 그마나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촌각을 다투는 빠른 시간 안에 원하는 곳까지 가야 했고 더욱이 마법을 일체 쓰지 않으면서 검으로만 돌파해야 하기 때문에 몸에 상처가 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르베나의 눈앞에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언록(unlock)……!’
르베나의 마법에 감옥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찰나, 곧 복부에서 날카롭고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으읏!”
엄청난 고통에 순간적으로 눈을 내려 보니 날카로운 누군가의 검이 어느새 르베나의 배를 깊숙이 관통하고 있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그러면서도 더없이 뜨거운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르베나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뒤로 돌아 그 자의 목에 자신의 검을 곧바로 찔러 넣었다.
“윽..!”
르베나의 배를 꿰뚫은 검의 주인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법을 시전 하던 아주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상처였다.
“…읏.”
르베나가 급히 찔린 부분을 손으로 세게 누르며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곧바로 감옥 문에 최소한 마법을 쳐 물리적 실드를 걸었다.
“…하아!”
마법을 아껴야했기 때문에 큰 마력으로 치지못한 실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겠지만
르베나가 여성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시킬 동안 잠시의 방어막은 되어줄 터였다.
‘지금 힐링을 쓸 순… 없어…!’
움직일수록 상처를 헤집는 듯한 고통에 상처부위를 손으로 꾹 누르고 느껴지는 아픔만큼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 감옥으로 들어선 르베나가 하나하나 감옥 문을 열며 소리쳤다.
“겁먹지 마고 다른 감옥 문을 여십시오! 침착하세요! 모두 함께 나갈 것이니 겁먹지 말고 다른 분들과 함께 제 주위로 모이십시오!”
다행히 감옥을 지키던 자들조차 윗층의 소동으로 모두 사라졌고 감옥문은 여성들을 얕잡아 봐서인지 밖에서 당기면 바로 열리는 구조였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고 나온 여성들은 마치 르베나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우왕좌왕하며 잠긴 감옥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비켜! 나갈 거야!”
“내가 먼저 나갈 거야!”
여성들은 저마다 살겠다고 겁에 질린 채 소리를 지르며 문으로 향했지만 그곳은 르베나의 마법으로 단단히 잠겨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르베나의 뒤를 따라오던 적들이 모두 문에 붙어 칼이며 무기들로 그 문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녀들이 나갈 수 있는 모든 문이 막힌 것이었다.
“문이 잠겼어, 어떡해!”
“물러서요! 그 문 뒤에 납치범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나갈거야! 여기서 나가고 싶어!”
르베나는 우왕좌왕하는 여성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갔다. 차례차례 감옥 문을 열며 소리쳤고 어느새 그녀는 스릴 공주의 문 앞에 섰다. 르베나가 빠르게 스릴의 감옥 문을 열고 다른 곳으로 가려하자 안에서 뛰어나온 스릴 공주가 르베나를 붙잡았다.
“르베나 님! 르베나 님이 맞으시죠?”
스릴 공주가 붙잡는 바람에 당겨진 상처에서 큰 고통이 느껴졌으나 르베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저를 붙잡은 스릴 공주를 바라보았다. 르베나가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사이 스릴 공주는 어쩐지 부쩍 불안정해진 모습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연신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에게 르베나가 잠시 멈춰 서서는 빠르게 말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공주님 곧 이곳이 무너질 겁니다.
사람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야 합니다. 어서!”
르베나의 말에 스릴 공주가 놀란 듯 눈을 떴다. 그 속에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혼란이 고스란히 스쳐 갔다. 르베나를 붙잡은 스릴 공주의 손이 하염없이 떨려왔다.
“무너진다니… 모두… 라니……?”
혼자 무언가 중얼거리는 스릴 공주에게 르베나가 급박하게 말했다.
“모두 함께 빨리 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세요, 어서!”
르베나는 멍하니 있는 스릴 공주를 놔두고는 다시 달려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모든 여성들을 감옥 안에서 나오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 르베나의 외침에 반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감옥 문을 열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저 분의 말을 들어요, 우리!”
어느새 여성들은 공포심을 이겨내고 하나 둘 다른 사람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기 시작했고
어차피 문에 붙어있는 적들 때문에 문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 여성들은 서로를 도우며 르베나의 주위로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쿠르릉 소리가 나며 천장에서 먼지와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공간을 맴돌던 퀘퀘한 냄새도 한층 짙어졌다.
“…꺄악!”
“꺄아아!”
갑작스러운 소리에 겁에 질린 여성들을 보던 르베나가 빠르게 소리를 높여 물었다.
“모두 빠짐없이 나왔습니까? 아직 감옥에 갇힌 분이 있다면 소리치십시오!”
순간 르베나가 제 청각에 소량의 마력을 집중했다. 다행히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척 또한 살폈지만 곧 감옥 문을 뚫고 들어올 듯한 적들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모두 다 해서 삼십 명 정도…!’
르베나의 눈이 빠르게 모두를 훑었다.
‘한 번에 가는 건 무리야.’
자칸에 올 때 르베나는 팅을 데려오지 않았다.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는 곳에 팅을 데려와 괜한 관심을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싫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팅을 아한에게 맡기고 올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대규모의 인원을 텔레포트 한 적이 그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시전한 가장 많은 인원은 고작해야 열 명 내외. 게다가 현재 복부에 큰 상처까지 난 상황에서 무리한 마법의 시전은 르베나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안전도 크게 위협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뜨거운 고통에 르베나가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모든 인원을 한꺼번에 텔레포트하는 계획을 지워냈다.
르베나가 곧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서 연령이 많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 혹은 임신 중이거나 열다섯 살 이전의 어린 여성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웅성웅성하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르베나가 가리킨 곳에는 곧 열다섯 명 내외의 여성들이 자리했다. 르베나가 여성 모두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상황은 급박했지만 르베나는 여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최대한 침착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도록 노력했다.
“이곳은 곧 무너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전 그 전에 여러분 모두를 텔레포트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하지만… 텔레포트로 여러분 모두를 한꺼번에 옮기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한 팀을 먼저 옮기고 그다음에 나머지 분들을 옮기겠습니다.”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왕좌왕하던 여성들의 얼굴이 다르게 바뀌어 갔다. 노약자로 분리된 무리는 어둡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무리는 조금 환하게 말이다.
그들은 저 여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단지 그녀는 이곳에서 본인들을 꺼내 주었고 적들이 감옥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가 그녀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지한 그녀들이라도 텔레포트라는 마법이 그리 간단한 마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게다가 열다섯 명 정도의 인원을 한 번에 보내는 것도 기적인데 한쪽을 먼저 보낸다면… 그다음 여성들의 차례에는 적들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거나 이 건물이 무너진 후가 될지 몰랐다.
콰르르릉……! 후두둑!
이 순간 모두의 불안감을 부추기듯 감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큰 소리를 울리며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문을 뜯어내려는 적들의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