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70화 (70/276)

7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9)

“뭐?? 이 년이… 누구, 누구라고?”

자르던의 말에 아덴이 반가운 얼굴로 르베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진짜. 정말 반가워 보였다.

“맞지? 아 어디서 봤나 했어! 이제 보니 스릴 공주가 아니라 그때 그… 베이라 였구나!”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던 아덴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번뜩인 순간이었다. 자르던이 재빨리 르베나의 몸에 바늘을 꽂으러 달려왔다. 주제에 일단은 본능적으로 이 여인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뒤로 묶여있던 팔을 거꾸로 돌려 빼내고 자드런의 느린 손을 여유있게 피한 다음, 다가오는 아덴을 발로 걷어차버렸다.

일련의 묘기와도 같은 움직임에 모두가 놀라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유일하게 르베나의 발에 맞고 나가떨어진 아덴만이 씨익 웃는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 진짜 멋지다, 너!”

입가에는 르베나의 발에 맞아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르베나가 다가오다 놀란 자르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와 놀아주는 것도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너의 쓰레기 같은 목적도 알았고, 네가 왜 스릴 공주를 납치하려 한 건지도 알았으니 말이야.”

르베나가 제 얼굴을 덮고있던 얇은 천을 벗어냈다. 그리고 금발로 바꾼 머리색과 좀 더 옅게 바꾼 눈동자색의 마법을 모두 거둬들였다. 마법을 거둬들인 르베나의 모습을 본 자드런의 작은 눈이 팽팽하게 커졌다.

“헉… 검, 검은 머리에 붉은 눈…? 피, 피부도 하얀 게 네가 정말 스릴 공주가 아니라는 말이냐? 그, 그럼 네 년이 정말 디오니스의… 고… 공주?”

벌벌 떠는 자르던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맞아. 그리고 혹시 몰라 말하지만 언제가 돼도 너 같은 거한테 잡혀줄 마음은 없다.”

르베나의 말에 자르던이 아무말도 못한 채 르베나를 향해 어어… 하며 손가락질만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르베나는 자신의 손에 검붉은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곧 쿠륵쿠륵-

소리와 함께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르베나의 손 끝을 물들였다. 이를 보고 있던 자르던이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마력이었다.

마력이 없는 자르던이라 할지라도 그는 흑마법을 연구한 이였다. 한순간에 저렇게 폭발할 듯한 마력, 그것도 가시적으로 보이는 마력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눈앞의 여자가 웬만한 실력의 베이라 그 이상이라는 것. 또한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는 언젠가 들었던 옅은 기억의 자락을 끄집어 내었다.

디오니스의 공주. 검은 머리 붉은 눈의 그녀는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조차 고개 숙이게 하는 실력의 베이라라고.

두려움에 떨며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자르던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두려워마라. 너에게 줄 동정따위는 조금도 없으니.”

이내 말을 끝낸 르베나의 손에서 폭발할 듯한 검붉은 마력이 폭사하듯 방안을 가득 채워나갔다.

“…피해!”

르베나의 마법이 방안에 폭사하자 곧바로 벤을 제 품으로 당겨 끌어안은 아덴이 주위로 실드를 쳤다. 자르던 역시 들고 있던 원석의 마법을 통해 실드를 쳤고 오직 그의 부하 둘만이 르베나의 마력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자르던을 감싼 실드에 가 닿았다. 그냥 보기에도 기분이 나빠질 만큼 어둡고 짙은 검은색의 실드. 그건 단순히 검은색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만큼 수많은 색이 었지만 마치 공허만이 남은 듯한 색이기도 했다. 그 색의 실드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 르베나의 눈이 싸늘하게 자르던을 향했다.

그러자 검은빛의 실드 안에 있던 자르던이 소리쳤다.

“멍청한 계집애! 내가 이 원석을 비워놨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동안 자칸에서 납치한 계집들만 해도 몇 명인데 킬킬킬…!”

놀라 벌벌 떨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깔깔 웃는 자르던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부족에서 납치된 여성들만 수십 명에 달한다고 했다.

“그럼 그들의…!”

르베나의 말에 자르던이 원석을 소중한 보석처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래. 도움도 안 되는 계집들이 죽어서나마 도움이 되는 거지. 키키키.

하지만 너는 느낄 수 없을 거다. 원석은 흑마법으로 결계를 걸어놨으니!”

그의 말이 맞았다. 기감이 꽤 좋은 편인 르베나도 아까 그 원석이 몸 가까이 다가왔지만

쉽게 그 안에 들어있는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원석을 감싸는 흑마법은 자르던이 아닌 꽤 수준 높은 자가 시전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새로운 종류의 힘이거나. 순간 그 원석을 바라보던 르베나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살려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아파요…! 아파! 싫어!!’

아무 힘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던 젊은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와. 몸 속의 모든 신력과 마력을 빼앗겨 죽을 때까지 느꼈을

그들의 공포가. 원망이. 분노가. 슬픔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마치 아무 힘도 없어 속절없이 궁 안의 시녀들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되었던 어린 시절의 르베나가 그 원석 안에서 울부짖는 느낌이었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구석의 실드 속에 있던 아덴과 벤을 향해 말했다.

“너희도… 한패인가?”

음산하고 고저없는 르베나의 목소리에 벤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아덴이 자르던의 뒤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러고는 자드런의 실드안에 쑤욱 손을 넣어 그가 들고 있던 고서를 빼냈다.

그의 행동은 빨랐고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에 벤에게 돌아오더니 르베나를 향해 윙크를 하며 말했다.

“우리는 스릴 공주를 납치해주는 대가로 이 물건을 받기로 했어. 전말은 몰랐어. 뭐 알았다고 해도… 했겠지만.”

그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그를 사납게 향했다. 그러자 그가 자르던을 눈짓하며 말했다.

“아… 하지만 난 오늘 여기서 너랑 붙을 생각은 없어. 생각보다 겁이 많거든, 내가. 그리고 약간의 의리로 분명 자칸의 왕에게도 경고를 해 줬는데?”

‘스릴 공주가 베이라이니 조심하라고 자칸의 왕에게 보낸 협박이, 설마?’

르베나의 눈을 보며 한번 씨익 웃은 그가 말을 끝내자 곧바로 미리 말을 맞춘 듯 그의 곁에 앉은 벤이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르베나는 벤의 단검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방어를 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르베나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던 검이 간발의 차이로 르베나를 스쳐지나 자르던의 원석에 가 정확하게 꽂혔기 때문이다.

갑자기 곁에 있던 고서를 빼앗긴데다 난데없이 원석에 단검이 꽂히자 놀란 자르던이 부들부들 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이에 아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봤는데 저 멍청한 놈은 물리적 공격을 막는 실드는 못치더라고.

덕분에 쉽게 물건도 얻었고.”

아덴이 손 안에 든 고서를 흘끗 보고서는 다시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원석도 곧 파괴될 듯 하니 우리는 좀 보내줘. 저 단검은 그냥 단검이 아니라 내 신력이 꽤 실려 있는 검이거든. 그 말인즉.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야. 디오니스의 공주님.”

아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강한 마법의 파장이 느껴졌다. 르베나가 고개를 돌리니 자르던의 손에 들린 원석이 들썩 들썩거리며 단검이 꽂힌 약간의 틈에서 마력과 신력이 뒤죽박죽 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속에 있던 것들과 아덴이란 자의 신력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어!’

르베나가 황급히 그들이 있던 곳을 돌아보자 아덴과 벤은 이미 텔로포트로 도망친 한 후였다. 그들의 자리는 깨끗했다. 순간 마법의 흔적이 남은 그들의 자리를 보며 르베나가 고민에 휩싸였다.

‘…따라갈까?’

아무리 이들과 한 패가 아니더라도 납치에 가담한 실력 있는 이들을 이대로 놔주는 것은

좋지 않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의 놈들은 모두 잔챙이들이다.

궁에 있는 기사들을 부르면 처리가 가능한 정도.

하지만 방금 사라진 아덴이란 자는 적당한 실력의 세츠가 아니었다.

결정을 마친 르베나가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마법의 흔적을 읽으며 서서히 마력을 모았다. 그런데 그 순간…! 르베나의 주변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어지러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르베나의 눈이 자르던이 있는 쪽을 향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눈이 약간의 당황스러움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신력과 마력이 방출되어 마구 섞이며 점점 그 크기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마법의 힘은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르베나에게 느껴지는 이 기운은 몹시도 이질적이고 낯설었으며 선뜻 손대기 싫을 만큼의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마도 십분 이내…!’

정제되지 않은 마법의 힘들은 서로의 힘을 이기지 못해 폭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공간이 저 마력과 신력의 뒤섞임에 휩싸여 가루가 될 것이다.

르베나의 눈이 곧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나오는 원석을 들고 당황해 하는 자르던을 향했다.

‘이놈들은… 상관없다. 죽어도 싼 놈들이니.’

어차피 모두 르베나의 손에 끝날 놈들이었으니 저대로 죽게 두어도 된다. 하지만 이대로 르베나가 아덴을 따라 가버리면… 그러면.

르베나의 머릿속에 아까 본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둡고 축축한 감옥. 그 안에서 영문도 모른 채 공포와 두려움에 질색해 있던 여성들.

“하아…….”

르베나가 눈앞의 자르던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원석에서 나온 힘의 충돌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추한 마지막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르베나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억울해하지 말기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르베나는 서슴없이 몸을 돌려 치마 속에 숨겨 둔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곧바로 르베나의 검집에서 은빛의 신형이 뽑아져 나왔다. 그리고 르베나의 모습을 본 자르던이 공포에 떨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덴의 말처럼 이 원석으로 낼 수 있는 실드는 마법만을 방어할 뿐 물리적인 방어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곁을 지키던 부하들은 방금 전 르베나의 마력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덜덜.

가엾을 정도로 제 모든 살을 떨어대던 자르던이 르베나를 보며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살, 살려… 제발……!”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망설임 없이 그어진 르베나의 칼날에 그의 목은 빠르게 몸과 분리되어 버렸고 그는 채 눈을 감지도 못한 모습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투욱-!

“너 따위에게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겠다.”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그의 손에서 떨어진 원석이 더욱 기괴한 소리를 내며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자르던의 붉은 피가 흥건하게 바닥을 적셔오고 있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좀 더 난폭한 기세로 힘을 뿜어내는 원석을 뒤로 한 채 르베나가 마력을 모으자 그녀의 검에서 검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발동된 마법에 눈앞의 문이 순식간에 가루처럼 부서져 버렸다.

파스스--!

큰 소리도 그리고 흔적도 없이 가루처럼 사라져 버린 문. 이윽고 문의 가루 조각들이 공기 중에 흩날려 사라졌다. 그러자 앞선 폭발음을 듣고 자르던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수십 명의 적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의 눈이 하나같이 잔인하게 번뜩이며 그녀, 르베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선 수십 명의 사내들을 보며 르베나가 제 손에 잡힌 검 손잡이를 더 힘주어 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검붉은 눈이 피처럼 붉게 반짝였다.

‘나는 절대… 지지 않는다!’

망설임 하나 없이 수십 명의 적들 속으로 르베나의 가는 몸이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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