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8)
베이라 쥬라. 그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때 죽은 디오니스의 기사들이 떠올랐고 르베나의 기분은 저 밑 바닥을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자드런은 계속 이어 말했다.
“난 오랜 연구 끝에 사람의 몸에서 신력과 마력을 뽑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드디어… 성공하게 되었다.”
그의 말에 르베나의 눈에 경악과 놀라움이 가득 찼다.
“…뭘… 뽑는다고?”
흑마법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금지된 술법이었다. 그 중 한 이유는 흑마법이 주로 동물이나 사람의 피와 시신 등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더 강력한 주문을 쓸 수 있게 고안된 것이 바로 흑마법이다. 무엇보다 한번 동물이나 사람을 해한 마법사는 그 힘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더 큰 마법을 위해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고 점점 영혼이 타락해 갔다.
그리고 몇 백년 전, 세상을 종말로까지 몰고 가려던 흑마법사단체의 출현을 계기로
모든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와해시킨 이후, 모든 세계에서는 흑마법의 사용과 연구를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흑마법을 쓰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몸에서 신력이나 마력을 뽑아낸다고?
“뭘 알고 지껄이는 소린가. 네가 마력이나 신력을 뽑아낼 세츠나 베이라 중에
너 같은 쭉정이에 잡힐만한 마법사는 많지 않다.”
분명 흑마법을 다룬다고 했지만 르베나가 본 자드런의 몸에는 마력이나 신력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생명을 위한 기본만이 존재할 뿐.
그런 흑마법사에게 자신의 마력이나 신력을 받치러 잡히는 멍청한 이들은 없을 것이다.
르베나의 말에 자드런이 한껏 기괴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하하하하 멍청한 계집. 그러니 너희들은 거기까지인 거다. 누가 세츠나 베이라한테 빼낸다고 했느냐? 나의 궁극적 목적은 세상의 모든 세츠와 베이라를 내 발 아래 두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이 먼저 죽으면 곤란하지… 흐흐 내가 마력과 신력을 추출하는 건… 베이라와 세츠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서다 크하하하하!”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덴이 휘익~ 휘파람을 부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여기 정말 미친놈이 있었네’
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자드런을 보고 웃으며 휘파람을 불지만 그의 눈에도 숨기지 못한
불쾌함과 경멸이 엿보이기도 했다. 르베나는 순간 제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실종되는 자칸의 여성들. 신력과 마력의 추출. 유독 여성의 인권이 낮다고 알려진 자칸의 상황. 르베나의 온몸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떨려왔다.
“너… 혹시… 자칸의 여성들에게서……?”
차마 끝내 뱉지 못한 르베나의 말에 자드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켰다.
“하하하 아주 멍청한 년은 아니구나!”
휙.
그의 역겨운 얼굴이 순식간에 르베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훅 끼쳐온 그의 소름끼치는 냄새와 함께 다가온 그의 눈은 광기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래. 난 그들에게서 신력과 마력을 추출해냈다!”
그의 말에 르베나가 제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감정이 극에 달할 때마다 나오는 르베나의 버릇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신력과 마력은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힘이다. 그걸 빼앗으면 그들은…!”
씨익.
누런 이가 환히 보이게 자드런이 웃었다.
“죽지. 아주 고통스럽고 기괴하게 말이야. 크크큭크크 마치 생명의 근원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처럼 흐느끼는 것들도,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들도, 그리고 그런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잠식되어 죽어가는 것들도… 있지. 우린 그걸 세상의 흑마법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걸 통해 세상에 무시당하던 우리는 힘을 갖게 되지.
언젠가 모든 세츠와 베이라들을… 몰살시킬 때까지 말이야.”
그의 말에 르베나의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는 장면들이 있었다.
수준에 맞지 않는 양의 마력. 이전의 삶에서 보다 많아진 마력. 그의 수준에 맞지 않는 광범위한 결계. 르베나의 가설이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혹시… 쥬라… 라는 베이라를 아나?”
르베나의 질문에 자드런이 놀라며 되물었다.
“쥬라? 쥬라를 네 년이 어떻게 알지?”
의심 가득한 그의 질문에 르베나가 손에 힘을 꽈악 쥐며 물었다.
“그 베이라도 너희 일당인가……?”
르베나의 말에 자드런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잘못 알고 있군. 그는 베이라가 아니다. 베이라이기를 포기한… 흑마법사다. 크크크.”
그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리고 르베나를 잡고 있던 한 줄기 이성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겠군.”
르베나의 물음에 자드런이 몸을 쑤욱 빼내며 물었다.
“멍청한 놈이었지. 돈에 환장해서 까불다가 쯧쯧… 그런 결계까지 쳐줬는데 그깟 계집애한테 죽다니 말이야.”
자드런의 말에 이제껏 잠자코 있던 아덴이 그의 말에 반응하며 물어왔다.
“계집애?”
“그래 크크크… 디오니스의 공주라나…? 그 년한테 죽었다고 하더군. 오죽 실력이 없으면 그런 쬐깐한 베이라 계집한테 죽었겠나…! 그년이 지금은 뭐 어디의 기사단장이 됐다고 하던데 크크! 디오니스도 이제 끝날 날이 얼마 안 남은거지. 어차피 우리들에게 사냥당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그때 그년 면상을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의 말에 아덴이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왜인지 그의 시선이 가만히 르베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덴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르베나의 분노는 눈앞의 자르던을 향해 더 곧게 뻗어있었다.
‘산 사람에게서 신력과 마력을 뽑아낸다니…!’
본인을 방어할 최소한의 힘도 없는 무력한 이들이 그들의 욕심에 희생되었다. 본인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고통과 공포 그리고 대상 없는 원망 속에 천천히 죽어갔을 이들의 생각에 르베나의 전신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런 놈들 때문에 명예를 지키던 디오니스의 기사들이 죽었다는 것이 더 르베나를 분노케 만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일단 화를 눌러 담았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이자들이 여성들을 납치했던 이유는 알았지만 굳이 스릴 공주를 납치한 이유까지는 모르겠어’
르베나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며 물었다.
“그래서. 날 데려오라고 시킨 이유는?”
르베나의 말에 자르던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그 얘기 중 이었지! 말했다시피 베이라나 세츠를 잡기는 웬만해서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딱 하나. 담을 수 있는 마력이 크면서도 잡을 수 있는 베이라가 있지. 크흐흐
자칸 왕족들은 대대로 꽤 많은 마력을 몸에 담고 있다. 거기다 각성까지 한 베이라라면 그 양이 꽤 많을 거 같아서 말이야 쓰읍 게다가 자칸의 여성은 인권이 낮으니…
각성을 한 자칸의 공주는…! 우리에게 최고의 먹잇감이지.”
침을 흘리는 듯한 표정으로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탐욕이 차올랐다.
그의 말에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냉소적으로 답했다.
“뭘 모르는군. 자칸 왕족은 대대로 마력이 약했어. 베이라가 태어난 건 스릴, 아니 내가 이례적인 경우다. 그리고 자칸은 여성을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을 뿐, 여성을 무시하고 박해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자 르베나의 말에 자드런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하! 그래서 너네는 무식하다는 거야! 본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
자칸의 왕족은 젠이나 디오니스의 왕족만큼 강인한 마법사의 피를 가졌어!
하지만 본인들조차도 그걸 알지 못하지. 왜인 줄 알아?
너희는 모두… 봉인 당했거든.”
“봉인……?”
르베나의 물음에 자르던이 기계를 가져다대며 말했다.
“하지만 곧 죽을 네 년이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어. 넌 그저 너의 마력과 봉인된 힘까지 나한테 넘기면 되는 거야. 지네가 가진 힘도 모르고 여자를 뭐같이 알아서 납치마저 쉬운 공주라니… 흐흐…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일 거야 넌…!”
그가 곧 투박하고 두꺼운 바늘을 가지고 르베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몇이나 남았지?”
“한 오십 명 정도입니다.”
대답을 끝낸 성기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마법에 실드를 쳐 막아냈다. 새하얀 그의 기사복은 어느새 누군지도 모를 이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폐하! 아무래도 좀 더 들어가야겠는데?”
역시나 붉게 물든 옷으로 나타난 라웅의 말에 그, 루드바하의 눈이 시리게 먼 곳을 향했다.
먼 곳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는 마법공격에 대항하는 성기사들의 실드와 공격마법이
끊임없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고 주변으로는 수십 명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하지만 그 수십 명의 시체 어디에도 성기사단의 시체는 단 한구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루드바하의 시린 벽안이 마법이 날아오는 커다란 동굴 안쪽을 향했다. 안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고 보안을 위해 조금만 데려온 성기사들은 아직 잘 싸워주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루드바하가 라웅을 보며 물었다.
“인질의 수는?”
“열댓 명 정도…? 그리고 모두… 아이들이야.”
“…위치는?”
루드바하의 질문에 라웅이 고개를 저었다.
“결계가 워낙 강해.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라웅의 말에 낮은 신음을 흘린 루드바하가 다시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말했다.
“텔레포트로 이동한다.”
그의 말에 라웅이 화들짝 놀라 발끈하며 말했다.
“안 돼! 동굴 안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데 텔레포트라니? 그러다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무리 폐하라도 텔레포트 바로 직후에는 마법을 쓰기 어렵잖아. 그때 공격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여긴 좁디좁은 동굴이라고, 폐하!”
그의 질문에 루드바하의 얼굴에 순간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에 문득 두려움이 느껴진 라웅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라웅의 팔을 잡음과 동시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땐 기사단장인 네가 막아야지.”
“폐, 폐하… 야!”
라웅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 루드바하와 라웅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루드바하가 남긴 흰 신력의 자락만이 방금 전 그들이 이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무거운 그의 몸이 르베나를 향해 다가오자 르베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능력한 자드런과 뒤에 시립한 두 명의 부하. 그들은 상대할 거리도 안 됐다.
문제는…!
르베나의 시선이 저 멀리서 무언가 생각에 잠긴 아덴과 벤을 향했다.
‘여자는 제압 가능하지만 아덴이란 자는 실력이 가늠되지 않아. 분명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면서도 신력자락이 보이지 않는 다라… 그 정도라면 분명 실력자라는 얘기다.’
점점 자드런의 바늘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물론 두껍고 비대한 그의 손가락이 뭘 들고 다가오든 그것은 르베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여성들과 스릴 공주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알았기에, 이제 르베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르베나가 손 끝에 조용히 마력의 기운을 모았다. 자드런과 부하 둘을 한 번에 제압한 후 아덴과 맞붙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아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생각났다! 그때 저택에서 나한테 마력 쏘던 베이라! 그게 너지???
아벨… 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 그게 너야?? 맞아?”
긴장감 가득한 방 안에는 한바탕 적막을 위시한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섞여들기 시작했다. 진짜 적은 자드런이 아니라 아덴의 쓸데없는 기억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