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7)
그의 말에 르베나는 침묵했고 스릴 공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납치되어 온 공주에게 누가 스릴 공주냐니.
르베나의 자진 납치극을 모르는 스릴 공주로써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곧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걸로 봐서는 이쪽이 자칸인이 분명한데……!”
그의 시선이 스릴 공주에게서 다시 르베나를 향했다.
“왠지 낯이 익은 건 이쪽이란 말이야… 하아… 어렵다!”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덴님, 그냥 마력이 있는 지로 살펴 보시지요.”
‘미성의 목소리… 그 날 저택에 함께 있던 자군’
곧 들려온 미성의 목소리에 르베나는 이 둘이 그 날 저택에 있던 그 두 자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덴이라는 자는 자칸의 여성을 빼돌렸고 르베나의 마법을 피해 도망갔던 자객.
그 옆, 미성의 여성은 바흐란의 칼에 찔려 정신을 잃었던 자객. 그 자객은 당시 다른 자객들과의 싸움이 끝난 후 이미 없어져 있었다. 아마 옆의 남자가 숨어 있다가 그녀를 데려간 것 같았다.
곧 고민에 빠져있던 남성이 르베나와 스릴 공주에게 바짝 다가섰다. 분명 스릴 공주와 르베나에게 신력을 주입해 저항하는 마력의 정도를 측정할 것이다. 스릴 공주는 마력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다.
‘나는 마력의 노출 정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문제는 스릴 공주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는 거다. 그러다 차이가 너무 나면 들통날 텐데’
그가 다가올수록 르베나의 팔을 꼬옥 쥐는 스릴 공주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가 그런 스릴 공주에게 먼저 손을 가져대려는 찰나, 르베나가 공주를 밀쳐내며 말했다.
“내가 스릴 공주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날 이런 데로 데려 온 거지?”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아덴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는 왕족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강하게 어려 있었다.
이에 다가오던 아덴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르베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이야? 당신이 스릴 공주야?”
그의 물음에 내쳐진 스릴 공주가 당황스러움이 얼룩진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기를 스릴 공주라고 부르던 여자가 난데없이 본인이 스릴 공주라니?
하지만 스릴 공주의 눈빛 따위에 아랑곳 않는 르베나가 작고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내가 자칸의 유일한 공주, 스릴이다.”
르베나의 말에 아덴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순간, 뒤에 서 있던 여성이 말했다.
“그럼 저 여자를 데려가죠.”
여성의 손이 진짜 스릴 공주를 가르켰다. 당황한 스릴 공주와 표정 하나 변함없는 르베나를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던 아덴은 곧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이쪽이 스릴 공주 같아, 음… 맞아!”
그리고 그의 손은 스릴 공주가 아니라 르베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고압적인 태도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겁내지 않는 당돌함…! 아니 무식함이라고 해야 하나? 귀하게 자란 공주님이 맞으시네!”
아덴의 말에도 르베나는 여전히 변화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당황스러운 마음에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던 스릴 공주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야. 저 여자가 아니라……!”
뭔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자 본인의 정체를 고백하려던 스릴 공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덴이 그대로 르베나를 끌어내 구속구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을 예상했던 르베나는 당황하지 않고 마치 모든 일에 순응하듯 얌전히 있었다.
그리고 아덴은 그대로 감옥 문을 나서 밖에서 문을 걸고 잠그고는 뒤로 돌아섰다.
아덴이 감옥을 뒤로 한 채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르베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홀로 감옥 안에 멍하니 남겨진 스릴 공주를 보았다. 순식간의 일로 어안이 벙벙한 공주의 모습이 르베나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아직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멍한 스릴 공주의 눈이 르베나와 마주치자
르베나가 스릴 공주를 향해 작게 입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의 감옥을 살피며 아덴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다… 리십시오… 공주님……?”
스릴 공주의 입에서 작은 말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방금 본 르베나의 얼굴에서 잠깐이지만 빛나던 붉은 눈을 떠올렸다.
“붉은 눈동자…!”
곧 스릴 공주의 손이 떨려왔다. 그러고는 곧 큰 녹안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르베나… 님!”
스릴 공주의 작은 말이 어두운 감옥 안 작은 희망처럼 빛났다.
“아직 없나?”
초조한 듯한 아를의 물음에 룬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한 룬 역시도 초조하게 여기 저기 자칸의 해지는 하늘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곧 랄프가 작은 소리로 다한에게 말했다.
“단장님은 강한 분이시니까… 곧 표식을 띄우시겠죠?”
랄프의 말에 다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 분은 한 번도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 실패한 적이 없는 분이다. 그러니 단장님을 믿고 기다려라. 분명히 표식은 올라올 것이고 그때 우리는 주저함 없이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면 된다.”
다한의 말에 랄프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어젯밤 르베나가 납치된 이후로 시간이 흘러 벌써 다음 날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벨디온 모두가 하늘에 쏘아 올려질 검붉은 회오리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그날 자칸의 무심한 하늘은 서서히 끝없는 어둠으로 물들었으나, 그 어디에서도 그들이 기다리던 르베나의 표식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덴이라 불린 자와 르베나, 그리고 다른 여성의 발걸음 소리가 제법 스산하고 조용한 지하에 철벅철벅 울렸다. 르베나는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조용히 주위를 관찰했다. 감옥의 규모와 탈출로, 잡힌 죄수가 대부분 자칸의 여성이라는 것 까지 파악했다.
이들이 왜 이런 일을 자행했는지를 알기 위해 르베나는 순순히 아덴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세츠의 힘을 지녔으면서 이런 일을 하는 아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렇게 르베나의 머릿속이 이런저런 정보로 채워져 나갈 무렵, 갑자기 주위가 온통 환해지며 점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왼쪽에 다섯, 오른쪽에는 여섯. 위쪽에도 열댓 정도가 있군.’
환해진 사위에 르베나가 재빠르게 주위에 있는 적들의 수를 파악했다. 이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나면 아마도 르베나 혼자 돌파해야 할 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덴의 옆에서 걷던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덴님, 왜 이렇게 길을 돌아서 가시는 겁니까?”
여인의 물음에 아덴이 하하 웃으며 유쾌하게 답했다.
“벤, 내가 언제 이렇게 공주님과 나란히 걸어보겠어. 공주님 모시는 김에 산책이라도 시켜드리려는 거지!”
그의 말에 곧 벤이라 불린 여성은 그의 이런 돌발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의 별난 행동이 고마울 뿐이었다. 덕분에 적진의 규모와 인원을 대충 다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과의 산책(?)이 끝나갈 때쯤, 아덴과 벤이라 불린 자들이 어떤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르베나를 어떤 의자에 생각보다 꽤 조심히 안내해 앉혀놓았다. 르베나를 앉혀놓으며 손을 떼는 아덴의 눈이 순간 르베나와 마주쳤다. 장난끼와 호기심이 듬뿍 섞인 눈빛이 한순간이지만 르베나의 눈에 진득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돌아선 그가 앞에 선 무리에게 말했다.
“자 니들이 원하던 스릴 공주다. 이제 물건을 넘겨.”
그의 말에 곧 한 사람이 나서며 물었다.
“스릴 공주로 의심되는 자가 두 명이라던데… 어떻게 믿지?”
그의 말에 아덴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신력으로 확인했으니 맞아. 그리고 얘가 아니면 감옥에 있는 애를 데려오면 될 거 아니야!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맞으니까.”
그의 말에 상대방이 르베나를 세심히 살펴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그가 곧 아덴에게 말했다.
“물건은 구했다. 다만, 넘기는 것은 스릴 공주란 것이 확인되고 나서다.”
그의 말에 벤이 발끈해 나서려 하자 아덴이 이를 말리며 먼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물건부터 확인시켜줘.”
아덴의 말에 남자가 뒤에 선 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곧 구석에서 어떤 것을 가져왔다.
‘…책?’
그들이 아덴에게 어떤 것을 펼쳐 보이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꽤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대충 책장을 넘기자 아덴의 눈빛이 기이한 빛으로 빛나는 것 또한 보였다.
남자가 말했다.
“물건은 확실하다.”
그의 말에 아덴이 흡족한 듯이 말했다.
“응, 물건은 정말 확실한 것 같군.”
그러자 남성이 아덴을 지나쳐 르베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럼 이제 물건의 교환 조건인 스릴 공주가 맞는지도… 확인해볼까?”
다가온 남자는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지만 꽤 추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잔뜩 굽은 등에 얼굴에는 크고 작은 점들이 가득했고 말할 때마다 입에서는 구역질 날 만한 냄새가 올라왔다.
또 그는 손에 큰 바늘에 연결된 어떤 원석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걸 들고는 르베나에게 다가왔다.
“공주… 많이 아프진 흐흐… 않을 거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가 점점 다가오자 르베나가 그가 든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하려는 거지?”
르베나의 물음에 다가오던 그가 멈추더니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아, 이런. 내가 소개도 하지 않았군. 하하… 나는 자드런. 위대한 연구가다.”
“자드런?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처음 듣는 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르베나의 말에 그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작게 째진 눈으로 르베나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물론! 너 같이 무식한 것들은 나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겠지! 하지만 흑마법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나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하하하.”
“흑… 마법?”
되묻는 르베나의 말이 제법 사납게 낮아졌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자드런은 계속 신난 듯 떠들었다.
“그래 흑마법! 세상의 모든 멍청한 놈들은 오랜 시간 흑마법을 무시한 채,
신력과 마력으로만 나뉘어 싸워댔지. 하지만 신력도! 마력도! 절대 따라오지도!
흉내낼 수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흑마법이다! 나는 일치감치 이것을 깨닫고 흑마법을 연구해왔다. 그리고 아주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 기계를 만들었지!
이 기계로 난 엄청난 흑마법사가 될 것이고 곧 세츠들의 왕이라 떠받들어지는 유파시드를 내 발밑에 기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음하하하하.”
그의 말을 듣던 르베나의 붉은 눈이 순간 더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전의 삶과 지금을 통틀어 르베나가 만난 흑마법사는 오직 하나. 바로 쥬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들과 쥬라가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르베나의 머릿속을 강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