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67화 (67/276)

6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6)

르베나의 앞에 선 아를이 어둡게 가라앉은 금안으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진짜… 하아…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자. 제발 단장……!”

흡사 애원에 가까운 그의 말에도 르베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납치된 사람들의 목숨이 보장받는 건 길어야 하루 이틀이다. 그 안에 그놈들을 잡지 않으면 스릴 공주를 비롯해 모두가 더 위험해질 뿐이야.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지는 것뿐.”

단호한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미끼라면 자칸의 다른 여성이 해도 됩니다! 그럼 되겠군요!”

하지만 상기되었던 다한의 표정과 다한을 천재바라보듯 하던 아를의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객들의 마법과 무력에 대항할 여성이 자칸에는 없지 않나? 행여 있다 하더라도 그들보다는 내가 안전할 확률이 더 높아.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그놈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놈들의 본거지를 쓸어버리는 거다. 그러니 기각.”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다시 한마디를 덧붙이려는 순간, 그녀가 차갑게 덧붙였다.

“나는 너의 상관이다, 아를. 그리고 이 작전은… 내 명령이다. 더 이상의 만류 또한 기각이야.”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한없이 차가워진 금안으로 르베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휙,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그런 아를을 바라보던 다한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시겠지만… 저처럼 아를 경도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겁니다.”

슬쩍 제 의견도 함께 피력하는 다한의 말에도 르베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는 다한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다한 그대도 아를처럼 내가 걱정되는 건가?”

르베나의 물음에 다한은 잠시 망설였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공주님은 공주님의 힘과 관계없이 지키고 싶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미 한차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다한에게 르베나는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아니 지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르베나가 물어온 것은 그런 의미의 질문이 아닐 것이다. 다한의 머릿속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어떤 장면들로 가득 찼다. 여리고 어린 몸에도 시녀들의 매를 맞으며 버티던 르베나. 드록의 잔혹한 칼질에 나무에 묶여 온몸이 피로 물들었어도 찰나의 기회로 그를 제압하던 르베나. 쥬라와의 결투에서 남은 디오니스 기사들을 모두 살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들에게 돌아왔던 르베나.

곧 다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닙니다. 저는 단장님이 누군가의 걱정을 사게 할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믿기에 따랐고, 믿기에 따를 겁니다.”

다한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만족감으로 밝게 빛났다. 그리고 뒤에 선 바흐란만이 그런 르베나의 모습 하나하나를 묵묵히 제 녹안에 담아두고 있었다.

휘이잉…!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자칸의 밤. 르베나는 오늘부터 스릴 공주의 방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궁인들을 통해 암암리에 소문을 퍼뜨려 놓았다.

“그거 알아? 혹시나 싶은 폐하의 우려에 스릴 공주님을 대신한 시녀가 잡혀갔대!”

“들었어! 덕분에 스릴 공주님은 무사하시잖아! 그 시녀도 무사히 돌아와야 할텐데 말야!”

모두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소문은 곧 자칸의 모래바람만큼이나 빠르고 강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르베나는 일부러 시녀들과 바흐란을 대동하여 낮에 궁을 돌아다녔다. 마치 누군가를 경계하듯 자칸의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정원을 나갔다가 르베나의 존재를 보고 스릴 공주다, 라는 수군거림이 들리면 다시 방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아벨디온 기사단은 대외적으로는 납치 사건을 조사하러 외곽지역에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상은 아쿤을 대동한 몇 명의 기사만이 갔을 뿐이었다. 다한과 아를은 몸을 숨기며 계속 르베나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불 꺼진 방안에 홀로 있는 르베나의 말이 건조한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르베나가 스릴 공주로 가장하여 궁 안을 활보한지도 벌써 이틀째였다. 그들이 굳이 왕궁까지 침투해 스릴 공주를 납치한 것이라면 분명 스릴 공주에게 어떤 목적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대담한 그들은 또다시 올 것이다. 이곳에 남겨진 소문의 스릴 공주를 찾아서.

르베나가 침대에 누워 순간 전신의 감각을 곧추세웠다. 자칸의 왕궁은 진짜 스릴 공주가 납치되지 않게 하겠다는 명목 하에 경비를 강화했지만 적들이 뚫을 수 있을 만큼의 빈틈은 아주 조금 남겨두었다. 의심되기는 않지만 들어오지 않을 수는 없게.

딱 그 정도로만.

달칵., !

순간 르베나가 누운 방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자칸의 뜨거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침대 안에 누워있던 르베나가 조용히 눈을 감고는 움직이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 한명. 그 한 명의 침입자가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숨기려는 의도 따위도 없이 꽤 당당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발걸음 소리가 르베나의 앞에 멈춰 섰다.

스윽.

그의 손길에 르베나를 덮고 있던 이불이 무력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법으로 변화시킨 르베나의 밝은 금발이 보였다.

“흠… 이번에도 가짜면 어쩌지?”

작게 중얼거린 남성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움직이려는 찰나,

“슬립.”

그가 슬립 마법을 걸었다. 동시에 르베나는 툭, 다시 잠에 빠지며 머리를 떨구었다. 곧 남성이 잠든 르베나를 들어 제 어깨에 들쳐 메고는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르.”

소리와 동시에 그와 르베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이 활짝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아를의 금안이 어둠 속에 형형하게 빛났다.

“젠장, 텔레포트야!”

아를의 말에 다한이 아를의 어깨에 묵직한 손을 올리고 이를 악 물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장님을 믿고 기다리는 거다.”

대답 없는 아를의 말이 건조한 방안을 한번 휘감았다. 르베나의 제안으로 시작된 ‘르베나 자진 납치극’이 그날 밤, 어둠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 * *

그가 텔레포트를 함과 동시에 주변의 감각이 빠르게 뒤바뀌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둡고 습한 공기가 느껴지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어깨에 멘 르베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잠시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흐음…….”

르베나를 보며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던 그가 곧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머물던 이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르베나가 살며시 눈을 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습하고 차가운 벽돌로 이루어진 어두운 곳. 퀘퀘한 곰팡이 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삐걱거리는 소리들. 이곳은 딱 보기에도 지하에 만들어진 감옥 같았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야에서 가려진 다른 방 안에는 꽤 많은 수의 여성들이 함께 있는 듯했고 그런 방이 족히 수십 개는 돼 보였다.

여기저기서 흑흑 흐느끼는 소리와 살려달라는 낮은 애원의 목소리들이 쉼 없이 들려왔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르베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천으로 질끈 묶은 여자가 있었다. 르베나가 왜인지 어딘가 낯이 익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다가왔다.

“지금 많이 무섭고 당황스럽죠? 겁내지 말아요. 저도 납치되어왔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그대를 해치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말한 그녀가 조금 더 르베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어두운 공간 속, 조금은 앳된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대충 묶은 머리는 분명 결이 좋고 밝은 금발이었을 것이다.

걱정이 가득 담겼지만 맑은 눈동자는 누군가와 똑 닮은 녹안이었다.

“스릴… 공주님?”

르베나의 말에 그녀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알아요? 자칸의… 귀족? 귀족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누구… 지?”

가까이 다가와 쏘옥 얼굴을 들이밀며 르베나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그녀, 스릴 공주의 얼굴이 아까와는 달리 꽤 앳되고 귀여워 보였다. 방금 전까지 새로 온 신참(?)을 달래던 어른스럽고 포근한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에 사로잡힌 열다섯 소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흐음…? 이렇게 예쁜 여자를 내가 기억못할 리 없는데? 누구지, 누구지?”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자신을 살펴보는 스릴 공주를 보며 르베나가 다소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이 없어 보여 다행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스릴 공주가 잠시 하던 고민을 멈추고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전 아직 괜찮아요. 그러니까 음… 제가 비록 이름은 기억 못해 죄송하지만.

그쪽도 꼭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아요. 이래 봬도 우리 오라버니가 자칸 제일의 검사거든요! 꼭 구하러 올 거예요 꼭…!”

마치 스스로에게 되 뇌이는 것처럼 말하는 스릴 공주는 들었던 것보다 더 밝고 긍정적인

아가씨였다. 그 모습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던 르베나가 비로소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왜 이 방에는 저와 공주님밖에 없죠?”

그러자 스릴 공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그동안 보면 방마다 여러 명이 함께 있는 것 같던데… 난 온 뒤로 계속 혼자라서 좀 외로웠거든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음… 언니가 와서 너무 좋아요.”

대뜸 누군지도 모르는 르베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스릴 공주의 친화력이 바흐란과 꽤 비교된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또다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습한 지하바닥에 울려 퍼지자 르베나가 스릴 공주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제 검지 손가락을 입 위에 대었다. 그러자 스릴 공주가 곧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얼른 르베나의 곁에 와 붙었다.

작은 체구로 당당히 말했지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늘게 떨리는 스릴 공주의 불안함이 르베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스릴 공주도 왜인지 자기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르베나가 그 순간은 꽤 의지가 되었던 모양이다.

찰캉..!

곧 르베나와 스릴 공주가 있던 감옥의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한 남성과 함께 얼굴을 가린 실루엣의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얼굴을 가린 사람은 체구로 보아 여성인 것 같았다.

그리고 르베나는 남성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분명 마법을 쓰기 전에 유르, 라는 단어를 내뱉는 남자. 그를 처음 본 것은 삼일 전 귀족 여식이 납치되었던 자칸의 귀족 저택.

그리고 아마 오늘 르베나를 데리고 온 자 역시 그일 것이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그는 기대와 달리 꽤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흔한 갈색 머리칼에 흔한 생김새. 어디서 보아도 쉽게 지나치고 쉽게 잊혀질 만한 얼굴.

하지만 왜인지 묘하게 번뜩이는 눈빛만은 절대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는 분명 신력의 힘을 쓰는 세츠…!’

곧 그가 르베나를 가만히 보다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둘 중 누가 스릴 공주야?”

흥미진진하다는 듯 웃으며 건넨 그의 말이 어두운 감옥의 공기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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