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66화 (66/276)

6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5)

챙. 챙……!

아무리 협력을 위해 온 그들이지만 자칸의 왕을 독대하는데 무기를 소지할 수는 없었다.

다한과 아를이 급작스러운 왕의 공격에 서둘러 르베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왕의 공격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막혀버렸다.

“바흐란…! 어찌!”

왕이 떨리는 녹안으로 그의 단검을 쳐낸 자신의 아들, 바흐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갑게 가라앉은 녹안으로 내동댕이 쳐진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본 바흐란이 말했다.

“아바마마, 르베나 단장은 실력 있는 베이라입니다. 이런 검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한 공격을 받기 쉽상입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은 마치 자칸의 왕을 보호하려 한 것 같지만 바흐란의 눈은 그가 아닌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바흐란의 모습을 다소 충격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던 자칸의 왕이 곧이어 허허 실소를 터뜨렸다. 이에 아를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만 더 이런 공격을 한다면 자칸의 왕이건 뭐건 다 쓸어 버리겠어!”

타국의 왕에게 하기엔 과한 언사인 아를의 말에 바흐란이 홱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찌꺼기한테 쓸려버릴 자칸이 아니다. 말 조심해.”

“마법으로 속임수나 쓰는 주제에 아주 당당하시군.”

이어진 아를의 말에 바흐란이 한번 더 버럭 할 찰나. 더없이 차분하고 고저 없는 소리가 그들의 사이로 들려왔다.

“이것은 스릴 공주를 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스릴 공주는 베이라가… 맞습니까?”

주변 상황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여전히 눈을 빛내며 자칸의 왕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질문에 그가 의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그러자 르베나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답했다.

“납치범이 슬립 마법을 쓴 것은 맞지만 제 생각엔 당시 스릴 공주는 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침대에 또 다른 자의 마력이 남아있었는데 정제되거나 마법으로 채 구현되지 않은 마력의 흔적이었습니다.”

르베나가 잠시 왕과 바흐란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마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마력의 자락… 같았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왕이 작은 신음을 삼켰다. 바흐란의 표정 또한 흐려졌다.

만약 그게 정말 스릴 공주의 마력이라면 분명 겁에 질린 감정의 동요가 마력의 흔적을 남겼으리라.

그 순간 어린 공주가 느꼈을 공포가 떠오르니 아버지와 오빠의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잠시 말 없이 앉아있던 자칸의 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 사과하지. 내가 그대를 오해했군… 이 모든 것은 선왕과 선선왕의 판단에서…비롯 되었네.”

“자칸은 예로부터 베이라와 세츠가 구별 없이 태어나던 나라였네. 그래서 세츠가 월등히 많이 탄생하는 젠과 베이라가 월등히 많이 탄생하는 디오니스와는 달리 세츠와 베이라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는 왕국이기도 했지.”

자칸의 왕은 모두가 알 법할 얘기를 이어 갔다.

그들은 그런 분위기 탓에 신마전쟁 때도 내내 중립을 선호해왔으며 젠과 디오니스 각각에 필요한 만큼의 세츠와 베이라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사실 말이 보내준 것이지 자칸에 사는 세츠와 베이라들에게 스스로가 원하면 신마전쟁의 참전을 허락하되, 전쟁에 참전하는 동안은 자칸의 국민 자격을 박탈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자국민의 자격을 박탈해도 그들의 참전을 막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그들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칸 왕의 얘기에 르베나는 역대 자칸의 왕들이 넓은 아량의 소유자들임을 상기했다.

“그렇게 자칸은 오랜 신마전쟁에서도 평화를 이었지. 어느 편도 아니었기에 큰 발전은 없었으나 우리는 나름의 안전을 행복으로 여겼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신마전쟁이 끝난 후에 일어났지. 그게 3년 전의 일일세.”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던 스릴 공주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공주가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맙소사, 스릴! 이게 다 무엇이냐!”

엉망이 되어 버린 어린 스릴의 방을 본 자칸의 왕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본래 감정이 풍부하던 공주의 감정 기복이 유독 심할 때, 그녀의 주변에서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스릴 공주님이 자신의 시녀를 남몰래 학대하던 궁인을 훈계하던 중 그 궁인이 호흡 곤란으로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스릴 공주님 방의 모든 유리가 모두 깨져 버렸습니다. 유모의 죽음 후에 많이 슬퍼하시던 중… 갑자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자칸 왕은 모든 서적을 뒤졌고 결국 그와 같은 증세를 발견해냈다.

각성.

이는 보통 베이라나 세츠들의 각성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스릴 공주가 타고난 속성은 지금의 시기에 환영받지 못하는 힘, 마력이었다.

“비록 신마전쟁이 끝났지만 베이라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고 젠은 제국으로 승격을 했지.

나는 그 애를… 스릴 공주를 감추는데 급급했네. 절대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누구도 그 아이가 베이라라는 사실을 모르게.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과거를 얘기하던 왕의 얼굴에 고통스러움이 번졌다.

“유독 호기심이 많고 쾌활하던 스릴은 각성을 하고나서 순식간에 외톨이가 되었네.

누구와의 접촉도 제한되었고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주변이 통제되었지.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스릴은 그렇게 방 안에 머무는… 외톨이가 되어 버린거네.”

통한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말을 잇던 왕이 어느새 시선을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감감한 얼굴이지만 저의 말에 누구보다 귀 기울이는 것이 분명한 그녀를.

“그런 아이가… 자네 이야기를 듣고 무척 좋아했다네… 여성이고 기사단장이며 디오니스의 베이라 공주인 자네얘기를 듣고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 통 사정을 했지.”

왕의 말에 르베나는 문득 아까 시녀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스릴 공주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르베나의 말에 왕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대를… 만나게 해주겠다… 약속했거늘…….”

고개 숙인 왕의 모습은 이제껏 보던 호탕하고 밝은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 딸의 납치에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던 모두의 얼굴에도 숙연함이 감돌았다. 그때 아를이 왕에게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럼 아까 르베, 아니 단장한테 다짜고짜 공격을 한건 무슨 이유입니까?”

아를에게는 아까 그 일을 여상히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은 바흐란이 대신했다.

“스릴의 일을 아는 건 나와 아바마마밖에 없어. 스릴의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의문을 품은 궁인들한텐 적당히 둘러댔거든. 근데 얼마 전 협박편지가 왔어. 폐하께서는 아마 그들과 르베나 단장…이 순간 한패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협박 편지?”

“응. 분명 나와 아바마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인데 스릴 공주의 마력을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게 우린 자칸 납치범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하아…….”

제 머리를 푹 떨어트리고는 두 손으로 감싼 바흐란의 모습을 눈에 담던 르베나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일단 오늘 일을 계기로 녀석들은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 스릴 공주를 추적하기가 더 힘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스릴 공주의 마력을 이용해 위치를 알아낼 수는 없을까요?”

그의 말에 기대에 찬 왕의 눈빛이 절실하게 르베나를 향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번이라도 스릴 공주를 만나봤다면 시도라도 해보겠지만 흔적만 조금남은 마력으로 추적은 무리야. 하지만 공주에 있는 근처에 가면 알아 챌 수 있는 정도는 되겠지.”

르베나의 말에 기대에 가득 차 있던 왕의 눈빛이 급격히 실망으로 물들었다.

타국에 있던 어린 공주. 마력을 각성했기 때문에 외톨이가 된 어린 공주. 르베나는 왜인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 공주가 조금은 가깝게 여겨졌다. 그래서 여기서 절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지…….”

그리고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절망에 휩싸였던 공간에는 아주 작은 희망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세 개의 큰 그림자가 방문을 앞에 두고 서성이던 중, 아를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러자 웬일인지 그의 말에 한 번도 동의를 표하는 법이 없던 다한의 동의가 이어졌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그, 바흐란마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진짜… 싫지만 맞는 말이다.”

바흐란의 말에 다한과 아를의 눈이 경계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한은 단지 어릴 때부터 봐온 르베나의 보호자로서 또 이제는 본인의 주군으로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아를은 르베나를 향한 마음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지만 도대체 저놈은 언제 봤다고 같은 생각이라는 건지.

심한 경계가 어린 둘의 눈빛에 바흐란은 순간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스릴 공주 궁의 시녀가 나왔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오시죠, 공주… 아니 단장님.”

시녀의 말에 약간은 머뭇거리던 한 그림자가 곧 성큼 발을 내딛고 방문을 넘어 나왔다. 그리고 방 문 앞 벽에 기대어 서 경계의 눈빛을 주고받던 세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단정하게 묶여있던 르베나의 새카만 머리는 작은 보석들을 가득 끼워 굵은 웨이브를 타고 흘러내렸다. 옅은 화장으로 붉은 눈빛을 강조하되 입술과 피부색은 혈색이 좋을 정도로만 살짝 표현했는데 눈 밑부터 턱 선까지 모두 가리는 속이 비치는 얇은 천으로 인해

오히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게다가 자칸 귀족 여성들이 즐겨 입는다는 이 복장은 르베나의 몸매를 부각시키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몸통부분은 온통 자잘한 보석으로 치장한 얇은 천이 타이트하게 상체를 감싸다가 배꼽 바로 위에서 툭, 끊어졌다. 팔 부분은 상의와 이어진 시폰이 넓게 팔을 감쌌지만, 안이 그대로 비치는 소재 탓에 르베나의 팔 라인이 고스란히 모두 비쳤다. 짙은 보라색의 얇은 천이 빈틈없이 발목까지 감쌌지만 치마는 말 그대도 빈틈이 없어 엉덩이와 다리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났다. 매혹적이면서도 섹시한. 그러면서 더없이 고혹적인 자칸의 여성이 세 명의 남자 앞에 서 있었다.

“절대 반대야, 이 작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아를이 이를 악물 듯 말했다.

“후벤 경께서 아시면 제 목을 자르실 겁니다!”

이어진 다한의 말 또한 아를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바흐란만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을 빼고 르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바흐란의 심장이 미친 듯이 거세게 뛰어댔고 르베나의 이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다는 생소한 감정이 그를 옥죄여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 키에, 검은 머리가 언젠가처럼 그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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