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4)
“단장!”
멍하니 멈춰있는 바흐란의 모습에 부상의 가능성을 생각한 르베나가 다가가던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조금씩 바흐란의 손이 르베나를 향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다면 바흐란의 손은 어디까지 갔을까?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바흐란의 손이 뻗는 걸 보지 못한 르베나의 고개가 야속하게도 돌려졌다. 순간 그녀의 붉은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자 바흐란은 왠지 모르게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져 신경질적으로 제 목을 문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르베나에게 사나운 기세로 들어서는 그, 아를이 보였다.
“아를.”
곧 그를 발견한 르베나의 짧은 부름에 아를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마치 바흐란에게서 르베나를 가리듯 그녀의 앞을 등지고 섰다. 뭔가 다급해 보이는 아를의 모습에 르베나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작전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었다.
얼마나 서둘러 온 건지 아를의 온몸이 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를은 이에 아랑곳 않고 서둘러 주머니에서 메이슨가의 문장이 찍혀있는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얼굴에 피 칠갑 좀 그만해! 갑자기 보면 이게 단장 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말과는 달리 사뭇 조심스럽게 르베나의 얼굴을 닦는 아를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 르베나가 말했다.
“이게 내 피가 될 일은 없어, 아를.”
르베나의 말에 아를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르베나의 얼굴을 닦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아를의 모든 신경은 제 손 끝이 아니라 등 뒤에 바짝 곤두서 있었다. 제 등 뒤에서 뚫어질 것 같은 시선으로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 지금 이 순간 바흐란의 눈에 빛이라도 있다면 그 빛이 제 가슴께에 구멍이라도 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바흐란의 시선은 뜨거웠고, 이를 고스란히 느끼는 아를의 표정은 점점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 순간,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바흐란을 찾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왔다.
“바흐란 왕자님!”
자신을 불러오는 소리에 바흐란이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왕궁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가 바흐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애통하게 보고했다.
“왕자님…! 스릴… 스릴 공주님께서… 오늘 새벽 납치되셨습니다!”
기사의 침통한 말이 무겁게 방 안 공기를 가르는 그 순간, 무정한 자칸의 태양이 뜨겁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의 밝음에 어둠의 사위가 서서히 물러가는 순간. 방 안의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곳이 맞느냐?”
제법 사나운 눈빛으로 묻는 바흐란의 말에 옆에 선 채로 내 울던 시녀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흡… 분명 스릴 공주님께서… 밤에 침대에 누워 잠드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중요한 만남이 있으시다고 일찍 깨우라 하셔서… 그래서… 흑… 새벽에 오니… 흑…….”
울음을 겨우내 삼키며 말하는 시녀를 가만히 살펴보던 르베나가 곧 시선을 돌려 공주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자칸에 하나밖에 없는 공주의 것답게 환하고 사랑스러웠다.
밝은 색의 고급 모슬린으로 짜인 커튼과 파스텔 톤의 실크 쿠션. 곳곳에 놓인 사랑스러운 장신구들이 제 주인의 밝고 쾌활한 미소를 대신하는 듯했다. 오로지 활짝 열린 창문과 비어있는 침대만이 그 방, 무언가 소중한 것이 없어진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납치에 초조해질 만도 하건만 오히려 더 침착한 모습의 바흐란이 옆에 선 기사들에게 물었다.
“반항의 흔적이나 혈흔은?”
바흐란의 말에 이 궁의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보고했다.
“반항의 흔적도, 어떠한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그의 보고에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인 바흐란이 르베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베이라지? 그것도 꽤 실력이 출중한.”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니 바흐란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뭐 좀 읽히는 건 없어?”
많은 것이 생략된 물음에도 불구하고 르베나는 그가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처럼 답했다.
“마법의 흔적을 물으려는 거라면, 있다.”
순간 들려온 르베나의 답에 방 안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아니, 마법이라니요?”
놀란 시녀의 말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통 납치나 범죄에 사용되는 마법은 베이라들의 소행이 많았다. 세츠들은 그들의 왕 유파시드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신력을 다루는 성정 상 범죄에 연관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격성에 관한 마법은 신력보다 마력이 더 강력한 이유에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 예전의 일이었다. 현재 거의 모든 베이라들은 신마전쟁 이후 모습을 숨겼다. 그런데 음지에 숨어 드러나지 않은지 꽤 오래된 베이라. 이게 그들의 소행이라니?
르베나가 사람들의 경악을 조용히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붉은 눈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직 오래되지 않아 흔적은 선명하다. 슬립 마법으로 공주를 깊은 잠에 빠뜨렸어. 그리고…….”
르베나는 이어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문가를 유심히 살펴보던 르베나의 붉은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여기서 텔레포트… 했군.”
르베나의 말에 또다시 방안에 충격 섞인 정적이 흘렀다.
“테, 텔레포트요?”
그 정도의 대단한 마법사가 그저 평범한 자칸의 공주를 노린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도대체 저 기사단장은 뭐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걸 쉽게 척척 알아내는지. 순간 방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호기심과 경계심을 담고는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 때 르베나가 뒤로 돌아서며 바흐란을 바라보았다. 바흐란을 직시하는 붉은 눈빛이 어느 때보다 어두워보였다.
“근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르베나의 말에 바흐란이 무엇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순간 르베나의 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건 마력의 힘이 아니다. 스릴 공주를 납치한데 쓰인 것은. 신력… 세츠의 짓이다.”
이제껏 르베나가 한 어떤 말에도 한 번 흔들리지 않던 바흐란의 녹안이 잘게 동요한 순간이었다.
* * *
“타국의 기사, 게다가 여자에다 베이라인 자의 말만 믿을 순 없습니다!”
한 귀족의 반발에 다른 귀족들이 모두 동의를 표하며 한 마디씩 던졌다.
“맞습니다. 게다가 디오니스에 온 기사라니요……!”
“같은 베이라끼리 감싸려고 세츠라 말한 거 아닐까요?”
“애초에 마법이 사용됐는지 알게 뭡니까!”
귀족의 여식이 벌써 다섯 명. 거기다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까지 납치되자 자칸 왕국에서는 급히 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상황을 공윤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끼리도 의견이 나뉘기 시작했고 회의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미 딸을 잃어 분노에 가득 찬 이들. 다음이 자신들의 차례일까 겁에 질린 이들. 또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초조해하는 이들.
각양각색의 이유들이 모여 시끄러운 소리를 연출해냈다.
“여기든 저기든 귀족 놈들은 다 똑같아.”
가만히 보고 있던 아를의 차가운 말에 르베나가 피식 웃었다. 디오니스 제일가는 공작가의 일원이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칸의 왕이 모두를 조용히 시키며 말했다.
“내 그대들에게 하나만 묻지. 이래저래 말이 많아도 현재 자칸에 마법을 추적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소?”
왕의 말에 모두들 떠들던 입을 딱 다물고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본 왕이 말했다.
“우리 자칸은 신마전쟁의 중립국으로써 그동안 배출된 수많은 세츠와 베이라를
신마전쟁 지원군으로 보냈소. 그 결과 현재에는 뛰어난 마법사 하나 없는 실정이오.
이런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유파시드의 부탁을 받고 온 이들이 바로 저들, 아벨디온 기사단이오.
단지 여성이고 타국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들의 도움을 무시하고 거절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그럼 내 친히 저들을 물리리다!”
조금은 분노에 찬 그의 말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애꿎은 눈만 여기저기 굴리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들을 본 자칸의 왕이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려 숨을 내뱉었다.
“하… 그러니 모두들 다툼은 그만두고 저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 상황을 해결할 방안을 내보시오. 지금 우리끼리 의견이 갈리는 것은 어느 누구의 딸도 구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 뿐이니.”
침착을 가장해 말하고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그의 마음 또한 누구 못지 않게 바싹바싹 타들어갈 것을 모두가 알았다.
자칸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남성들은 여성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여성들을 존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타국과 달리 평생 한 명의 부인만을 들인다.
이것은 귀족과 왕가 모두 마찬가지로 현재 자칸의 왕 역시 한 명의 부인에게서 바흐란과 스릴 공주를 얻었다. 심지어 스릴 공주가 어릴 적, 왕비가 병으로 죽었음에도 그는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자칸의 남자에게 평생 한 명의 여성만을 사랑하는 것은 명예였고 긍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자칸의 여성답지 않게 쾌활하고 남성들의 일에 관심이 많던 스릴 공주. 그런 공주를 보며 자칸 왕은 특히 더 많이 웃음 지었고 공주를 귀히 여기고 사랑했다.
그런 그의 딸이 납치되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왕궁 안에서…!
지금 그의 얼굴은 평온하지만 그의 속에서는 백 마리 자칼들이 납치범들을 뜯어죽일 준비를 하고 있을 테였다.
“정말 이렇다 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그의 침통함과 슬픔이 회의장의 마무리를 무겁게 장식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회의가 아무런 해결방안도 없이 끝나자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르베나는 왕에게 독대를 청했다.
“독대를 말인가? 흠… 그렇게 하지. 그럼 바로 응접실로 가도록 하지.”
다한과 아를을 동행한 르베나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왕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피곤한 듯 메마른 얼굴을 문지르던 자칸의 왕은 르베나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바로 피곤한 표정을 지워냈다. 옆에 앉아있는 바흐란 역시 변화 없는 표정으로 침참하게 르베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르베나가 곧 자리에 앉자 자칸의 왕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있어 다행이네. 그대가 베이라라서… 말이네. 그러니 부디 스릴 공주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게. 내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하겠네.”
납치된 딸을 그리는 그의 무거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르베나가 오래 지나지 않아 운을 띄웠다.
“그러려면 우선 제게 한 가지 진실을 말해주셔야 합니다.”
르베나의 물음에 자칸의 왕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곧 고개를 돌려 바흐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흐란 역시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스릴 공주님이… 베이라십니까?”
순간 자칸 왕과 바흐란의 녹안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그리고 동시에 자칸 왕의 손에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단검이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그녀, 르베나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