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64화 (64/276)

6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3)

자칸의 동쪽 어느 동굴 안.

덥고 메마른 공기로 가득 찬 어둠 속에서는 성인 남성들의 숨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조용하고 점잖게, 하지만 어딘지 날이 서 있는 숨소리. 그리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큰 몸집들. 그때 다급하게 들려온 랄프의 소리가 조용한 동굴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단장님!”

랄프의 조금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에 그들을 이끄는 아벨디온의 부단장, 다한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곧 그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맺혀 올랐다.

* * *

자칸의 서쪽.

좁은 통로 안을 가득 채운 남성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서로의 숨에 닿으면 즉사할 것처럼 기를 쓰고 서로의 숨결을 피했다. 그중 유일하게 가장 넓은 공간에 홀로 조용히 앉아 있는 남성의 금안은 뒤쪽 남성들의 치열함을 알면서도 고요하고 무심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한기와 사막의 열기보다 뜨거운 여러 사람의 치열함으로 물들어가던 모두를 깨우는 소리가 그 때 들려왔다.

“부단!”

룬의 목소리에 무심한 남자, 아를의 금안이 룬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향했다. 순간 언제나처럼 고요한 아를의 눈이 가만히 자칸의 먼 하늘을 향했다.

자칸의 북쪽. 그곳에서 그녀의 표식, 검붉은 회오리가 어둠을 삼키며 광폭하게 피어올랐다.

사나운 마력의 흐름이 어두운 하늘을 수 놓는 순간. 그녀의 검붉은 색이 검은색을 어지럽히는 순간.

그 순간. 아를의 금안에서도 나른한 미소가 안도감과 함께 제 빛을 발했다.

“말도 안 돼!”

바흐란의 뒤에 있던 부상당란 자객이 르베나를 보며 경악에 찬 듯 소리쳤다.

“…님이 밀리시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자객의 목소리에 바흐란은 본인이 적을 눈앞에 두고도, 아니 등 뒤에 두고도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바흐란이 급히 검의 밑동을 휘둘러 자객의 머리를 쳤다. 그가 기절함과 동시에 바흐란의 시선이 제 앞에 선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휑하니 뚫린 저택의 벽을 통해 방 안에는 새로운 자객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아… 이것들은 또 뭐야?”

번뜩이는 녹안에 짜증이 가득 찬 바흐란이 싸늘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르베나의 힘에 취했다 겨우 깨어났더니 또다른 자객이라니…!

총 열 명. 르베나가 뚫어놓은 벽을 통해 들어오는 자칸의 뜨거운 모래바람과 함께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바흐란이 손에 쥔 검에 힘을 주며 씨익 웃었다.

“여기서 그거 쓰는 건 반칙 아니지?”

바흐란의 물음에 르베나의 얼굴에도 피식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왜인지 바흐란의 심장은 또다시 미친 듯 뛰고 있었다.

* * *

촤악..!

“크악……!”

바흐란의 둥근 칼날이 휘둘러지자 비명소리와 함께 눈앞 자객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바흐란은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자객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자객의 검을 비스듬히 꺾어 피한 바흐란은 그대로 제 몸을 돌려 빠져나오면서 둥근 검으로 그의 몸을 휘감았다.

싸악.!

손 끝으로 느껴지는 둔탁한 감각과 함께 또 한 명의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 명 더!”

짤막하고 가볍게 중얼거린 바흐란의 호흡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자칼과 같이 예리하고 살기어린 녹안이 번들거릴 뿐이었다.

방 안에 들어선 자객들은 모두 고도로 훈련된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번 합을 맞춘 듯 함께 행동하는데 익숙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평범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와 자칸 제일의 검객 바흐란. 그들이 함께였다.

그들의 칼에는 자비가 없었으며 그들의 움직임에는 망설임 또한 없었다.

“검잡은 놈은 다 덤벼!”

바흐란이 눈앞에 다가온 자객의 배를 깊게 그어내며 외쳤다. 그리고 순간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르베나의 등 뒤를 향해가는 자객 하나가 보였다.

“조심…!”

거리가 먼 탓에 조심하라는 말을 꺼낼 겨를도 없었다.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곧바로 뒤로 돌아선 르베나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자객의 붉은 피가 사선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자객이 서 있던 자리에는 르베나의 손에 들린 은색의 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 또다시 곧바로 찔러 들어오는 검에 르베나가 옆으로 유연하게 몸을 돌아 검을 피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자객의 뒤로 착지하며 그대로 자신의 검을 내려 그었다.

피슉-!

“끄악!”

곧바로 등이 깊게 베인 채 자객이 쓰러지자 상체에 자객의 붉은 피를 잔뜩 뒤집어쓴 르베나가 역시나 그곳에 서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 붉게 물들어가는 옷만큼이나 붉게 빛나는 선명한 눈동자.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가벼운 움직임.

“미친… 거… 아냐……?”

바흐란의 입에서 탄성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칸 제일의 검객이라 불리는 바흐란의 인생에서 누군가의 검술을 이렇게 넋을 빼고 바라보긴 단연코 처음이었던 것이다.

바흐란은 태어 날 때부터 검술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으며 아쿤의 지도를 받으며 자칸 최고의 검사가 되었다.

“왕자님은 모든 것을 타고 나셨습니다. 민첩한 몸과 검을 다루는 솜씨. 직감적인 궤도까지.

그리고 이제 왕자님의 성장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이 정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스승인 아쿤마저 바흐란과의 진지한 대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성장한 바흐란에게 그의 적수는 더 이상 자칸에 없었다.

‘다 시시해. 어떻게 휘두를지 뻔히 보이는 놈들 따위는!’

그렇게 바르한은 무료함에 질려갔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신력이 깃들어 있는 신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시에 신검을 가지고 훈련을 하다 몸 안에 잠재된 약간의 신력을 운용하여 검에 내장된 마법을 발동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이거 진짜… 대박이잖아!’

마치 누군가 망치로 깊게 뚫어놓은 것처럼 뚫린 큰 바위의 구멍을 보며 바흐란은 순간 마법사가 된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기쁜 것도 잠시.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무료함이 찾아왔다.

더 이상 그에게 적수가 될 만한 이는 더 찾기가 힘들었고 어쩌다 찾는다 해도 신검의 마법 한 방이면 모두가 나가 떨어졌다. 그렇게 혈기왕성하게 검을 휘두르고 싶은 바흐란에게 자칸은 너무나 좁은 곳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긴장감이나 호승심? 그런 건 이제 없었다. 누구를 상대해도 즐겁지 않았고 누구와 겨뤄도 지루한 승부에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그는 웬만한 사람들을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다. 적당히 실력을 본 뒤에는 신검으로 일격에 끝내버렸다. 그러면 그나마 시간이라도 절약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그 고약한 행동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길들어버린 그의 습관이 결코 좋지 않다고 생각한 건 최근이었다. 아벨디온의 부단장들.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해 마치 검술교본을 보는 것 같은 실력의 다한. 단 한 발자국의 물러섬도 허용치 않는 강하고 파괴적인 검술의 아를. 그들과의 승부는 오랜만에 바흐란의 심장을 뛰게 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승부를 가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손은 습관처럼 신검의 마법을 발동시켜버렸다.

“한번만 더 이딴 식으로 저희 기사들을 농락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자칸의 찌꺼기에게 졌다고 자존심 상해하지 마라.”

그러고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하는 그녀의 붉은 눈에 검사로써의 자존심이 짓밟혀버렸다.

등을 보이지 않는 검사의 의지. 약자를 위해 휘두르는 기사도. 상대 기사를 존중하는 예의.

어느새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게 된 어떤 것들이었다. 그것을 찾아 볼 수 없는 건 더 이상 그를 상대할 적수가 없다는 자신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한에게 그리고 아를에게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의 마법은.

또 그걸 들켜버렸을 때의 수치심은 그것이 자신감이 아니라 쓸데없이 자만이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오만함을 직시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신의 마법을 쓰는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과 붙는다면 그 여자의 붉은 눈이 조금은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와 같은 공간에서 은색의 빛 무리를 만들어내는 그녀, 르베나의 모습에 바흐란은 온몸에 흐르는 미칠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전율은 그를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검은.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매혹적이고 더없이 아찔했으며 미치도록 강렬했다.

르베나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바흐란의 녹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르베나의 동작 하나에 그의 눈에는 이채가 감돌았고 르베나의 검이 상대를 향해 그어질 때마다 그의 목은 긴장으로 타들어갔다.

꿀꺽.

자신이 뭐에 긴장하는 지도 모르는 새 바흐란의 목은 계속 무엇인가를 삼켜내고 있었다.

그 사이 르베나가 마지막 남은 자객을 베어냈다. 그러고는 남은 자객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는 가만히 언 것처럼 멈춰있는 바흐란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순간 그의 몸에 또다시 전율이 인 것 같았다. 최근 계속 그랬듯 가슴이 답답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주위를 감싼 공기가 더없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막의 자칼. 그들은 한번 점찍은 암컷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평소 유유자적 자연을 즐기던 자칼은 마음에 드는 암컷이 생기는 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듯 눈빛이 바뀌어버린다.

강한 전투력과 암컷에 대한 소유욕. 어느 수컷에도 암컷을 빼앗기기 않겠다는 투쟁심.

그것이 사막에 사는 수컷 자칼이었다.

이윽고 주변을 모두 둘러본 르베나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오는 순간. 바흐란의 얼굴에서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날 것의 미소가 올라왔다.

그것은 퍼석한 사막의 모래 같기도 했고 넓은 사막을 질주하는 자칼의 바람 냄새 같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에 타버린 공기의 버석함 같기도 하고 암컷을 향해 내달리는 자칼의 정열 같기도 했다.

붉고 선명한 눈동자. 그 눈빛만큼 매혹적인 붉은 입술. 르베나의 모든 것에 집중한 지금 이 순간 바흐란은 느낄 수 있었다. 맹목적인 자칼의 소유욕마저 이제는 제 것이 되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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