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2)
“부단!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연신 더운 날숨을 내뱉으며 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단장인 아를은 르베나와 바흐란이 함께 사라진 후부터 이 더운 날 고맙게도 찬바람을 쌩쌩 풍기고 있었고 동료들은 좁은 공간에 그들의 큰 몸을 구겨 넣고는 서로의 숨이 닿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룬의 물음에 아를이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놈들이 나타날 때까지.”
아를의 답에 동료들의 치열한 눈짓공격을 받은 룬이 아를에게 다시 물어왔다.
“만약 밤새 나타나지 않으면요?”
그 질문에 드디어 눈을 돌린 아를의 금안이 어둠 속에서 룬을 향해 번쩍 빛났다.
“그럼 밤새 있어야지. 이렇게 다정하게. 너네 서로의 숨결을 깊이 느끼면서.”
사아--!
순간 룬을 비롯한 네 명의 아벨디온 기사들은 순식간에 더위가 가시는 기현상을 경험했다.
“부단장님. 이쪽에 그놈들이 나타날까요?”
잔뜩 긴장한 채 제 옆에 꼬옥 붙어있는 랄프의 큰 몸을 슬쩍 본 다한이 말했다.
“알 수는 없지. 일단 최고 귀족들은 단장님과 바흐란 왕자가 향한 북쪽에 주로 있다고 하니.
그러니 일단은… 대기한다.”
다한의 말에 그를 닮아 점잖고 말수가 적은 기사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용한 적막과 숨 막히는 더위가 그들의 적막을 반기며 주위를 맴도는 순간.
랄프는 수다스러운 룬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보고 싶어졌다.
“나타나면 일단은 생포군.”
주위를 가볍게 둘러본 르베나의 말에 바흐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그녀를 슬쩍 노려보았다.
그러자 르베나가 그를 한번 흘끗 보고는 물었다.
“왜 그러지?”
르베나의 말에 바흐란이 한층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발끈했다.
“너 어제부터 은근히 반말이다?”
씩씩거리는 그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별 걸 다 신경쓴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난 존대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존대를 한다.”
순간 르베나의 말에 바흐란이 화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가는 저를 향하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다시 엉거주춤 앉으며 작게 버럭 했다.
“너 기사단장으로 대해 달라며! 난 자칸의 왕자야! 어떤 기사단장이 왕족한테 반말을 쓰냐?
반역죄로 죽고 싶어? 어?”
제법 형형하게 녹안을 빛내며 묻는 바흐란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앞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우리 기사들한테 반칙이나 쓴 너같은 놈한테 존대를 할 이유를 못 느낀다. 그리고 모르는거 같아 말하자면. 난 자칸인이 아니므로 엄밀히 따지면 너네 국법에 접촉되지 않는다.
일국의 왕자라면 이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게 좋겠군.”
바흐란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한 마디를 더 하려는 그 순간.
“쉿.”
르베나가 조용히 내뱉은 작은 말에 바흐란의 눈이 얼른 그녀의 눈을 따라 먼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둠을 틈타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드디어……!”
바흐란의 녹안에 자칼의 것과 같은 야생의 빛이 어렸다.
수많은 그림자들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그 중 두 개의 그림자가 한 고급저택의 문을 쉽게 넘어섰다. 동시에 근처에 있던 경비병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은 어둠에 섞여 자연스레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곧 르베나가 바흐란을 보자 그가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선을 교환한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어둠속을 달리는 둘의 형상은 좀 전의 그림자들의 움직임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하고 빠른 르베나와 바흐란의 몸이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꺄악!”
가녀린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르베나와 바흐란은 여성의 소리를 듣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 방 앞에 와서야 급히멈춰 섰다.
방 안에서는 연신 여자가 무엇인가를 집어던지며 누군가를 향해 반항을 하고 있었고 그때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압해서 데려 간다.”
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딱딱하고 서늘한 목소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에서는 곧장 환한 빛이 터져 나왔고 이에 비명을 지르던 여성은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거기 서!”
방 안의 상황을 본 바흐란은 여성이 기절하자마자 르베나가 말릴 틈도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놈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여성을 들처 업고 있던 한 명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그 옆에 선 자가 바로 단검을 내던졌다.
이에 여유롭게 단검을 피한 바흐란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감히 자칸의 여성들에게 손을 대다니! 절대로 곱게 죽이진 않겠어!”
바흐란이 외침과 동시에 허리께에 있던 검을 꺼내자 스릉. 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단검을 던진 이 역시 양손에 단검을 재차 쥐며 대치하자 순식간에 방 안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의 짜릿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나간 두 신형은 강하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두 그림자의 형세는 오래 지나지 않아 한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자객이 바흐란의 힘에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읏!”
그가 바흐란의 검에 길게 베인 배를 움켜잡자 뒤에서 여자를 업고 창문으로 나가려던 자가 잠시 몸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날쌔게 몸을 던져 창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방 안에는 연신 피를 쏟아내며 힘겹게 바흐란을 막아내는 자객과 바흐란만이 존재했다.
부상당한 몸. 그것도 혼자서는 절대 바흐란을 이길 수 없는 상황. 그도 그것을 자각했는지 더 이상의 반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바흐란이 그의 목숨을 끝내려 목 깊숙이 검을 찔러 넣는 순간. 창문으로 사라졌던 인영이 갑작스레 나타나며 바흐란을 향해 흰 빛을 쏟아냈다.
화아악--!
이미 공격을 위해 검을 든 바흐란이 급히 제 검의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자객은 이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바흐란의 앞에 앉아 피를 흘리던 자객 역시 갑작스레 나타난 동료의 등장에 그의 검을 혼신을 다해 튕겨내며 시선을 잡아두었다.
“젠장…!”
바흐란이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던 자객의 갑작스러운 저항으로 제 손에서 떨어지려는 검을 날쌔게 잡아채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백색의 빛이 이미 바흐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펑…! 스르륵-----
다가올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감은 바흐란은 공격당하는 부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의구심에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눈앞, 어느새 풀려 버린 검은 머리가 풍성하게 흐드러진 한 여성의 등이 보였다.
선이 얇고 부드러운. 하지만 더없이 강하고 곧은 그녀의 등이…!
“야 너 위험해! 비켜!”
바흐란의 다급한 말이 채 닿기도 전, 붉은 르베나의 입이 먼저 열렸다.
“세츠…….”
바흐란의 앞을 막아선 그녀, 르베나의 중얼거림에 상대방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재빠르고 작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마법을 구현해 냈다.
“유르.”
그가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휘광이 빛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느새 큰 구를 그리며 르베나를 향해 광폭하게 쏟아졌다. 점점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구체의 빛을 보는 바흐한의 녹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젠장… 저건 못 막아!”
점점 다가오는 휘광을 본 바흐란이 르베나의 망토를 쥐었다. 그러고는 핏줄이 파랗게 돋아날 정도로 손에 힘을 주며 그대로 반대쪽으로 함께 몸을 던지려는 순간.
르베나의 손에서 폭발할 듯한 검붉은 마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
놀란 바흐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창문에 서 있는 이를 향해 르베나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뻗어나감과 동시에 그녀의 마력이 거세게 쏟아져 나갔다.
화아아악…!
강풍이 불어 닥친다면 이와 같을까? 방 안의 모든 것을 어지르는 듯한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엄청난 세기로 창을 향해 폭사했다.
콰광. 쾅!
순식간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자객이 서 있던 자리를 르베나의 마력이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부서진 벽에서 흩날리는 뿌연 연기가 방을 가득 채워나갔다. 르베나의 마력이 지나간 방의 한 쪽 면은 모두 뜯어져 나간 듯 허공만이 제 초라한 모습이 드러내었고 엄청난 바람이 공백을 채우 듯 방 안을 휘감았다.
“도망쳤나?”
작게 읊조린 르베나의 음성에 반응 하 듯 그녀의 검붉은 마력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벽을 뚫은 모습 그대로 허공을 향해 곧게 뻗어나갔다.
“저, 저게 뭐야……?”
르베나의 마력을 보고 놀란 바흐란의 눈 역시 경악으로 치켜 떠진 채 하늘을 향했다.
자칸의 어두운 밤 하늘.
파방……! 파바바방……!!
그곳에 아벨디온 모든 기사들의 옷에 있던 표식, 검붉은 회오리가 사납게 주위의 어둠을 잡아먹으며 떠올랐다. 높은 밤하늘을 점령하듯 높이 오른 검붉은 색의 빛은 절대적이었고 경이로웠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