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1)
“아벨디온?”
“디오니스에서 온 기사들이라던데?”
“기사단장이 여자라고?”
“뭐? 그딴 기사단을 보냈단 말이야?”
한 남성이 웅성웅성 시끄러운 기사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바흐란이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다 모였어?”
“네. 왕실직속 기사단 중 실력이 괜찮은 놈들만 오 십명 정도 데려왔습니다.”
그의 말에 바흐란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들의 웅성거림에서 시선을 뗀 남성이 바흐란을 보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이 여자라는 게… 사실입니까?”
움찔.
왜인지 그의 물음에 잠시 몸을 떤 바흐란이 갑자기 작게 헛기침을 해댔다. 그런 바흐란을 조금 이상하게 바라보던 남성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웅성대던 기사들의 소리가 더 소란스러워졌다. 남성이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멀리서 열 명 남짓 되는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남성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져 그들을 향했다.
‘아벨디온 기사단인가?’
남성의 눈에 흰색의 제복에 검붉은 망토를 걸친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누어져 걸어왔는데 한쪽은 말끔하고 단정하게 생긴 남성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네명의 기사가 뒤따랐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모두 단정하고 무표정한 얼굴 일색이었다.
반면 다른 한쪽은 검은 머리에 금안을 번뜩이는 훤칠한 미남이 휘적휘적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앞장을 서고 있었고 그 뒤를 따르는 네 명의 기사들 역시 그와 비슷하게 무엇인가 자유분방한 느낌이 났다.
두 무리의 공통점이라고는 모두 옷 어딘가에 검붉은 회오리가 그려진 동그란 표식을 달고 있다는 것뿐.
‘눈여겨 볼 실력자는 두 명… 정도인가?’
바흐란의 옆에 선 남성이 아벨디온을 바라보며 생각함과 동시에 그가 생각했던 그 두 명의 사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벨디온의 부단장 다한입니다.”
“부단장 아를입니다.”
그들의 인사에 남성이 곧 아주 옅은 미소가 어린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자칸 왕실직속 기사단을 총 지휘하는 아쿤이라 하오. 우리 자칸을 위해 먼 길을 와주신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소.”
건네온 남자의 호탕함에 아를의 금안이 그를 담아내었다.
자칸의 남성답게 검게 탄 피부와 어울리는 우락부락한 얼굴과 몸. 눈 한쪽은 언젠가 칼날에 베인 듯한 흉터가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
‘흠… 자칸에 의외로 실력자가 많은데?’
아를이 아쿤을 보며 흥미를 가지다가는 문득 그 옆에서 아를과 다한을 못마땅하게 보며 서 있는 바흐란을 보며 썩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괜시리 움찔한 바흐란이 어제의 일이 기억났는지 민망한 얼굴로 딴 소리를 해댔다.
“아니, 뭐야? 저번에 본 이 인원이 전부야? 진짜 기사단이 꼴랑 열 명이라고?”
바흐란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다한이 나서 답했다.
“저희 기사단은 일반 검술이 아닌 검기를 다루는 기사단입니다. 처음부터 많은 인원을 받으면 훈련에 차질이 있을 거라는 단장님의 판단 하에 이정도 인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다한의 대답에 바흐란이 다소 비아냥거리 듯 말했다.
“그깟 계집애 판단이 뭐가 중요하다고.”
순간 큰 음성으로 내뱉어진 그의 말에 자칸의 병사들이 동조하듯 하하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자칸에서는 여성이 기사 단장인 것도 꿈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일인데 여성의 의견에 따라 기사단의 인원마저 대폭 줄이다니. 그들로써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자칸의 기사가 아니라 르베나를 따르는 아벨디온의 기사들이라는 것이다. 순간 자칸의 기사들이 바흐란의 말에 동조하여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심상치 않은 기세가 팽팽하게 공기를 감쌌다.
오싹……!
순식간에 아벨디온 기사들 모두가 싸늘한 살기를 풍기며 자칸의 기사들을 노려본 것이다. 방금 전까지 편안해 보이던 그들에게서 나온 순식간의 예기가 날카로웠다. 그리고 이에 바흐란과 아쿤이 놀란 얼굴로 아벨디온 기사단원들을 바라 보았다.
그들의 검에서 스멀스멀 요동치는 마력과 신력의 자락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바뀐 아벨디온의 분위기에 아쿤과 바흐란의 몸이 서서히 긴장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만.”
고저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리고 그 목소리와 동시에 보여진 광경에 기사 아쿤은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 까지 자칸의 기사들을 죽일 듯 날뛰던 이벨디온의 마력과 신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흐란 역시 이를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물론 방금 전 그들의 마력이나 신력은 크게 위협을 느낄만한 양이 결코 아니었어.
하지만 상관의 말 한마디에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야.
오히려… 두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여성임에도 상관에 대한 그들의 존중과 충성. 그 절대적임에 바흐란은 적지 않게 놀라며 아벨디온에 대한 이전의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상관, 르베나 왕녀… 응?’
아벨디온에 대한 생각 중 돌연 르베나를 떠올림과 동시에 바흐란이 제 가슴께를 주먹으로 쿵쿵 때리기 시작했다. 뭔가 묵직한 바위가 얹힌듯한 느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바흐란의 모습을 몇몇의 기사들 역시 슬쩍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아쿤 역시 평소와 다른 그들의 왕자를 한번 보았다가는 곧 고개를 돌려 놀람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르베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튼 아벨디온 기사단의 사이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헉!”
“대박……!”
“진짜 예쁘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기 저기서 조금씩 들려오는 자칸 기사들의 목소리가 소리를 키웠다. 그 소리에 르베나를 슬쩍 바라본 바흐란은 다시금 답답해져 오는 가슴에 심각하게 제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심장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하아. 나 아직 젊은데 괜찮은거야?'
그렇게 바흐란이 본인의 건강을 심각하게 염려하는 그때, 아벨디온 기사들은 심기가 다시 사나워졌다.
“저것들이 감히 누구를 보고!”
“눈 안 깔아?”
룬과 또 다른 기사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걸음을 옮기던 르베나가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벨디온에게 주의를 주었다.
“룬, 그만.”
그러자 방금까지 살벌하게 자칸의 기사들을 노려보던 룬과 기사들이 바로 차렷 자세를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를이 룬에게 작게 잘했어,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르베나는 이를 애써 모른 척했다.
이윽고 르베나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바흐란은 뒷걸음을 치며 아예 뒤로 돌아서 버렸고 아쿤은 굉장히 흥미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인사를 청했다.
“그대를 존경하는 기사들의 마음이 대단하군요. 처음 뵙겠소. 자칸의 총기사단장 아쿤이요.”
청해진 그의 손을 한번 보고는 르베나가 손을 내밀어 아쿤의 손을 맞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 드 디오니스입니다.”
흠칫.
순간 르베나의 손을 맞잡은 아쿤의 몸이 약간의 충격으로 떨려왔다. 아벨디온 기사단의 모습을 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잠시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아쿤은 르베나가 얼마나 실력 있는 검사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여성들의 부드러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르베나의 손에는 수많은 물집을 지나 이미 딱딱하게 박혀진 굳은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굳은 흔적들로 아쿤은눈앞의 여성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통해 이 자리에 섰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여성으로써가 아니다. 기사로써… 이 사람은 진짜다…!’
르베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금방 호기심을 넘어선 호감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은 편안하고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작전회의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럼 자칸의 기사들은 모두 도시 외곽의 부족들에게 보낸다는 말씀이십니까?”
다한의 질문에 아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지도를 가르켰다.
“말했다시피 그놈들이 주로 납치해 가는 건 도심의 여성들이 아니라 도시 외곽에 따로 무리지어 사는 부족의 여성들이오. 그게 수도에서 늦게 파악한 이유지. 그래서 도시 외곽은 온통 사막지형이기 때문에 자칸인이 가는 게 더 좋을 거라 판단 했소. 또 도시 외곽의 경계에는 내가 동행할 예정이오.”
그의 말에 아를이 되물었다.
“그럼에도 저희 아벨디온과 일부 자칸의 기사들이 굳이 도시를 정찰해야 한다는 것은……?”
“최근 도시에서도 납치가 발생했다는 말이군.”
아를의 말을 받는 르베나의 말에 아쿤과 바흐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바흐란이 자칸의 왕자답게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유파시드에게 도움을 청하기 한 달 전, 그들의 납치가 돌연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자칸을 떠났다 생각했지. 하지만 어제 그들의 활동이 다시 시작됐어.
아침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외곽 부족에서 두 명. 도시에서 네 명이야.
그리고 그 네 명 모두가… 고위귀족가의 딸이지. 아마도 그들은 곧 지원될 너희에 대한 정보를 듣고 방어를 준비하며 도시에 침투할 계획을 세운 것 같아.”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자칸의 병력만으로 잡기가 신출귀몰하던 놈들이었는데 아벨디온이라는 지원병을 앞두고 더 대담해졌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그들의 정체에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두 개의 신형이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아무도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진짜… 제법인데?’
바흐란이 여유롭게 본인을 따라 움직이는 르베나를 스치듯 제 녹안에 담으며 생각했다.
모두의 의견에 따라 자칸의 기사들과 아쿤은 도시 외곽 순찰을 맡기로 했다.
이어 다한과 아를은 각각 도시의 동쪽과 서쪽을, 바흐란과 르베나는 북쪽을 맡기로 했다.
도시의 남쪽은 성문이 있는 쪽으로 주거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외였다.
물론 바흐란과 르베나가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되자 아를이 이를 심하게 반대했으나 그 자체가 아벨디온의 부단장으로써 네 명의 기사와 함께 움직여야만 해 딱히 방법도 없었다.
스윽…!
어둠 속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르베나의 전신을 눈에 담은 바흐란이 제법 거센 아를의 반응을 떠올리다가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나 몸놀림이 좋은데 왜 그렇게 반대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까 르베나를 보고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던 자신의 갑갑함은 회의를 시작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에 바흐란은 스트레스로 본인의 몸에 잠시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다시 르베나를 보아도 심장은 아무렇지 않았다. 더나아가 뭔가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여기서 멈춰!”
생각에 잠겨있던 바흐란의 신형이 갑작스레 멈춰 서자 르베나 역시 조금의 동요도 없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 곧 르베나의 눈앞에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저택들이 줄지어 선 구역이 들어왔다.
저마다 큰 대문에는 수십의 경비들이 보초를 서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집 안의 정원이며 뜰에도 수많은 횃불이 쉼 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개인 경비?”
르베나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바흐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어제 고위귀족가의 딸들이 자그마치 네 명이나 납치됐어. 저들로써는 당연한 거지.
우리의 경우에는 그들을 생포해야 하니까 이렇게 모습을 숨겼지만.”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앞의 새카만 어둠을 가만히 녹여냈다. 조금씩 불어오는 늦은 밤의 서걱한 모래바람이 입안을 까슬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