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61화 (61/276)

6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0)

“오랜만이군요, 루안 공녀.”

눈앞에 자리한 공녀를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보고는 말갛게 웃어 보인 루안 공녀가 예쁜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디오니스에 다녀오신다고… 몇 번이나 왔는데도 뵙지를 못하여서.

실례인줄 알지만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폐하.”

공기 중에 닿으면 곧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에 얇디얇은 손가락은 무언인가 꽤나 긴장한 듯 찻잔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드바하가 들고 있던 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실례인줄 아시면서 왜 자꾸 오시는지.”

조금은 싸늘한 루드바하의 말에 별안간 화들짝 놀란 루안 공녀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그 탓에 들고 있던 찻잔이 엎어지며 뜨거운 찻물이 루안 공녀의 치맛자락을 적셨다.

“앗…….”

놀란 공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루드바하가 차분히 곁에 시립한 시녀들에게 눈짓하니 일사분란하게 다가온 시녀들이 공녀의 치맛자락을 마른 천으로 급히 닦아주었다.

다행히 치마가 두꺼워 데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자리해야 함이 마땅하나 놀란 루안 공녀는 예절도 잊은 듯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방의 구석에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유안을 슬쩍 쳐다보고는 얼른 눈을 돌려 창백한 제 두 손을 바라보았다.

루안 공녀가 차가워진 손을 다시 한번 꼬옥 움켜잡으며 눈앞의 루드바하에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폐,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싫어하실 줄은…! 흑…….”

당황해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루안 공녀를 아주 찰나의 순간 시린 눈으로 바라본 루드바하가 다시 미소를 베어 물며 말했다.

“공녀를 염려하여 그런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곧 혼인을 해야 할 나이인 공녀께서 자꾸만 궁에 들면 좋지 못한 소문에 휩싸일까 걱정이 되어서요.”

루드바하의 말에 루안 공녀가 말간 보랏빛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 스물 네살의 유파시드, 루드바하.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외모. 큰 기에 단단한 몸. 옅은 금빛이 언뜻언뜻 감도는

그의 결 좋은 은발. 그것들은 그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다.

짙은 호수의 빛을 담은 눈은 언뜻 보면 무섭도록 시렸지만 언제나 머금는 그의 옅은 미소덕분에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같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세츠들의 왕이며 젠 제국의 황제인 그는 당연코 모든 제국 여성들이 바라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젠 제국에서 가장 큰 가문의 장녀인 루안 공녀 역시 같은 뜻을 품고 그를 찾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점점 직접적인 거절의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주친 그의 벽안이 왜인지 평소보다 더 차가운 것 같아 루안 공녀가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예… 폐하의 뜻을… 아버님께 꼭… 전하겠습니다.”

겨우내 말을 잇는 루안 공녀를 보며 루드바하가 곧바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길.”

명백한 퇴실 요청에 당황한 루안 공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그의 업무 보는 방을 나섰다.

탁.

“아가씨, 괜찮으세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유파시드의 방에서 나온 루안 공녀를 본 시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찻물에 젖은 루안 공녀의 치마와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닌 듯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안 공녀의 감정은 시녀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씨팔… 못 해 먹겠네.”

작게 읊조린 루안 공녀의 말에 시녀가 놀라 되물었다.

“…네?”

되물을 시녀의 당황스러움을 가볍게 무시한 루안 공녀가 닫힌 방문을 한번 바라보고는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꾸나. 아버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루드바하의 앞에서와는 다르게 당당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내려다보며 걷는 루안 공녀의 발걸음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저번에 쓰던 욕이 더 찰 졌는데 아쉽네요.”

날씨 이야기를 하듯 서류를 바라보며 여상히 말을 건네는 유안의 모습에 루드바하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방문에 가 있던 제 시린 눈길을 거두었다.

“루안 공녀라…….”

작게 읊조리는 그의 입과는 다르게 그의 눈길은 언제나와 같이 하나의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었다. 검붉은 눈이 또렷하고 풍성한 검은머리가 아름다운… 유일한 실루엣을.

* * *

다한의 검을 부러뜨릴 때처럼 손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바흐란의 검이 아를에게 향했다.

아를 역시 바흐란의 필살기임을 예상하며 더 강하게 검을 쥐어 잡았다.

그렇게 바흐란의 검이 아를의 검에 닿는 순간 바흐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포식자의 미소가 번졌다.

“엇……?”

하지만 그도 잠시.

챙…!

더없이 맑고 깨끗한 소리와 함께 바흐란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저의 필살기를 썼음에도 아를의 검은 여전히 무사했고 그의 검 또한 원하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바흐란이 경악어린 얼굴이 어느 한 곳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 르베나가 있었다.

곧 바흐란의 눈이 르베나가 뻗은 은빛의 신형에 가로막혀 아를의 검에 채 닿지도 못한 제 검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느끼지도 못할 만큼의 속도로 다가와서… 내 검을… 막았다고?’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바흐란이 놀라 뻐끔거리자 르베나가 가볍게 팔을 치켜 올려 바흐란의 검을 쳐냈다. 멍하니 있다가는 그 힘에 밀려난 바흐란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르베나가 본인을 보호한 것 같은 모양새에 아를이 발끈하려 하자 르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부하들을 더 이상 기만하지 마십시오. 한 번은 실수로 용납하지만 두 번은 아닙니다.”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무슨 소리냐는 듯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르베나의 곧은 시선은 바흐란만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바흐란이 정신을 차린 듯 눈앞의 여자를 향해 분노해 외쳤다.

“감히 계집애 따위가 남자들의 승부에 끼어들어? 게다가 뭐? 기만? 너희 찌꺼기들이 실력 없는 게 내 기만이라고? 이게 말이면 단 줄 알아?”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치는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저벅저벅 그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분명 건장한 체격의 바흐란보다는 작은 키였다. 하지만 평균적인 여성의 신장보다 조금 더 큰 르베나는 그 이상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녀가 제게 다가올수록 르베나의 모습이 처음으로 바흐란에게 제대로 박혀왔다.

높게 묶은 긴 검은 머리는 르베나의 걸음마다 찰랑이며 옆으로 움직였다. 무감각해 보이는 붉은 눈은 한번 마주치면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면서도 주변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그 밑에 자리 잡은 탐스러운 입술.

‘저, 저렇게 생겼었나?’

점점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르베나를 보는 바흐란의 심장이 순간 거세게 요동쳤다.

흠칫.

어느새 르베나의 붉은 눈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 무슨 짓……!”

말을 더듬던 바흐란이 순간 놀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르베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마력이 바흐란의 검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바흐란의 검이 마치 진동하듯 우웅—소리를 내며 잘게 흔들렸다.

이에 놀라 눈을 치켜 뜬 바흐란을 보며 르베나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나 마법을 이용한 검술대련은 반칙이고 기만입니다.”

르베나의 무심하지만 짤막한 말에 뒤에 있던 다한과 아를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마법이라고?”

이어진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제 시선을 바흐란의 눈에 고정하고는 이야기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아벨디온은 마력과 신력 그리고 검술을 함께 사용하는 기사단입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 기사단원 어느 누구도. 베이라와 세츠가 아닌 상대에게는 검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 든 기사로써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바흐란이 무어라 변명하려 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한번만 더 이딴 식으로 저희 기사들을 농락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아벨디온은 자칸을 도우러 먼 길을 온 기사단이란 것을 기억해주시지요.”

그녀의 말에 바흐란이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또다시 르베나가 휙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러고는 다한과 아를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저런 자칸의 찌꺼기한테 졌다고 자존심 상해하지 마라. 사실상 이건 진 게 아니라…

반칙패니까.”

아한과 다한에게 툭 말을 던진 르베나는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연무장을 나서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여기서의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미련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보던 바흐란이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 찌꺼기? 감히 기사주제에 나한테 찌꺼기라고?

야! 거기 안 서? 거기 서! 거기 서라고!”

흥분한 바흐란이 르베나를 향해 가려하자 아를이 그 앞을 막으며 씨익 웃어보였다.

“마법을 쓰셨어? 그게 자칸 스타일인가보지? 풋.”

그리고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는 바흐란을 한번 보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롱소드를 제 어깨에 대충 얹어 메고는 르베나를 따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바흐란이 붉게 물든 얼굴로 뭐라고 하려하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이라… 흠…….”

더 이상의 말 대신 바흐란을 위아래로 조용히 훑고는 점잖게 르베나와 아를의 뒤를 쫓는 다한의 모습이 바흐란의 녹안에 선명하게 박혀왔다. 그리고 분노와 수치심에 벌벌 떠는 바흐란만이 멀어지는 디오니스의 기사 세 명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씨익. 씨익.

연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바흐란의 시야에서 이내 붉은 실루엣이 모두 사라지자 그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아 젠장… 어떻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아, 그리고…!”

방금 전 까지 제 코 앞에서 빛나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린 바흐란이 제 가슴을 쿵쿵 세게 치며 말했다.

“가슴은 또 왜 이렇게 답답한거야!”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눈을 휘휘 저으며 제 가슴을 탕탕 내려치는 바흐란의 아우성은 늦은 오후까지도 계속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