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60화 (60/276)

6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9)

“아벨디온은.”

굵지 않은 소리임에도 뱃 속 깊은 곳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외 알 안경을 슬쩍 고쳐 쓴 유안이 애써 무심히 답했다.

“자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유안의 대답에 그, 루드바하의 짙은 벽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마치 무엇인가를 걱정하듯 의자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그런 루드바하를 보던 유안이 답답하다는 듯 제 외 알 안경을 벗어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시면서 도대체 왜! 아벨디온에게 그런 일을 맡기신 겁니까.”

미간이 잔뜩 좁혀진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 그게 그녀와 어울리니까.”

들려온 그의 대답에 못 말린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어 쉰 유안이 루드바하에게 바짝 다가갔다. 온통 흰색의 옷을 입은 그는 그 때문인지 오늘 유난히도 성스러워보였다.

군데군데 금실로 수놓아진 월계수와 그 사이에 엑스자로 그려진 검은 누가 보아도 그가 유파시드임을 알게 하였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사실은 바늘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남자라는 것을 유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에 유안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한 그였지만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유안의 질문이 의외였던지 잠시 놀란 듯 그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생각에 잠겼다가는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말에 지그시 그를 노려보던 유안이 호기심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루안 공녀님께서 오늘 방문하신다고 했는데 깜빡 했군요.”

순간 유안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누가 보아도 찬미가 나올 만큼 아름답고 완벽했지만 짙은 벽안에서 나오는 시린 빛 때문인지 한기가 느껴 질만큼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분명히 전하라고 했을 텐데. 다시는 루안 공녀와 개인적으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평소의 루드바하를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만큼 서늘한 목소리임에도 유안은 익숙하다는 듯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게 통해야 말이죠.”

그리고 그때, 또각거리는 선명한 여성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방에 가까워질수록 루드바하의 얼굴은 더 시리게 변해갈 뿐이었지만.

달칵.

이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옅은 금발에 옅은 보랏빛 눈동자. 한 눈에 보기에도 가냘프고 연약한 꽃송이 같은 여자. 그녀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루드… 바하… 님.”

여성의 가냘픈 목소리에 그,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미소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바라본 여자의 얼굴에도 수줍은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 * *

“윽…….”

다가오는 검을 빠르게 막은 다한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자신의 검이 막히자 빠르게 뒤로 물러난 바흐란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숨기지 못한 흥분이 새어나왔다.

“찌꺼기치고 제법인데.”

그의 도발에 순간 다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제 검을 꽈악 쥐었다. 검을 잡은 그의 손등에서 푸른 핏줄이 곧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제 겨우 십 분. 그 십 분의 대치동안 알게 된 사실에 다한은 지금 꽤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엄청난 실력이다…! 바흐란… 자칸의 왕자…!’

건방지게 입만 놀려대던,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던 자칸의 왕자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큼 사람을 보면 실력이 가늠되는 법인데도 다한이 전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무방비했던 바흐란은 이제 보니 디오니스의 웬만한 기사단장 정도 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다한을 바라보는 바흐란의 녹안 역시 웃는 얼굴과는 다른 의미로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꽤 하는데 저 왕자.”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아를이 제 금안을 빛내며 옆에 있는 르베나에게 말했다. 이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 역시 둘의 공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꽤나 막상막하의 승부였다.

언제나 정확하고 정직하지만 정교한 검술을 사용하는 다한은 기본이 훌륭한 만큼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그런 다한에게도 바흐란은 꽤 어려운 적이었다.

바흐란의 공격은 상당히 저돌적이고 변칙적이었으며 강한 힘까지 동반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교한 다한의 기술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로 다한 역시 바흐란 왕자에겐 힘든 상대겠지만.

그때,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르베나의 붉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한을 향해 다가오던 바흐란이 손을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한이 그 순간의 공격을 자신의 검으로 막아낸 순간.

째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다한의 검이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에 놀란 것은 다한뿐만이 아닌지 여유롭게 구경하던 아를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아벨디온 기사단의 검은 꽤 고강도의 재료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단 한 번의 일격에 저렇게 쉽게 부러져 버릴만한 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부러진 다한의 검 사이로 바흐란의 휘어진 검이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휘익…!

재빨리 고개를 뒤로 빼며 다한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에 씨익 웃은 바흐란이 검을 마저 휘두르며 역시 뒤로 물러났다.

뚝…!

순간 다한의 뺨 언저리에서 검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부서져 버린 검과 언제인지 모르게 베인 뺨을 만지던 다한의 눈이 당황과 짙은 패배감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바흐란은 마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러운 자칸과 같은 모습으로 이 죽였다.

“역시 찌꺼기는 찌꺼기네. 부단장이라기에 조금 하나 싶었더니…….”

한껏 비아냥대며 본인의 칼날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바흐란의 모습에 다한의 손이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단연코 그는 최근 2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다시는 르베나를 혼자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는 기사로써 지켜야 할 대상에게서 지켜지지 않기 위해. 그는 끝없이 노력했고 땀 흘렸다. 그리고 이제 순수한 검술로는 아를을 제외하고 디오니스 내에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검기 또한 훈련했다. 검기를 배우면 이제는 베이라나 세츠가 적이 된다 해도 르베나의 뒤에 숨지 않아도 되니까.

“검기로 승부할 때는 언제나 르베나 단장님께 패배하시지만 다한 경의 실력이 결코 뒤처지지는 않아! 순수한 검술로는 르베나 단장님도 지시잖아, 아니야?

이런 다른 기사들의 말을 다한 본인만큼도 인정했다. 그는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 다시는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을만큼.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닌 순수한 검술로 타국의 한량 같은 왕자에게 지다니. 그것도 심지어 자신의 주군인 르베나 앞에서……!

짙은 패배감에 다한의 몸이 떨렸다. 그런 다한의 앞에 큰 그림자가 진 것은 그때였다.

다한이 눈을 들어보니 큰 등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를.”

“알고 있어. 네 패배가 아니라는 것. 승부가 아직 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데… 검이 부러졌잖아. 그러니까 바톤 터치.”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내뱉은 무뚝뚝한 아를의 말에 다한이 가만히 있다가는 피식 웃어 버렸다.

언제나 아웅다웅하는 둘이었지만 다한은 알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패배에 가장 열 받은 사람이 바로 다한과 항상 무승부를 내던 아를이라는 사실을.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다한은 검을 다시 구해오더라도 이 승부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결투는 르베나를 무시한 바흐란에 대한 결투 신청에 의한 것이었다.

“결투 신청으로 이루어진 대련에서는 사망과 무분별한 사고를 막기 위해 둘 중에 한 사람이 죽거나 포기를 외치거나 혹은 검을 떨어뜨리면 패배로 간주한다.”

결투 전 르베나의 말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어 쉰 다한이 아를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를이 마치 용수철처럼 바흐란을 향해 튀어 나갔다.

“와우, 두 번째 찌꺼기인가!”

빠르게 다가오는 아를을 보며 바흐란의 녹안이 다시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 둔 산짐승처럼 번득였다.

눈앞의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자칸에만 사는 사나운 맹수, 자칼의 생존방식이었다.

휙. 차악…!

다한 때보다 훨씬 뜨겁고 빠른 공방전이 벌어졌다.

빠르고 강하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아를의 검에 바흐란은 서서히 페이스가 밀리고 있었다.

‘젠장… 제법인데’

좀 전에 겨룬 다한이란 기사 역시 바흐란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였다. 그는 굉장히 예리하고 정교한 검술을 썼기 때문에 다소 터프한 바흐란과의 대결상대로 꽤 끈질긴 상대였다.

만약 바흐란이 비장의 기술을 쓰지 않았다면 분명 둘 중 체력이 먼저 소진되는 쪽이 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 그놈보다 더했다. 금안을 시리게 빛내며 다가오는 저 검은 머리 놈은 마치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았다. 그것도 먹이사슬 최상층에 군림하는 육식동물. 한번 파고든 공격은 절대 물리지 않는 집요함. 큰 키와 단단한 몸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파워. 그럼에도 놀랄 만큼 빠른 스피드.

자칸에서 제일 검을 잘 쓰는 바흐란마저 놀랄 만큼의 검사. 그게 바로 지금 제 눈앞의 기사, 아를이었다.

휘익…!

“앗… 차!”

묵직하지만 깊게 파고 들어온 예리한 칼날에 바흐란의 머리칼이 조금 잘려나갔다. 얼른 뒤로 물러선 바흐란의 눈에 싸늘한 금안을 빛내는 아를이 보였다. 그 때 문득 제 검을 내려다본 바흐란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는 이내 씨익 웃었다.

“힘드니까 이만 끝내볼까.”

순간 날렵하게 뛰어오른 바흐란이 아를을 향해 제 검을 뻗었다. 그러고는 아를에게 검이 닿기 직전, 손을 오른쪽으로 조금 비틀었다. 가만히 그들의 대결을 보고 있던 르베나의 눈에 다시금 붉은 이채가 서린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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