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8)
자칸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뚜렷한 나라였다.
모든 바깥일은 남성이 도맡아 해야 했고 여성의 주된 일은 가정과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칸의 남성들이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이자 부인인 여성들을 존중했다. 다만, 여성들의 사회적 능력에 관한 것에 굉장히 보수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런 자칸의 왕에게 이렇게 자신의 의사를 뚜렷하게 밝혀오는 여성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그래서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르베나의 눈을 마주한 자칸의 왕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자국의 일을 위해 먼 길을 오신 분께 실례를 했군. 내 아들 녀석의 무분별한 행실 역시 사과하겠소. 아, 디오니스의 공주가 아니라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으로 대하고 싶은데. 물론 괜찮다면 말이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자칸 왕의 말에 깔끔한 르베나의 답변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정돈된 관계와는 다르게 바흐란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 흥분하며 그의 아버지를 불렀다.
“아바마마!”
그의 음성에는 어찌 어린 여자애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냐는 불만이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자칸 왕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르베나는 바흐란의 반응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이야기에 쐐기를 박았다.
“자칸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희 역시 왕자님께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이번에 이어진 르베나의 사과에는 다한과 아를이 동시에 소리쳤다.
“공주님!”
“르베나! 아니, 단장!”
그들의 모습을 보며 돌연 피식 웃은 자칸의 왕이 그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왜인지 그들을 보며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유쾌한 호의가 느껴졌다.
“모래와 바람의 나라, 우리 자칸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 * *
“오! 룬 경 이거 먹어 보십시오!”
“과일이 정말 달긴 하다.”
색색의 열대과일들은 입에 넣자마자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팡팡 터져 나왔다. 디오니스에서는 맛볼 수 없던 향이 센 음식들은 한 달 동안 메마르고 거친 음식만 먹었던 기사단들의 입맛을 풍족하게 만족시켜주었고 이 더위를 잊을 만큼 차갑고 달콤한 음료는 한 달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해 줄 만큼 인상적이었다.
갖은 채소를 튀겨 새콤한 소스에 찍어 먹는 전채요리는 입맛을 돋웠고, 자칸에만 산다는 자칼고기 스테이크에서는 이제껏 맛보지 못한 쫄깃한 육질의 고기가 달큼한 소스를 머금고 연신 입안을 뛰놀았다. 이어서 나온 향이 강한 국수는 조금은 텁텁했던 입안을 개운하게 헹구어 주었고 마지막 달콤한 과일을 시원하게 얼린 디저트와 음료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디오니스와는 다르게 꽤 달달한 과일들이 퍽 마음에 들었던 르베나 역시 주로 과일에 손이 많이 갔다.
스윽.
곧 아를이 제 앞에 있던 과일 접시를 르베나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바흐란이 빈정거리듯 작은 포도알 하나를 제 입에 넣으며 말했다.
“하, 과일이나 갖다 바치는 부단장에, 여자로 온 거 아니라면서 대접받는 기사단장이라니.”
비아냥이 확실한 바흐란의 말에 아를이 조용히 살기를 흩뿌리자 이에 주의를 준 르베나가 바흐란을 가뿐히 무시하며 자칸의 왕에게 하던 말을 이었다.
“최근 자칸에서 여성들이 잇달아 실종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 얘기를 좀 더 해주실 수 있을까요.”
르베나의 말에 아를과 눈싸움을 하던 바흐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입가를 닦은 자칸의 왕 역시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칸은 비록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엄격히 제한하나, 여성들을 학대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소. 예로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자칸인들은 무수한 위험에 노출되어 왔지. 뜨거운 열기와 부족한 물과 식량. 남성들은 이 환경에 조금 더 나은 체력으로 적응하고자 했고, 여성들을 조금이나마 안전한 곳에서 보호하고자 했소.”
“그것이 집 안… 인가요.”
르베나의 말에 자칸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일지 모르는 오래전부터 자칸에서 남성들은 위험으로부터 가족과 집을 지키며 생계를 책임졌고 여성들은 집안일과 육아를 책임져왔소. 우리는 그런 서로의 입장을 자연스럽게 존중하고 이해해왔다고 생각하오.”
자칸의 왕은 그에게는 조금 낯선 르베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나라가 발전하며 비록 사회진출 역시 남자들의 일로 자연스레 한정되어 왔으나, 자칸의 남자들은 여성들을 존중하오. 그들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아이들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지. 자칸인들에게 여성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그렇기에 더욱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라오.”
자칸 왕의 말에 그들이 생각하는 것 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열 명의 눈이 한 군데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약 일 년 전부터 그런 우리 자칸의 여성들이 실종되기 시작했소. 처음에는 그 수가 워낙 미미해서 가출이나 단순사고 정도로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 그 수가 갑자기 늘어나고 있어서…….”
“얼마나… 늘어난 겁니까.”
다한의 물음에 자칸 왕과 바흐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루에 다섯 명… 십일에 오십 명 꼴이오…….”
자칸 왕의 말에 르베나를 비롯한 아벨디온 기사단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루에 다섯 명이라니…! 한 달이면 백 오십명이 아닙니까…!
이는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결코 개인이 아니라…….”
“단체겠지. 그것도 꽤 큰 조직의.”
다한의 말에 바흐란이 이어 말 했다.
“그래서 우린 유파시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어. 우리 왕국에 그 정도 규모의 단체가 개입했다는 거니까. 게다가 젠장…! 우리가 파면 팔수록 정체를 더 감추기만 하니!
그런데 이런 일에 겨우 저런 계집애를 보내다니…….”
바흐란의 말에 다시 아를과 다한이 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바흐란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칸의 왕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내일까지 휴식을 취한 뒤 저희가 갖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칸을 돕겠습니다. 이는 디오니스와 젠의 뜻임을 분명히 전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 본 사건에 대한 자료를 모두 전달해주십시오. 그리고… 왕자님도 말을 놓는 마당에 폐하께서는 아벨디온에 하대를 하셔도 됩니다.”
르베나의 말에 자칸 왕이 민망한 듯 바흐란에게 한 번 눈치를 주었다.
“아들 녀석이 버릇이 없어 미안하네. 그리고 르베나 단장께서 그러라고 하니 말을 편히 하지. 근데…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내일까지만 쉬겠다고? 우리는 그대들이 일주일정도는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에 르베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일주일을 쉬면 자그마치 실종되는 여성의 수가 최소 삼 십명. 도움을 주러 와서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르베나의 말은 여러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자칸의 왕에게는 르베나란 기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흐란에게는 의심으로,
그리고 아벨디온 기사단원들에게는…
새로운 지옥으로의 입성을 반기는 말로 말이다.
* * *
가만히 서 있어도 흘러내리는 땀방울. 불어오는 바람조차 이 더위를 식히지는 못했다.
붉은 흙으로 덮여 있는 땅과 뻥 뚫린 천장, 자칸 왕국의 작은 연무장 안이었다.
가만히 서서 검을 든 채 자세를 잡은 르베나의 위로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결 좋은 머리칼이 흔들림과 동시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라도 쉬라니까, 단장. 내일부터 그놈들 잡으려면 꽤나 힘들 텐데.”
뒤에 단장을 붙이기는 했지만 르베나에게 이런 말투를 쓰는 건 기사단에 오직 한 명뿐.
“아를.”
르베나가 눈을 뜨자 선연한 붉은색이 드러나 그를 향했다. 그 눈을 반갑다는 듯 마주본 아를이 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내 한 달을 왔는데 피곤하지 않아?”
하지만 건네 온 아를의 말에 대한 대답은 전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존대를 하든 말을 놓든 하나만 해라, 아를 경.”
지겹다는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어 쉰 아를이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벨디온 공식 잔소리꾼, 다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그의 말에 피식 웃은 아를이 다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아주 말을 놔야겠네.”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아를의 말에 다한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단장님은 더 이상 네 친구가 아니다, 아를 경.”
그 말에 아를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르베나에 대한 태도를 두고 벌이는 이 공방전에 이제 익숙함을 넘어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르베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공방전이 자칸을 오는 한 달 내내 매일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를과 다한.
둘은 르베나가 언제든 등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우이자 친구였고 또한 기사들이었다.
다한과의 인연은 이미 십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고 아를은 안 기간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런 그들이 르베나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대한다는 것을 알기에 르베나는 그들이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사실 크게 상관없었다.
“기사단의 질서를 위해 호칭만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다한의 의견에 따라 아를이 르베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만 허락했을 뿐인데. 그 뒤로 아를과 다한의 사이는 더 극으로 치닫는 듯했다.
“단장이 돼도 친구는 친구지.”
“본인이 너무 건방지다 생각하지 않나!”
그렇게 언제나처럼 또다시 아를과 다한이 르베나를 두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르베나의 눈이 순간 연무장의 입구를 향했다.
“꼴에 기사라고 나대기는…….”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에 셋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바흐란.
자칸의 왕자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이 르베나에 대한 못마땅함을 가득 품고서.
그리고 역시나 바흐란의 태도가 눈엣가시였던 두 사람은 바흐란이 나타나자마자 그들이 할 일을 신속하게 해치웠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를 신청한다.”
다한과 아를의 검기 각기 바흐란을 향해 뻗어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투신청에 바흐란의 녹색눈이 빛을 머금고 번뜩였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눈앞에 둔 야생 자칸의 눈빛.
포악하고 사나운 어떤 기운이 그 안을 마구 어지럽게 휘젓고 있었던 것이다.
스릉.
허리춤에서 천천히 검을 꺼내든 바흐란이 처음으로 시원스레 웃으며 답했다.
“덤벼. 디오니스의 찌꺼기들.”
연무장의 붉은 모래가 바람결에 거칠게 휘날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