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7)
“우와… 엄청난 모래다…….”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금빛의 모래. 모래에 화려한 반짝임을 더해 주는 뜨거운 태양 빛.
그곳에 자리한 흙으로 만든 수많은 작은 집들. 그것들이 모여 형성한 마을의 끝을 쫓으면 번쩍이는 금으로 칠해진 도시가 보였다. 그렇게 시선이 중앙으로 향할수록 보이는 집들의 크기와 규모는 점점 더 크고 화려해졌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멀리서 보기에도 가장 크고 웅장해 보이는 왕궁은 마치 모든 도시의 무게를 잡아내듯 정중앙에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흙빛 일색인 다른 집들과는 그 크기도, 고급스러움도 비교할 바가 못 되어 누가 보기에도 그곳이 이 나라의 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모래언덕 위. 약간은 고조된 듯한 룬 경의 목소리에 더위에 지쳐 물을 마시던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선 채 이색적인 나라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그들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쉬지 않고 약 한 달을 달려와야 하는 곳. 게다가 사계절이 존재하는 디오니스와는 달리 사시사철 들끓는 태양이 작열하는 곳, 자칸. 그들은 이제 막 그곳에 도착했다.
룬의 옆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기사단 막내 랄프가 신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자칸을 모래와 바람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군요! 한 달 동안 진짜 힘들긴 했지만 제 평생 자칸을 와 볼 줄이야… 게다가 유파시드의 가호 덕분인지 정말 아픈 사람 하나 없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랄프의 발랄한 음성이 들리자 흠칫한 룬이 당황할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랄프의 배를 힘껏 후려쳤다.
“욱…….”
갑작스럽게 날아온 묵직한 한 방에 랄프가 제 배를 부여잡고는 숨도 채 내어 쉬지 못한 채 고꾸라졌다. 랄프의 입이 더 이상 열리지 않음을 확인한 룬이 곧바로 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핫… 하핫… 저,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이제 하루 이틀만 더 가면 도착이니 말입니다. 하하!”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룬과 영문도 모른 채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끅끅거리며 엎어져 있는 랄프. 그리고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본 르베나가 곧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휘적휘적 걸어서 사라졌다. 룬과 랄프의 사이가 퍽 좋다고 생각하며 잠시 그늘을 향해 쉬러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룬이 랄프를 보며 나무랐다.
“야 이 멍청아! 유파시드의 축복 얘기는 금기라고 했어, 안 했어! 그 얘기만 하면 바로 아를 경이…….”
“어이 거기 둘. 물 좀 채워라.”
룬이 채 얘기를 끝내기도 전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에 룬과 랄프의 목이 저절로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목이 돌아가는 모양새가 마치 뻑뻑한 인형의 목을 누군가 강제로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의 묵직하고 예리한 검을 닦으며 비스듬히 룬과 랄프를 노려보는 그, 아를이 있었다.
“무, 물이라면… 어제도 채웠는데…….”
자칸은 뜨거운 태양 때문에 대부분의 지질이 모래였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모래를 아주 깊숙이, 아주 아주 깊숙이 파면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인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성인 남성 두 명이 정말 쉬지 않고 반나절 정도를 꼬박 팔 정도의 깊이의 물은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 싫다는 건가.”
낮게 깔린 아를의 목소리가 싸했다. 하지만 검은 머리칼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금안이 그보다 몇백 배는 더 서늘해 보여 룬과 랄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삽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허둥지둥 삽을 쥐고는 구덩이를 팔 자리로 옮기던 룬이 랄프의 허벅지를 한 대 더 차는 모습이 아를의 금안에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유파시드의 축복이라’
그날을 떠올리는 아를의 금안이 불쾌하게 일렁거렸다.
한 달 전, 아벨디온의 창단식. 르베나의 창단 연설이 모두 끝나고 난 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전의 유파시드들과는 달리 이번 유파시드는 거액의 기부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축복을 거절한다며? 오로지 본인이 내킬 때에만 축복을 내리는 걸로 유명하지 않아?”
유파시드는 모든 세츠들의 왕.
그의 신력으로 축복을 받게 되면 가벼운 병은 모두 낫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는 꽤 오랜 시간 대부분의 병과 악한 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전, 아벨디온의 창단식에 참석한 그 유파시드가 아벨디온의 모든 기사단원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겠다 선언한 것이다.
그의 선언에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 새도 없이 그의 손에서는 투명할 정도의 은색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작게,
“루드.”
라는 말이 새어 나오자 빛, 신력은 빠르게 아벨디온 기사단원들 모두를 향해 날아갔다. 그 신력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기사단원 한 명, 한 명을 감싼 채로 빙빙 돌다가는 한순간에 그들의 몸속으로 쏘옥 들어가는 모습을 연출해 냈다.
“맙소사… 저게 유파시드의 신력…….”
“유파시드께서 아벨디온을 지지한다는 것이 사실이었군요!”
“한평생 받아보기 힘든 축복을 받다니 너무 부러워요……!”
모든 디오니스의 귀족들과 기사들의 부러운 시선이 아벨디온을 향했다. 그리고 그때, 루드바하가 단상에 서서 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르베나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제 머리 위에 진 그림자에 르베나의 시선이 루드바하를 향했다.
“축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루드바하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려던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거절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 그의 눈이 제법 간절해 보인 탓이었다. 그리고 순간 예상치 못한 그의 입술이 르베나의 이마에 천천히 다가왔다.
“…루드.”
작게 속삭이며 그의 입술을 르베나의 이마에 대자 루드바하의 입속에서 새어 나온 빛이 그녀의 몸을 여러 번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빛은 기사들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밝았고 더 컸다. 그리고 유독 르베나의 몸 곳곳을 살피듯 여러 번 돌고서는 그대로 그녀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순간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르베나조차 제법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루드바하가 모든 여성들을 홀려버릴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에게는 더 깊은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만.”
그의 미소가 향한 르베나의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그때를 회상하던 아를이 제 옆에 있던 나무 목검을 댕강 부러트려 버렸다. 아직 실력이 부족한 랄프를 위한 훈련용 검이었지만 꽤 묵직하고 두꺼운 목검. 그 목검이 아를의 손 아귀힘에 썩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부러져버린 순간. 마치 이것이 신호인 것처럼 잠시 농땡이를 부리던 룬과 랄프의 손은 더없이 빨라졌다.
그리고 제 손에서 가루가 되어버린 목검을 본 아를의 금안에 씁쓸한 감정의 잔재들이 가루처럼 흩어졌다.
* * *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소. 어서 오시오.”
이제 갓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자칸의 왕은 이전 삶의 르베나 역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자칸의 사람답게 검게 탄 피부와 탄탄한 몸은 그를 같은 나이의 남성들보다 더 젊고 건강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자칸의 왕이 기사단을 보자마자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큼지막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해왔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잠시 놀라 망설이던 이, 다한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아벨디온 기사단의 부단장입니다. 저희 기사단장은 이 분이십니다.”
곧 다한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자칸 왕의 눈에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선명한 붉은색 눈을 가진 미모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르베나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 드 디오니스입니다.”
그녀의 소개에 잠시 놀란 듯 르베나를 한참 바라보던 자칸의 왕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이것이… 우리 자칸에 대한 유파시드의 대답이로군.”
그의 뜻 모를 소리에 다한과 아를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웅성웅성하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꽤 생기 있는 목소리가 의문에 어린 그들의 사이를 파고 들었다.
“아바마마, 유파시드가 보낸 기사단이 왔다면서요? 어디에…!”
들어오던 이의 눈이 자칸 왕의 앞에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그리고 잠시 멈칫하다가는 말했다.
“아바마마… 혹시…….”
그의 말에 자칸의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바흐란. 이분이 유파시드께서 보낸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이라고 하는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흐란이라 불린 이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맨날 실실 웃어 제끼는 그 계집애 같은 낯짝이 맘에 안 들었는데! 감히 자칸의 일에… 이런 어린 여자애를 보내!”
그의 말에 흠칫 놀란 아벨디온 기사단원들의 몸에 오한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기사들의 눈이 슬금슬금 누군가를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기사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일순간에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죠.”
“다시 한번 말해 봐.”
아벨디온의 두 부단장. 다한과 아를의 사나운 눈이 그, 바흐란을 향한 순간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한눈에 보기에도 큰 키와 탄탄한 구릿빛 몸은 수많은 여성들의 눈길을 붙잡아 둘만큼 매혹적이었다. 선명하고 짙은 그의 녹안은 얼핏 보면 그의 몸만큼이나 거친 야생의 포악함으로 빛났으나 또 다르게 보면 어린아이처럼 눈처럼 깨끗하고 맑았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아마도 수많은 여성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으리라.
자칸의 왕자, 바흐란. 이전 삶에서 연합군과의 대치 당시 그녀를 몰아세우던 그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때는 전쟁을 위해서였는지 나름 옷을 제대로 갖춰 입었던 것 같은데……,’
르베나의 붉은 눈이 저도 모르게 그를 위 아래로 훑었다.
상의에는 왜 걸쳤는지 그 존재 의미를 되묻게 할 잠그지도 않은 얇은 조끼가 하나 걸쳐져 있었고 바지는 꼭 항아리처럼 생긴 것을 입고 있었다.
‘자칸의 문화가 디오니스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왕자의 옷차림이 저렇게 자유분방하다니…….’
르베나가 그렇게 바흐란의 패션을 검토(?)할 동안 바흐란은 핏대를 세우며 다한과 아를을 상대하고 있었다.
“뭐? 다시 말해 봐? 이것들이 어디다대고!”
자신들의 단장을 모욕했다며 결투를 신청하는 다한과 다짜고짜 짙은 살기를 뿌려대며 썩소를 날려대는 아를을 보며 마구 흥분해 떠들어 대는 바흐란의 모습이 사뭇 연합군과의 대치 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잠시 동안 그들 사이의 대화가 안 좋은 기류로 흘러가는 것 같자 르베나가 서둘러 대화의 흐름을 끊어 내며 자칸의 왕에게 다가섰다.
“자칸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인 제가 이끄는 아벨디온 기사단에 실망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이해합니다.”
르베나의 목소리는 이 순간조차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저는 자칸에 여성으로써의 평가를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엄연히 젠, 유파시드의 부탁에 따라 디오니스를 대표해 온 기사단장입니다. 그러니 자칸에서도 그에 맞는 예의와 대우를 부탁드립니다.”
내뱉는 한마디마다 어떠한 감정의 찌꺼기도 느껴지지 않는 르베나의 담담한 말투. 하지만 르베나의 붉은 눈만은 그 말투와는 다른 선연한 의지를 가지고 빛나고 있었다. 이에 자칸의 왕이 르베나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 한동안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넓은 응접실을 가득 채운 긴장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