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6)
“하아… 저런 건 필요 없는데…….”
하늘높이 떠서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검붉은 회오리를 바라보며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건너편에는 연신 기분 좋게 웃으며 하늘에 떠오른 검붉은 회오리에 마력을 주입하는 가스트가 보였다.
‘마력을 저런 식으로… ’
마력을 저렇게 쓰는 사람을 르베나는 맹세코 처음 보았다. 아벨디온 창단식에 걸맞은 선물을 준비한다고 아한과 한동안 안보이더니 둘이서 그새 저런 걸 고안했을 줄이야.
“누나!”
그때, 불러오는 목소리에 순간 찌푸려졌던 르베나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리며 뒤를 향했다.
어느덧 열 네 살, 소년의 모습을 한 아한이 르베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스트를 꼭 닮은 회색 머리와 맑은 녹안을 빛내며 달려오는 아한. 르베나가 웃으며 아한을 반기자 아한이 덥석,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강아지처럼 고개만 빼꼼히 들고서는 말했다.
“음… 할아버지랑 내가! 만들었어… 선물로.”
‘분명 하늘에 꿈틀대는 저걸 말하는 거겠지.’
애써 작은 한숨을 삼킨 르베나가 웃으며 아한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고맙다.”
르베나의 짧은 감사의 말을 들은 아한의 얼굴이 말갛게 붉어졌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런 아한의 모습을 가만히 제 눈에 담았다.
이년 전부터 르베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디오니스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돕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기사들에게는 일 년에 두 번 휴가가 주어지는데 르베나는 보통 이때를 활용했다. 그때마다 르베나가 하는 일은 비슷했다.
빠른 속도로 각 마을들을 돌며 동네에 무뢰배들을 죄다 때려잡아 치안을 바로 세웠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는 작은 마을은 수도와 연계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일자리를 마련해 주도록 해 주었다. 물론 나라의 재상인 메이슨 공작을 통해 말이다.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를 통제할 기사들이나 마을의 관리들을 편하게 부르기 위해 하늘에 마력을 쏘아 올렸다.
“검붉은 회오리다!”
“저쪽이야!”
그것이 하늘에 쏘아 올려 지면 마을에 주둔해있는 기사들을 곧장 그곳으로 출동했다. 그러면 그곳에는 르베나가 때려잡은 못된 놈들이 묶여 있기 마련이었다. 르베나가 이렇게 디오니스의 각지를 시찰하러 갈 때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한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를과 아한이었다.
아를은 이름뿐인 호위로, 아한은 르베나의 제안으로 함께 다니게 되었다. 처음 아한은 르베나의 뒤에 숨어 사람을 살피기만 할 뿐 도무지 다가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남을 도우며 타인 앞에 나설 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르베나가 함께 하지 못할 때에도 아한은 가스트와 함께 마을들을 돌며 마력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는 본인의 힘을 보태었다.
그러다 보니 아한이 꼭 말로 무엇인가를 전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씩 트인 말문은 아직 말수가 적긴 했으나 의사소통이 될 만큼 원활해지고는 있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지만 그 조금의 변화들이 아한의 상처들을 조금씩 보듬고 있었던 것이다.
“다 큰 녀석이 어린애처럼 안겨들다니.”
갑자기 날아든 싸늘한 목소리에 르베나의 품에 안겨있던 아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에 르베나가 목소리의 주인공, 아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어, 아를.”
르베나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하자 아한이 슬그머니 르베나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당황한 듯 주뼛거렸다. 그런 아한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누, 누나! 창단식 잘 볼게!”
아한이 민망한 듯 인사를 하고는 곧장 자리를 뜬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아를이 못마땅하다는 듯 기어이 한마디를 더했다.
“이제 아한도 열세 살입니다. 알 만한 거 다 알 나이에 품에 안는 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기.사.단.장.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고 목소리마저 싸늘한 아를의 반응에 르베나가 조금 기가 막혀 말했다.
“듣기 거북하군, 아한에 대한 말.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사단장 소리와 존대가.”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순간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버님이 기사단장님께 반말을 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셔서.”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붉은 눈동자를 굴려 못마땅하다는 듯 아를을 바라보았다. 이에 반항기 어린 아를의 얼굴을 본 르베나가 나직이 작은 한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메이슨 공작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다고.”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들켰다는 듯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르베나도 피식 웃음으로 화답했다. 기사단 중 유일하게 르베나에게 친구처럼 다가온 아를이 존댓말로 제게 거리를 두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얇은 장막을 뚫고 들려왔다.
“그러면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 드 디오니스 단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순간 이름이 호명되자 르베나가 아를을 한번 건조하게 보았다. 이에 아를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르베나가 앞에 있던 계단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르베나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점점 그녀를 비추는 태양이 강해졌다. 아를과 작은 연막 안에 있다가 어느새 마련된 무대 위에 오르니 쏟아지는 태양빛은 어느새 르베나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단상에 선 기사단장, 르베나. 르베나는 오늘의 저가 퍽 마음에 들었다.
이년 전, 귀족회의를 마치고 다한이 이끄는 제1기사단에 정식 시험을 치르고 평기사로 입단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왕국의 기사단은 귀족 자제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비록 왕족이기는 하나 아버지의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여성이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것에 대해 심적인 적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제1기사단의 기사단원들과 총기사단장인 후벤 경이 존중하는 르베나의 실력을 알기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르베나가 처음 검기에 대해 말하며 지원자를 모집했을 때 그들은 모두 르베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베이라이기에 쓸 수 있는 기술에 기사들보고 목숨을 걸라니.”
“신분이 미천하시잖냐. 폐하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겠지 뭐.”
“검기? 별 웃지기도 않은 이름을 붙여서는, 푸하핫.”
모두의 비웃음, 은근한 경멸과 뚜렷한 거리감을 르베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한과 아한은 그들이 비웃으며 이해하지도 못했던 검기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만의 기사단 ‘아벨디온’을 창시한다.
그때 르베나를 비웃던 기사들은 적어도 이제 그녀를 더 이상 뒤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디오니스 왕국와 젠 제국이 인정한 최초의 여성 기사단장이 되었으니까.
단상에 오른 르베나의 눈이 아래 시립한 디오니스의 왕궁 기사들을 쭉 훑었다. 그들은 르베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은근슬쩍 눈을 피하거나 딴청을 부려댔다. 아직도 르베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한 탓이리라.
하지만 르베나는 그들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들 모두를 무감각한 눈으로 훑은 뒤 가장 앞줄에 시립한 아벨디온 기사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검붉색의 망토에 르베나의 회오리 표식을 어깨에 단 이들은 다른 기사단에 비해 수가 현저히 적었으나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다린 듯 상기되어 보였다.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춘 르베나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벨과 디온. 그들은 모두가 아는 전설적인 마법사와 검사였다. 아벨은 신력과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였으며 디온은 어떤 마법사조차 상대할 수 없었던 실력의 검사였지. 그럼 한 가지 묻지.”
르베나의 시선이 모두를 비추는 한 낮의 태양보다 뜨겁고 날카롭게 빛났다.
“이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 외 가지고 있던 차이점이 뭔지 아나.”
르베나의 물음에 아벨디온의 기사들마저 당황스러운 듯 도르륵 제 눈을 굴렸다.
보통 창단식의 포문을 여는 기사단장의 말은 신과 왕국에 이 영광을 돌린다고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 기사단이 어떻게 설립되었고 앞으로 이런저런 좋은 일을 할 것이며 왕국에 어떠한 보탬이 되리라 하는 뻔하고 지루한 말들 말이다.
그런데 대뜸 아벨과 디온이라니? 디오니스뿐만 아니라 각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전설적인 인물들을 말하며 아무도 모를 그들만의 특징이라니?
르베나의 질문에 계속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는 기사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의. 그들에게는 바로 그들만의 정의가 있다는 것이다.”
몇몇 기사들이 그제야 르베나의 대답에 탄식을 내뱉었다.
“아벨은 모든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최강의 마법사임에도 자신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에게는 공격 마법을 쓰지 않았다. 또한 어떤 마법사조차 이길 수 없었던 검사 디온은 오로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들었다고 하지. 이것이 우리 ‘아벨디온’기사단의 목표가 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아벨이 가지고 있는 섬세하고 집약적인 마법기술, 그리고 디온이 가지고 있는 예리하고 묵직한 검술말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물론 뛰어난 실력 또한 갖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보다 먼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우리만의 ‘정의’이다. 우리가 가진 힘이, 그리고 가지게 될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정의’ 말이다!”
살짝 상기된 듯 한 아름다운 얼굴에서 그와는 상반된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난 감히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으로써 그대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전달하겠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선명하게 빛나며 자신의 앞에 시립한 ‘아벨디온’ 기사단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나의 검이 부러질 것을 두려워 말고 적의 공격에 맞서라. 나의 팔이 잘릴 것을 각오하고 눈앞의 무력한 백성 한 명을 더 구하고, 나의 목숨이 다할 것을 각오하고 내 동료의 안전을 먼저 확보해라.”
그녀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아벨디온 기사들의 눈빛도 형형하게 빛났다.
“힘 있는 자의 겁박에 맞서 무력한 이들을 지켜내고, 내가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목숨과 재산과 이익이 아니라 내 동료의, 내 가족의 그리고 그들의 소중한 누군가임을 절대로 잊지 마라!”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시선이 마침내 모두를 아울렀을 때,
“‘아벨디온’! 우리는 이제부터 그들을 위한 기사가 되리라! 오늘부터 우리가 흘릴 땀은 누군가를 위한 살이 될 것이고 오늘부터 우리가 흘릴 피는 누군가의 목숨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사단장으로써 그대들에게 내리는 첫번째 명령이다!”
르베나의 말은 크지 않지만 모두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고. 강요는 없었지만 설득이 있었으며. 명령은 있었으나 억지는 없었다. 그런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 연무장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그리고 순간 아벨디온 기사단의 제일 앞에 시립한 다한과 아를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검을 르베라를 향해 뻗으며 외쳤다.
“아벨디온의 정의를 위해!”
“아벨디온의 정의를 위해!”
그러자 바로 뒤에 시립해 있던 열 명의 아벨디온 기사단원들 역시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제 검을 빼어들며 두 사람의 말을 재창했다.
“아벨디온의 정의를 위해!”
그들의 강인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디오니스의 왕궁과 대연무장 가득 퍼져나갔다.
그들의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아니 하나의 기사단을 구성하기엔 아주 적었다.
하지만 아벨디온의 정의를 외치는 그들의 눈빛만큼은 여느 수십, 수백의 기사단원을 합쳐놓은 것보다 빛났고 그들이 치켜든 검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곧 그들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정의, 그녀가 만들어 내는 정의로 함께 누군가를 지켜내며 이루어 갈 그녀만의 기사단이 말이다.
아벨디온.
훗날 모든 기사들의 염원과 선망의 대상이 될 기사단의 시작은 남들이 선뜻 이해하지 못할 정의를 외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작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