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56화 (56/276)

5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5)

달그락, 달그락.

시종, 시녀들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가득 든 고급스러운 은제 식기들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족히 삼십 명은 앉아도 될 만한 큰 식탁에는 어느새 틈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음식들이 세팅되었다.

그리고 그 식탁에 앉은 이는 고작 아홉 명. 상석에는 제노스 왕이, 그 양 옆으로 메이슨 공작과 후벤. 각각 그들의 옆에는 아를과 다한이 자리했다. 건너편 상석에는 루드바하가 앉았고, 그의 양옆에는 라웅과 유안이 자리했다. 커다란 식탁에는 과거 베이라들의 성지인 디오니스답게 확성 마법이 장착되어 있어 큰 공간과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리의 대화도 충분히 잘 전달되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봅니다, 허허.”

약속 시간보다 하나같이 일찍 온 모두를 둘러보는 제노스 왕의 목소리가 전해졌지만 모두는 표정으로 답할 뿐 여타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 가운데 세팅된 한 자리와 식당의 입구만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기다림이 길지 않았던 어느 시점, 시종장 크론이 흐뭇함이 가득 베인 목소리로 크게 고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공주님께서 들어 오십니다.”

세상 뿌듯한 그의 목소리에 모두 약간씩 조여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입구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사락사락.

바닥에 살짝 끌리는 짙은 보라색의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부드러운 시폰소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안 보이게 모두 틀어 올린 르베나의 고혹미를 부각시켰다. 또 짙은 보랏빛의 색감은 르베나의 흰 피부와 대비되어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그녀의 입술을 더 붉게 보이게 했다.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머리의 진주가루가 아름다웠다.

붉고 또렷한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무표정하지만 언뜻 도도해 보이는 표정. 곧게 뻗은 부드러운 선의 콧날 밑에 자리 잡은 탐스러운 입술.

르베나가 등장하자 일순간 모두의 숨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큰 입구를 지나 식탁을 향해 한 걸음을 떼자마자,

벌떡.

벌떡.

두 명의 남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 남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을 무시한 채 르베나에게 다가갔다.

“공주, 손을.”

“르베나, 손 줘.”

그들, 루드바하와 아를의 두 손이 각각 르베나를 향해 내밀어졌다. 하얗지만 약간의 굳은살이 잡혀 있는 손과 마디가 온통 굳은살투성이의 굵은 손. 그 뜻밖의 상황에 놀란 것은 르베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자리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특히 유안은 언제나 짓던 쌀쌀맞은 표정 대신 멍한 표정을 짓다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하지만 이 상황이 제일 곤란한 것은 누구보다 르베나였다.

르베나는 그동안 기사의 길을 걷느라 데뷔탕트며 무도회에 일절 나가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티 타임 초대에도 단 한 번을 나간 적이 없었다. 이 긴 머리마저 몇 번이나 자르려 했지만 사나와 루가 울면서 말리는 통에 훈련 중에는 묶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을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르베나에게 누군가의 에스코트는, 특히 한꺼번에 내밀어진 손들을 처리하는 방법 같은 건 적의 급소를 노리는 것보다 어렵고 고민되는 문제였다. 이전의 삶, 그녀가 왕이었을 땐 항상 가스트와 후벤이 번갈아가며 에스코트를 자청했으니.

얼핏 무표정해 보이지만 약간의 당혹감을 느낀 르베나의 얼굴을 본 제노스 왕이 허허 웃으며 자신의 손녀를 구하러 나섰다.

“이리도 매너가 좋은 유파시드와 아를 경이라니! 우리 르베나가 고민이 되겠구나.”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노스 왕이 르베나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르베나의 손을 제 팔에 부드럽게 끼우고는 제 손녀를 둘러싼 두 남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 선약은 저라서 말입니다, 허허.”

사람 좋게 웃은 제노스 왕이 르베나를 데리고 여유롭게 식탁으로 향하자 메이슨 공작은 작게,

“저 팔불출…….”

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멍한 표정으로 남은 아를과 루드바하는 애써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숨기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달그락, 달그락.

아까의 민망함은 누군가의 허기가 되어 곧 식기들이 부딪치는 최소한의 소리만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신선한 연어 카르파초와 새콤한 레몬 베이스 소스가 모두의 입맛을 돋우었고 곧이어 나온 부드러운 단호박 수프는 고픈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어린 송아지 스테이크는 부드러운 육질을 자랑했고 고기에 착 달라붙는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짤한 소스 덕분에 한 번 먹으면 두 번째 손짓을 부르는 맛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상큼한 유자 푸딩이 텁텁한 입맛을 상큼하게 헹구어 주고 마지막 홍차의 향이 진하게 밴 쿠키와 따뜻한 페퍼민트 차가 식사 내내 즐거웠던 입을 마무리해 주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간간이 이어가던 루드바하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일이 아벨디온의 창단식이라 들었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제노스 왕을 한번 보고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했다.

디오니스의 왕에게 일종의 발언 허락을 받은 것이다.

“네. 내일 아벨디온의 창단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디오니스의 왕궁 내에서 기사들만을 소집하여 작게 진행될 예정이고 백성들에게 간단한 음식을 돌릴 예정입니다.”

원래 한 왕국의 기사단 창설은 큰 행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온 백성 앞에서 큰 축제를 여는 창단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 돈으로 차라리 배고픈 백성들에게 따뜻한 음식이 주어지길 바랐다. 곧 다가올 겨울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사실을 르베나는 어린 시절 외궁의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제노스 왕을 비롯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에 루드바하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르베나 공주님께는 언제나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내일 저도 아벨디온의 창단식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약간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대로 유파시드는 젠 제국 내에서도 정말 큰 행사가 아니면 아무리 큰돈이나 대가를 지불해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 유파시드와 창단식을 함께하는 기사단이라니. 상징적인 의미로도 또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에도 분명 좋은 시작이 될 것이었다.

“그래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조금은 기분 좋게 들려오는 르베나의 답에 루드바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정식으로 아벨디온 기사단에 첫 번째 의뢰를 하려 합니다.”

이어진 루드바하의 말에 모두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창단도 전에 첫 번째 의뢰라니.

그러자 그가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최근 자칸에서 이유 없는 여성들의 실종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좌중을 둘러본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자칸은 줄곤 신마전쟁의 중립을 표방해온 나라로 신마전쟁 동안 젠과 디오니스에 다양한 마법사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지금 가장 번영이 더딘 이유도 신마전쟁에 지원군을 보내는 바람에 전장에서 수많은 인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다. 분명 이제까지 자칸의 지원은 디오니스에도 큰 도움이 되었었기 때문이리라.

“자칸의 젊은 왕세자가 동분서주하며 해당사건을 알아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인재가 모자라는지 젠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젠에서는 정식으로 이 일을 아벨디온에게 의뢰하는 바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붉게 빛났다.

아벨디온에게 들어온 첫 번째 의뢰.

‘이번에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나아가 내가 가진 마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리라……!’

르베나가 이전의 삶의 끝을 확인한 이후 매일같이 되뇌던 말을 실천할 때가 온 것이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고, 이번에야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고 그들과 등을 맞대며 서로를 지킬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마력이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파괴되고 질시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 누군가를 이롭게 해줄 힘이라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에 잠시 쉬어갈 작은 처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그런 그녀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벨디온의 창단과 첫 번째 제국의 의뢰. 르베나의 가슴이 알 수 없는 떨림으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인생의 첫 발자국.

그 깊고 진한 첫걸음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 * *

펑. 퍼엉!

하늘을 향해 날아간 회색의 빛이 연달아 환하게 터지며 검붉은색의 회오리로 바뀌었다.

퍼퍼펑! 펑!

다시 하늘로 쏘아 올려진 회색빛이 이번에는 좀 더 크고 선명한 회오리를 그려내었다.

파란 하늘에 아로새겨진 검붉은 회오리 바람.

하지만 누구도 이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나 그 표식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앗, 르베나 공주님의 표식이다!”

궁 위에 떠 있는 검붉은 회오리를 가리키는 작은 아이의 손가락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백성들의 눈이 그리로 향하였다.

검붉은색의 회오리, 그것은 디오니스의 정식 후계자인 르베나 공주이자 디오니스의 수호자인 르베나 경의 표식. 그리고 지난 이 년, 백성들은 저 표식이 있는 곳에는 꼭 그녀의 도움이 함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늘이 르베나 공주님의 기사 창단식인가 봐.”

누군가의 수군거림에 사람들이 저마다 말들을 보태었다.

“아, 들었어! 검기… 라나 그런 걸 사용하는 기사들을 길러낸다던데!”

“맞아! 우리 공주님이 기사단장이 되신데!”

“디오니스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이나 젠의 일도 돕는 기사단이라는데.”

저마다의 말들이 쏟아 낸 내용은 다양했지만,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검붉은 회오리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모두가 같았다.

동경과 존중. 애정과 감사.

그들에게 이년 전부터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디오니스의 공주는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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