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55화 (55/276)

5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4)

“아벨디온.”

아를이 이름이 다시 되뇌며 물었다.

“마력과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전설 속의 마법사 아벨과 모든 마법사들을 능가하는 검술을 지녔다는 전설 속의 검사 디온. 그들의 이름에서 따온 거지?”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르베나를 보고 앉아있던 아를이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르베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 손을 조심스레 올렸다.

쓱쓱.

“잘했네.”

그렇게 르베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를은 르베나의 눈이 저를 향하기 전 몸을 돌려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르베나를 등지고 돌아선 그의 입가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배어 있었지만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갸우뚱.

순간 아를이 쓰다듬은 제 머리를 한번 매만진 르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는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어서 연무장을 향해 따라나섰다.

오늘따라 연무장이 꽤 소란스러웠다.

모두들 기합에 절어 훈련하고 있을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에 서로를 한번 마주 본 아를과 르베나가 의문을 담고 수군거림의 원인을 향해 다가갔다. 녹색 머리에 밝은 녹색 눈동자. 그가 소란의 원인이었다.

“아 나도 그 검기인지 뭔지 배우고 싶다니까!”

바락바락 악을 쓰는 그에게 다한이 한숨을 내어 쉬며 잘 타이르고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검기는 소수의 인원만이 연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직 사람에게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로 타국의 기사에게는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한의 부드러운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아, 괜찮다고! 나 튼튼해! 나 안 죽어! 그러니까 빨리 알려줘!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야!”

그의 떼에 다한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난감해할 찰나, 르베나가 나서며 말했다.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라웅 경.”

르베나의 말에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라웅 경?”

“그 젠의 기사단장?”

“뭐야 젠의 기사단장이 저렇게 어리다고!”

이미 명성이 자자한 라웅의 정체에 모두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때 르베나를 발견한 라웅이 반가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와! 공주님, 반가워! 이게 얼마 만이야.”

라웅이 르베나에게 다가가 덥석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르베나를 꼬박 2년 만에 보았고 마지막 귀족 재판 전에 디오니스를 떠난 라웅이었으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반가움이 사뭇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라웅의 손은 얼마 못 가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제 손목을 강한 힘으로 그려 잡는 이를 라웅이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이 손 놓으시지요. 그리고 이곳은 연무장인 만큼 이분은 르베나 공주님이 아니라 르베나 경입니다. 경께서도 기사시라면 기사들 간의 예의를 지켜주시지요.”

아를이 금안이 더없이 차갑게 빛나자 라웅이 그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탄탄한 몸과 제 손에 닿은 수많은 굳은살. 그리고 꽤 괜찮아 보이는 검까지. 아를을 살펴본 라웅이 곧 더욱 르베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의 녹안에 개구쟁이처럼 어려 있는 빛이 발동한 순간이었다.

“싫다면.”

놀리듯 던진 라웅의 말에 아를의 표정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동시에 싸늘한 금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럼 강제로 뗄 수밖에.”

순간 아를이 강한 힘으로 라웅의 손을 잡자 라웅은 떨어지지 않으려 더 큰 힘으로 르베나의 손을 잡고 버텼다.

아를의 금안이 차갑게 가라앉는 만큼 라웅의 녹안은 장난끼와 함께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그만. 라웅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이제껏 꿈쩍도 안 하던 라웅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손을 빼냈다.

“아씨… 죽었다.”

그러고는 들려오는 라웅의 작은 중얼거림에 아를의 눈이 연무장에 들어서는 한 사람을 향했다.

“저희 기사단장이 무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사과의 의미는 전해졌고, 사과를 했음에도 그의 존재감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유파시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곧 아를이 여전히 싸늘한 금안으로 루드바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례인 줄 아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니 다행이군요.”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이 다소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이를 알아챈 이는 없었다.

루드바하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잠시 아를을 바라보다가는 가볍게 눈을 돌려 르베나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아를이 덩달아 르베나의 손목을 바라보자 곧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손목이 들어찼다. 아무리 단련으로 근력이 좋아진 르베나지만 손목을 뒤덮은 여린 살갗만은 여전했다.

루드바하가 곧바로 르베나의 손목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니, 대려 했다.

예상치 못한 방해만 아니었다면.

“제 동료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루드바하보다 빠르게 르베나의 손목을 붙잡은 아를이 작게 ‘제길’이라고 속삭이고는 르베나를 보며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바보야,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아를의 타박에 르베나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별로 아프지 않으니 수선 떨지 마. 그리고 라웅 경은 반가워서 손을 잡은 것뿐이야, 아를.”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제 두 손으로 르베나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쥐어 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부었는데 수선은 무슨! 하… 기다려 봐 얼음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아를이 부를 시종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루드바하의 눈길은 르베나의 손목을 잡고 있는 아를의 손에 진득하게 붙잡혀 있었다. 곧 루드바하의 푸른 눈이 어둡게 일렁임과 동시에 그의 신력이 잘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르베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루드바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옅은 미소를 그려 내었고. 그의 신력 역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며 사라져 버렸다.

곧 루드바하가 큰 보폭으로 르베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아를에게서 부드럽게 잡아챘다. 그러고는 아를이 뭐라 할 겨를도 없이 제 신력을 여과 없이 뿜어 냈다. 보기만 해도 신성함이 가득 느껴지는 색과 기운이었다.

곧 기분 좋은 시원한 감각이 르베나의 손목을 감싸 왔고 손목은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이렇게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엄지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원래 치유력은 신력이 조금 빠르니까요. 아, 공주님의 마력이라면 차이가 없겠지만.”

환하게 웃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를이 시종이 부른다고 할 때 르베나는 그냥 마법을 써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루드바하의 앞에서 마력을 쓰자니 여전히 조금은 껄끄러운 기분에 무심코 함께 시종을 찾았는데, 루드바하의 신력이 자그맣게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왜 그의 신력이 난폭하게 날뛰는지 의문을 담아 그를 보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신력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보니 방금 자그맣게 날뛰던 그의 신력은 치유력을 위한 거였나 싶었다.

누구의 마법이든 결과는 같았기에 르베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성격의 르베나다웠다.

그리고 그때, 성큼 다가온 아를이 르베나의 손목을 루드바하에게서 낚아채 도로 제 손에 쥐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의 세기였지만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는 마음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아를은 동시에 르베나의 손을 쥐고 있던 루드바하의 손을 탁, 쳐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르베나는 오늘따라 제 손목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에 대해 무심히 고민했다.

“봐 봐. 이제 좀 괜찮네. 걱정 좀 시키지 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 했잖아.”

순간 아를이 르베나에게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드바하가 그답지 않게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내쳐진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로 유파시드이자 젠의 황제가 된 그의 손을 이렇게 무례하게 쳐낸 이는 아마 눈앞의 이 시건방진 기사가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일 것이고.

루드바하가 차갑게 가라앉은 벽안으로 아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보다 더 짙어진 그의 미소가 현재 그의 심기를 반영하고 있었고 더 짙어진 미소임에도 더해진 한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디오니스에서는 기사가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모양이군.”

툭 던진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여전히 르베나의 손목을 살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제국의 황제라고 무례를 저질러도 되는 법은 없습니다. 르베나는 디오니스의 공주입니다. 타국의 왕이 타국 공주의 손목을 허락 없이 잡는 건 보기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유파시드여.”

건성인 듯하지만 본질을 짚은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의 얼굴에 더 깊은 미소가 장착되었다.

그리고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손,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르베나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를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분명 르베나 경은 연무장에서는 공주가 아니라 하지 않았나? 게다가 난 한 나라의 공주가 아니라 다친 이의 손목을 살폈을 뿐이네. 말이 자주 바뀌는군, 디오니스의 건방진 기사께서는.”

어느새 루드바하는 아를에게 말을 낮추고 있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이는 디오니스 내에 없었다.

유일하게 한 사람. 지금 루드하바의 모습에 가장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라웅이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한 그가 말을 놓다니. 그는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그가 말을 놓는 건 유안과 라웅 그리고 성기사들이 전부일 것이다.

‘근데 저 포커페이스가 처음 본 사람한테 말을 놓다니, 대박!’

이 재밌는 이야기를 꼭 유안에게 들려줘야지 하며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라웅에게 르베나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하아… 두 분의 용건이 끝나셨으면 전 이만.”

르베나의 무감각한 붉은 눈이 잔뜩 싸늘해진 아를의 금안과 여느 때보다 짙은 미소를 베어 무는 루드바하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제 손목이 인기가 많다 싶긴 했지만 제 연습 시간을 빼앗길 만큼 흥미로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라웅과 아를, 아를과 루드바하의 신경전이 힘의 대결에서 비롯된 것이라 기사로써 조금 이해해 보려고도 했지만 점점 귀찮아지기도 했다.

왜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에 한심함이 엿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결국 아를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낸 르베나가 그들을 보며 귀찮다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혹시라도 두 분께서 더 나누실 말씀이 있으시면 연무장 밖에서 해 주시죠. 기사들의 훈련에 방해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련 없이 돌아서는 르베나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그녀에 대한 제 집요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소리로 아를에게 경고했다.

“그대의 건방짐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지.”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 역시 돌아선 르베나를 눈으로 쫓으며 싸늘하게 되받아쳤다.

“르베나 경에 대한 폐하의 무례함 또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동시에 루드바하와 아를이 고개를 휙 돌려 한동안 서로의 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깊게 일렁이는 금안과 더없이 싸늘한 벽안이 치열하게 맞붙는 느낌.

곧 루드바하가 먼저 뒤로 휙 돌아서며 라웅에게 말했다.

“이만 가지, 라웅.”

그렇게 루드바하가 발걸음을 옮기자 길목마다 늘어선 기사들이 목례를 하며 길을 터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를은 여전히 제 금안을 싸늘하게 빛내며 루드바하의 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를의 동물적인 감각이 말하는 것 같았다. 가장 치열하게 맞붙어야 할 인생의 적수를 너는 지금 여기에서 만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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