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3)
쥬라와의 싸움이 있던 날. 르베나는 제대로 된 감정제어가 되지 않고 마력은 이에 반응해 멋대로 날뛰었다. 그러다 쥬라를 검으로 찔렀던 어느 순간! 제멋대로 날뛰던 마력이 검을 통해 흘러들어 쥬라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검이 주는 물리적 타격과 마력이 주는 마법적 타격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친 일이었다. 하지만 후에 르베나는 다한의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하게 되었고 남들과는 다른 본인만의 검술을 연구하던 중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거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작은 가능성에서 시작된 기술발전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계속 휘둘러야 하는 검에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마력을 담는 것은 뛰어난 베이라인 르베나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하아 하아…….”
훈련은 거듭될수록 난항을 겪었고 마력의 힘을 이기지 못한 검 날은 깨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계속해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검에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마력을 담을 수 없어 엉뚱한 곳으로 마력이 날아가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정말 움직이는 검에 마력을 집약적으로 넣는 게 가능하다면…! 이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무기가 될 것이고 검보다 큰 파괴력을, 마법보다 정교한 힘의 집약을 이루어 낼 것이라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큰 정의를, 더 적은 희생을 르베나의 손으로 지켜낼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그래서 르베나는 쉬지 않았다. 낮에는 매일 기사들과 같은 시간 동안 훈련을 받고 밤에는 홀로 쉬는 시간과 잠을 줄여가며 검에 마력을 넣는 연습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콰과광!
검붉은 마력이 쏘아져 나간 길의 끝, 산산이 부서져 버린 연무장의 한쪽 벽이 보였다. 그 순간 르베나는 느꼈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제 검을.
“…해냈어…!”
땀으로 가득 찬 르베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베이라나 세츠가 아니라도 이걸 쓸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처참하게 깨진 연무장의 벽을 보며 던진 다한의 물음에 르베나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법을 쓸 수 없더라도 주인과 동화가 잘 된 마력이라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신체와 닿아있는 검도 본인이 갈 수 있는 통로라고 여기고 마력이 이동하게 돼.”
“큰 마력이나 신력없이도 말입니까?”
“응, 그냥 생명력 이상의 마력이나 신력, 딱 그것만 있으면 돼. 이는 마법적인 재능과는 별개로 검에 넣을 수 있는 여분의 마력을 가지고 있고, 그 마력을 느끼고 활용하는 뛰어난 집중력만 있다면 가능해!”
곧장 르베나의 말에 기사단에는 여러 가지 의미의 파란이 일었다. 기사가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르베나는 즉시 이 가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사 중에서 자원할 사람을 찾았다.
“저… 공주님. 하아… 지원자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대단한 베이라였기 때문에 성공한 일에 본인들의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아 했다. 그리고 그때 자원한 것이 모든 기사단을 통틀어 다한과 아를 두 사람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정상인보다 많은 양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제3기사단의 단장이었음에도 이를 위해 제1기사단의 평기사로 와 함께 수련했다.
사실 후벤은 누구보다 먼저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그에겐 마력이나 신력이 전혀 없었다.
그 반듯한 후벤이 이 일 때문에 실망해 며칠간 맥주를 들이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를 경, 좀 더 힘을 줄여야 해.”
“다한 경, 조금 더 검을 아래로 들어야 마력이 빗나가지 않습니다.”
“르베나 경! 피해!”
그때부터 세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르베나는 이전의 삶에서처럼 마법에 무력한 이들이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길 바랐고, 기사단 또한 다시는 베이라나 세츠 앞에서 희생당하길 원하지 않았다.
다한은 지키지 못한 그날의 기사들과 그날의 무력감을 곱씹었고, 아를은 디오니스에서 보기 힘든 천재적 검술의 기사였지만 언제나 더 큰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마음을 통해 끈질기게 훈련을 해 나갔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검술에는 능통한 자들이었기에 르베나는 이들이 빠르게 본인 몸의 마력을 느끼고 동화되는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다한과 아를은 능숙한 솜씨로 제 검에 마력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검에 마력의 기운을 담는 것, 이들은 이것을 ‘검기’라 불렀다.
상념에서 깨어난 르베나가 제노스 왕을 보며 물었다.
“도움을 원하신다는 말은 어떤 뜻인가요.”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 왕이 말했다.
“그는 모든 왕국이 자립심을 갖길 바라지만 곳곳에서 왕국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일들이 터지고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럴 때마다 다른 왕국이나 젠에서 이를 도우며 서로 상생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오랜 신마전쟁으로 모두 피폐해졌다.”
제노스 왕의 얼굴에 오래된 수심이 떠올랐다.
“우리에겐 다른 왕국을 도울 인력도 재산도 없는 상황이지. 하지만 젠 역시 이미 많은 인력을 다른 네 개의 왕국 재건을 위해 쓰고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사건들에는 세츠들을 충분히 파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단다.”
“설마…….”
“그래, 그래서 디오니스에 청을 한 거라고 하더구나. 지금 가장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게 디오니스이니. 그리고 유파시드께서는 그 바탕에 네가 있다고 믿고 계신단다. 그래서 르베나 너의 마력과 그 검기라는 새로운 기술을 모두를 위해 썼으면 좋겠다시더구나.”
제노스 왕의 말에 아를이 싸늘하게 말했다.
“결국 르베나의 마력과 검기를 다른 왕국들이 견제할까 모두를 위해 쓰자는 말이군요.”
순간 응접실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메이슨 공작이 분위기를 전환하듯 조금은 톤을 높여 말을 했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만약 르베나 경과 다한 경, 그리고 아를 너만 괜찮다면 디오니스의 대외적인 이미지 회복은 물론이고 도움을 받게 될 왕국과의 관계도 좋아질 거다.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 생각에는 유파시드께서 디오니스에 대한 애정이 많기 때문에 이 같은 제안을 하신 게 아닌가 한다.”
메이슨 공작의 말에 아를과 다한은 생각에 잠겼고 르베나는 이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루드바하를 떠올렸다. 약간 옅은 금빛이 돌던 은빛의 머리와 호수같이 파랗고 시리게 빛나던 벽안의 눈. 그 눈에 떠오른 수만 가지의 색들까지.
“언젠가 그대의 데뷔당트가 있다면 파트너는 제가 하고 싶어서.”
모른 척했던 그의 말이, 음성이, 어조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제가 혼자 줄곧 생각하던 게 있는데 이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르베나가 잠시 그를 떠올린 순간 이제껏 조용하던 다한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전 예전부터 르베나 경의 기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르베나 경은 더 이상 저에게 배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르베나 경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재 기사단 내에서 마력이 있다면 르베나 경에게 검기를 수련하고 싶다는 녀석들도 꽤 있습니다. 이 기회에 검기만으로 기사단을 꾸려 유파시드께서 제안한 일을 하면 어떨는지요.”
다한의 말에 한차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르베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르베나의 미간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그건 안 됩니다. 기사단장은 다한 경이시고 전 그저 평기사일 뿐입니다. 그런 제가 기사단장을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르베나의 말에 다한은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기사단장은 권력과 지위가 아닌 실력으로 해야 한다.”
그의 말에 르베나가 다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께서 처음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공주님,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공주님께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배움을 청하는 이가 아래에 속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한의 말에 아를이 이어 말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르베나 경이 이끄는 기사단이라면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아를의 군더더기 없는 찬성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를과 다한은 서로를 마주 보며 씨익 웃었고 메이슨 공작과 제노스 왕은 그들의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한은 이제야 좀 편해진 얼굴로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오직 르베나만이 지금 이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 답지 않게 조금 심통이 난 듯한 얼굴로 쿠키를 먹었다.
늦은 오후의 석양이 응접실을 비추며 그런 르베나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찻잔 너머 그런 르베나의 얼굴을 제 금안에 담은 아를의 입가엔 조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훗날 전 대륙을 놀라게 할 기사단의 작은 시작은 이렇게 디오니스 왕궁의 작은 방에서 저마다의 색을 갖고 시작되었다.
며칠 후, 르베나는 모처럼 일정이 없는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원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며칠 전 결정된 기사단 창단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사단장이라… 하아…….’
이번 생에서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이끌기보다 등을 맞대고 함께 서로를 지키고자 했다.
명령과 통제로써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이 이전 삶의 르베나였다면 이번에야말로 같이 흘리는 땀과 믿음으로 서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기에 또다시 누군가를 책임지고 이끄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이 지그시 르베나를 눌러왔다.
이미 르베나는 한번 실패했었다. 그런데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때, 불쑥 큰 그림자가 르베나를 덮쳐 왔다. 놀라 들어 올린 르베나의 눈에 순간 그가 가득 들어왔다.
이년 전 어느 날처럼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은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한 푸른 눈으로 가만히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가.
“루드… 바하.”
르베나의 붉은 입술에서 그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이 작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루드바하의 그림 같은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터져 나왔다.
“이년 만… 인가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둘은 이년 전 어느 날과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외궁의 후원.
시녀들이 세팅한 찻주전자에서는 뜨거운 증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테이블 가득 차려진 디저트들은 저마다의 맛으로 누군가를 유혹하고 있었다. 티 타임을 즐기기에는 조금 이른 오전의 공기. 두 사람은 상쾌한 아침공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보았다.
“그동안 많이… 성장하셨군요.”
루드바하의 곧은 시선이 르베나를 향했다.
어느새 더 길어진 검은 머리는 풍성하게 구불거리며 윤기를 띠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의 선은 여성스러움이 묻어 났으며 붉고 선명한 눈은 더욱 도도해 보였다.
곧고 선이 고운 코 밑으로 보이는 입술은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초여름의 날씨에 어울리는 옅은 크림색의 엠파이어 드레스는 가볍게 르베나의 몸을 감싸고 있어 그녀의 싱그러움을 더해 주었다.
그뿐일까.
르베나 마력의 콘트롤도 이제는 그를 위협할 정도였다.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탄력적이었고 매혹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조금은 미소가 어울리는 듯, 무표정해 보이지만 살짝은 풀린 얼굴과 표정이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도 이곳의 차 향은 좋네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툭 건네 오는 루드바하의 부드러운 말에 르베나의 시선 또한 그를 향했다. 호수같이 깊고 그래서 더욱 알 수 없는 푸른 눈은 지독히 시리게도 지독히 뜨겁게도 보였다. 곧게 뻗은 콧날 밑의 단정한 입매에는 언제나 그렇듯 옅은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아까 보았던 환한 미소는 거짓이었던 것처럼.
르베나의 시선이 본인을 향한 것을 느꼈는지 문득 그녀를 마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순간 놀란 듯 멈칫하였다. 그러다가는 돌연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놀란 기색 없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기사단을 결성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공주님께서… 단장이 되신다고.”
르베나가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은 시원한 아이스티가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 잠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네. 여러가지로 디오니스에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부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르베나가 간결하게 대답을 한 후 스콘을 가져온 루를 향해 아이스티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만지는 르베나의 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 하지만 공주의 손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상태.
갖은 굳은살과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 르베나의 손.
누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 저 매혹적이고 숨 막히는 얼굴을 보고 거친 손을 가졌을 거라 상상이나 할까?
갑작스러운 생각에 순간 찌릿한 가슴께의 통증이 느껴졌으나 루드바하는 이를 애써 무시하고는 르베나의 손에서 천천히 시선을 떼며 물었다. 르베나의 손에서 떼어지는 그의 시선이 왜인지 진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기사단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루드바하의 물음에 르베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루드바하의 눈은 또다시 깊은 감정을 머금고 르베나에게 향했다. 르베나에게 그를 끌어당기는 무엇이라도 있는 건지 자꾸만 그녀에게 향하는 제 눈이 낯설었다.
하지만 막상 르베나의 눈이 그를 향하자 어느새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방금 그려 넣은 것만 같은 미소가 말끔히 지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루드바하를 바라보던 르베나가 아주 조금 말간 미소를 보이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아벨디온… 그게 제 기사단의 이름이 될 거예요.”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르베나의 말간 미소를,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그리고 시녀가 새로 내 온 아이스티 잔에 맺힌 얼음을 부드럽게 스쳐 갔다. 순간 루드바하는 이 바람에 실려 온 무엇인가가 저의 가슴을 꽉 조여 오는 아찔함에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