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53화 (53/276)

5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

검을 잡은 르베나의 오른손 가득 폭발할 듯한 마력이 빠르게 차올랐다.

우우웅--!

엄청난 양의 마력이 검붉은 색을 띄며 르베나의 손을 휘감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순간, 그 모든 마력이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아를을 향했다. 이에 아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르베나가 곧장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내려오는 와이번 떼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르베나의 검에서 하늘의 와이번 떼를 모두 후려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엄청난 바람과 함께 긴 가로줄로 뻗어나갔다.

콰앙! 쾅쾅!

끼이이익— 끽끽---!

귀가 아플 정도의 폭발음과 함께 고통에 찬 와이번들의 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곧이어,

후드득, 후드드득.

거의 절반에 달하는 와이번 떼가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남은 와이번 떼는 공포와 살기가 뒤섞인 눈을 빛내며 르베나와 아를에게 더욱 거세게 날아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를이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큰 키임에도 그의 몸은 가볍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동시에 그의 부드러운 흑발은 공기 중에 나부꼈고 긴 팔로 그어 내는 힘 있는 자세에 그의 바스타드 소드가 매섭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이와 함께 르베나에게 근접했던 와이번 세 마리의 목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촤악……!

같은 순간 르베나 역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유연한 몸을 이용해 와이번들의 독을 피한 르베나의 검이 사정없이 와이번들의 목을 베어냈다.

아를의 힘과 절도를 담은 롱소드의 묵직한 움직임과 르베나의 유연함과 완곡함을 닮은 가늘고 예리한 레이피어의 움직임. 그 둘이 그려내는 은빛의 잔상이 검게 물든 와이번 떼에 아름다운 그림을 빈틈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많은 와이번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게다가 완벽에 가까운 두 사람의 외모 또한 오싹하게 전율이 일만큼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와아… 저 둘의 콤비를 보게 되다니……!”

와이번 떼를 따라 급히 달려온 기사들 모두 공격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멍을 때리며 아를과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제1기사단의 막내로 오늘 처음 현장에 나온 랄프는 그중에서도 제일 넋이 빠진 모습으로 제 갈색의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댔다.

아를의 절도 있고 강인한 검이 은빛의 잔상을 남기면 그 자리에 있던 와이번들의 목은 몸과 깨끗이 분리되어 잘려나갔다. 호시탐탐 아를을 노리는 귀족가의 영애들이 본다면 며칠 밤을 앓아누울 만큼 그의 금안에서 나오는 싸늘한 예기는 날카롭고 나른했다.

또한 르베나의 몸이 유연하게 휘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와이번의 녹색 독이 흩뿌려졌고

그녀의 검이 완곡하게 찔러 들어가는 작고 좁은 틈으로 인해 와이번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게다가 디오니스 최고의 미인답게, 공중에 흩뿌려진 질척한 와이번들의 녹색 피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매혹적인 움직임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이게 도대체…….”

둘이 그려내는 장면은 랄프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검술이었다. 아니 랄프가 아니라도 어느 누가 와도 감탄을 하며 넋을 놓을 장면이었다. 언제나 연무장에서 상대를 향해 대련하던 저 둘이 같은 곳을 보며 힘을 합치면 와이번 둥지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는 것을 랄프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목표로 해야 할 검술이 바로 저들의 모습이라는 것도.

“모두 뭐하고 있나! 정신 차리고 르베나 경과 아를 경을 도와 와이번 떼를 처리한다!”

뒤늦게 도착한 다한 단장의 말에 모두 빠져나간 넋과 멍을 도로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모두가 르베나와 아를이 그려낸 완벽한 작품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르베나와 아를이 있는 곳. 그들과 함께 하는 곳. 그런 곳이라면,

애초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으니.

티이잉! 팅팅……!

잠시 후, 마지막 남은 와이번까지 모두 처리한 르베나가 검에 묻은 와이번들의 녹색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허리춤, 작은 주머니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는 주머니를 보던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입구를 열어주자 그 안에서 쪼르르르, 작은 털 뭉치가 튀어나왔다.

털 뭉치는 한눈에 보기에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보드랍고 복슬복슬한 흰 털로 온몸이 둘러싸여 있었고, 푸른색의 요요한 큰 눈을 가졌다.

눈은 마치 커다란 보석같이 영롱하게 빛나 자세히 바라보면 순식간에 홀릴 것만 같았다. 작은 토끼 귀처럼 생긴 귀는 기분이 좋은 듯 번갈아 가며 마구 팔락거렸고 작게 돋아난 꼬리는 앙증맞게 살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룬이 투덜대듯 말했다.

“저 녀석은 계속 봐도 정이 안 들어.”

룬의 말에 랄프가 아랑곳하지 않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너무 신기합니다! 르베나 경의 마력을 저장했다가 전투 때마다 거의 무한으로 되돌려 주는 전설 속의 나팅이라니! 게다가 르베나 경 말고는 누구의 말도 안 듣지 않습니까!

저는 볼 때마다 신화를 마주하는 기분입니다!”

랄프가 선망의 눈으로 르베나를 보는 순간, 르베나를 보고 반가움을 표현하던 나팅이 르베나의 얼굴로 올라와 제 부드러운 털을 마구 문질러댔다.

이에 살짝 미소 지은 르베나가 나팅에게 말했다.

“간지러워. 팅, 그만해.”

르베나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자 팅이라 불린 그것이 더 신나 하며 르베나의 머리 위로 쪼르르 올라갔다. 그러고는 르베나의 정수리에 올라간 후 미끄럼틀을 타듯 새카만 머리카락을 타고 어깨로 내려오자 르베나의 머리를 묶었던 끈이 탁, 소리와 함께 풀려 버렸다.

그와 함께 르베나의 검은 머리칼이 풍성하게 흐트러지자 팅은 티잉…! 소리를 내며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팅의 애교에 웃음이 터진 르베나가 풋, 하고 웃은 순간 기사들의 입에서는 어디가 뚫린 것처럼 마시던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될 만큼 매혹적인 르베나의 모습에 매일 함께 구르고 땀을 흘린 기사들마저 이렇게 정신을 놓을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평상시 도도한 표정의 르베나가 한 번씩 미소라도 지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녀를 마성의 공주라고 부를까?

“팅, 이제 그만해.”

순간,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르베나의 머릿속에 큰 손이 부드럽게 쑤욱 들어왔다.

그리고 ‘티잇…!’ 하는 짜증스러운 소리와 함께 남성의 길고 단단한 엄지와 검지에 팅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큰 손가락에 붙잡혀 큰 눈망울로 자기를 잡은 손의 주인, 아를을 노려보던 팅이 놓으라는 듯 좌우로 몸을 흔들었으나 강인한 그의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금세 포기한 팅이 추욱 몸은 늘어뜨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의 구세주, 르베나를 쳐다보았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살짝 흔들리자 아를이 곧바로 차갑게 얘기했다.

“네가 자꾸 봐주니까 이게 버릇없이 구는 거야. 그러니까 그… 머리부터 좀 묶어. 그럼 돌려줄 테니까.”

아를의 차가운 말에 르베나가 잠시 고민하다가는 다시 머리를 묶었다.

르베나만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팅은 자주 기사단의 훈련장에서도 말썽을 부렸다.

고집불통 작은 녀석은 잘 잡히지도 않았고 르베나의 마력을 먹고 자라는 만큼 약간의 마법도 부릴 줄 알아 마음에 안 드는 기사들에게는 짜릿한 전기의 맛도 보여주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르베나가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하다는 약점(?)을 알고 나서는 곧잘 이런 식으로 상황을 벗어나고는 했다.

“무례하게 굴지 마라, 팅.”

하지만 아를한테 잡혔을 때만은 예외였다. 아를은 팅이 난리를 쳐도 절대 놔주지 않았고 르베나가 데려가려고 해도 놔주지 않았다. 르베나 역시 팅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경우를 알고 있기에 팅에 대해서는 아를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고.

곧 르베나가 머리를 묶자 기사들이 아쉬운 듯 눈을 돌렸고 이를 슬쩍 본 아를이 팅을 던지듯 르베나에게 건넸다.

얼핏 보기에는 던지는 것 같아도 아를도 팅이 다치지 않게 조심한다는 걸 알았기에 르베나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팅은 무서웠다는 듯, 르베나의 가슴팍에 과장되게 제 털을 비비며 안겨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몰랐다. 그 순간 안쓰럽고 가련하기만 한 팅이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어느 순간 아를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르베나의 풍성한 가슴팍 사이에 자리 잡은 팅의 큰 눈이 아를과 마주치자 팅의 입꼬리가 옆으로 스륵 올라갔다는 사실도.

씨익.

분명 팅의 표정을 표현하자면 저 두 마디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를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살기가 불타오르는 것을… 르베나는 오늘도 미처 알지 못했다.

“모두들 수고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어.”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의 앞에 다한과 아를, 르베나가 앉았다. 모두 성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제노스 왕의 부름에 자리한 것이다. 왕의 시종 크론은 언제나처럼 따뜻한 차와 간식을 두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제노스 왕의 말에 다한이 뿌듯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르베나 경과 아를 경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아니라면 매번 일주일씩 걸리는 와이번 소탕을 3일만에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디오니스 내에서의 와이번 소탕은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었다. 와이번들은 왕국의 경계에 해당하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긴 하지만 식량이 모자라는 겨울을 앞두고 곧잘 근처의 마을을 습격했다. 해서 디오니스의 기사단은 매해 가을이 되면 와이번 둥지를 습격해 개체 수를 반 이상으로 줄여 놓았다.

다한의 말에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의 얼굴에도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곧 메이슨 공작이 조금 신난 듯 제 아들 아를에게 물었다.

“아를, 이번에 몇 마리를 잡았냐? 르베나 경 보다는 많이 잡았겠지.”

메이슨 공작의 말에 아를의 금빛 눈이 의문을 담고 향하자 곧 제노스 왕이 이에 질세라 르베나에게 물었다.

“르베나, 너는 몇 마리나 잡았냐? 분명 아를 경보다 많이 잡았지? 아니 저 공작 놈 말로는 제 아들놈이 너보다 더 많이 잡았을 거라지 않냐!”

제노스 왕의 말에 메이슨 공작이 발끈하듯 말했다.

“아니! 아를이 어떤 기사인데! 게다가 우리 메이슨가가 어떤 가문인데! 당연히 여성인 르베나 경보다는 많이 잡았겠지… 요! 폐하.”

메이슨 공작의 말에 이번에는 제노스 왕이 흥분하듯 말했다.

“무슨 말인가, 메이슨 공작! 우리 르베나는 뛰어난 검술은 물론 마력까지 갖춘 베이라이네! 게다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못 본 검기라는 것을 사용하는 기사란 말이다!”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의 자식과 손녀 자랑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 시작이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를 중재하는 건 크론이었다.

“세 기사분이 많이 피곤하실 테니 얼른 본론을 꺼내시지요.”

두 사람의 유치한 대결을 말리는 크론의 말에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이 민망한 듯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차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는 어느새 따뜻한 녹안을 빛내는 제노스가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르베나, 오늘 유파시드께서 디오니스에 오셨다.”

제노스 왕의 말에 르베나가 놀란 듯 찻잔을 조금 서둘러 내려 놓았다.

“유파시드께서요? 예고도 없이 어쩐 일로…….”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 왕이 고민하듯 메이슨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년 전 귀족회의 이후 그동안 제노스 왕의 행실에 대해 이해하게 된 메이슨 공작은 다시 제노스 왕을 찾았고 둘은 몇 날 며칠 동안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

그리고 지금은 왕과 재상으로써 다시 돈독한 사이로 돌아와 정사와 우정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런 메이슨 공작과의 상의를 떠올린 제노스 왕이 르베나와 다한, 아를을 보며 말했다.

“유파시드께서 검기란 것에 대해 들으신 모양이더구나. 혹시 그 검기란 것을 제국과 왕국을 위해 쓸 수 있겠냐 물으러 오셨단다.”

순간 제노스 왕의 말에 방안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검기.

그것은 르베나가 고안한 기상천외한 방법의 마법이자 검술이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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