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1)
태초에 신에게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존재는 단둘.
이 세상에는 오직 신과 그들만이 존재하였다. 그들은 형체도 모양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그들은 존재하였고, 신은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의 가장 사랑하는 마음으로 빚어낸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신은 이들을 위한 새로운 세계를 지어주고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신의 존재가 없는 곳에서 그들끼리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던 신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이 세상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세츠’와 ‘베이라’의 시작이다.
-‘세상의 시작’ 발췌 中-
* * *
끼이익---.
고막을 찢을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주변에 강풍을 일으킬 정도의 거친 날개 짓이 매서운 흙바람을 휘날렸다.
“젠장, 거친 놈이네.”
짧게 거친 말을 내뱉은 남성이 본인의 검에 채 마르지 않은 녹색 피를 떨쳐내며 자세를 잡았다.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고 선명한 금안이 빛을 냈다.
촤악…! 파삭……!
끼이이이익------!
남성의 검에서 그의 눈을 닮은 금색의 작은 마력이 직선의 모습으로 뻗어나갔다.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간 직선의 마력은 곧 와이번의 한쪽 날개를 깨끗하게 잘라 버렸고,
이에 와이번은 고막을 찢는 듯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쿵, 바닥에 처박혔다.
그때, 바닥에 처박혀서도 한쪽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연신 입에서 산성의 독을 내뿜는 와이번을 향해 은색의 빛이 쇄도했다. 와이번에게 다가가던 남성의 눈이 자연스레 새로 나타난 은색의 빛을 쫓는 순간이었다.
유연하게 휘어진 몸은 와이번이 뱉어내는 독을 여유롭게 피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휘어진 몸. 그 휘어진 몸의 곡선은 유려했고 아름다웠으며 매혹적이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는 바닥을 향했고 은색의 빛을 만들어내는 유려한 검을 든 그녀의 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정확히 와이번의 약점인 목을 베어낸 순간 채 소리도 내지 못한 와이번의 머리가 땅에 툭, 떨어졌다. 그것을 무감각한 붉은 눈으로 바라본 그녀가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오는 흑발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마력이 충분히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쐈잖아, 아를.”
그녀의 말에 그, 아를이 손에 쥔 검을 한번 슬쩍 보고는 말했다.
“녀석이 생각보다 빨라서 마음이 좀 급했어. 그보다 저쪽은 다 처리 한 거야? 르베나.”
아를의 말에 그녀, 르베나의 눈이 오른쪽을 향했다. 아를 역시 르베나의 눈을 쫓아갔다.
그곳에는 수십 구의 와이번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와이번들을 해치웠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피식 작게 웃은 아를이 말했다.
“역시 차기 기사단장이십니다.”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와이번 둥지를 다 털려면 빨리 해야 했으니까. 그보다 저쪽은 아직 멀었나.”
르베나의 얼굴이 저 멀리 허공에 모여 있는 와이번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곧 울창한 숲의 하늘에서 좁은 틈을 통해 비친 빛이 그녀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제국력 921년.
젠이 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시간의 표기는 모두 왕국력에서 제국력으로 바뀌었다.
다만 그동안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젠의 황제, 루드바하는 년도를 왕국력에서 계속 이어 쓸 것을 선포했다.
또한 르베나가 디오니스의 왕족과 귀족들의 앞에서 기사가 될 것을 선포한 지도 이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르베나의 나이도 열아홉 살이 된 것이다.
하나로 묶인 머리는 격동적인 움직임에 의해 조금은 흐트러져 있었다.
작고 흰 얼굴은 약간의 땀이 맺힌 채로 뺨만 붉게 물들어 그녀의 얼굴을 더 생동감 있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붉고 선명한 눈은 먼 곳의 와이번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눈이 제게로 향하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은 숨 쉬는 것을 잊을 만큼 매혹적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굴곡지고 매혹적인 르베나의 몸.
어느새 디오니스 최고의 미인이라는 타이틀을 본의 아니게 쥐게 된 르베나의 모습은 평범한 기사복조차 매혹적이고 숨 막혀 보이게 했다.
심지어 르베나가 기사가 된 이후 몇몇 귀족 여성들은 사냥터에 기사단의 기사복과 비슷한 옷을 주문해 입고 나오기도 했으니.
그 순간 멀리서 마력 확성기를 통한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다.
“르베나 경, 아를 경! 방금 죽이신 게 와이번들의 리더인 모양입니다. 갑자기 모두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빨리 이동할 테니, 그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이만!”
마력 확성기의 소리를 들은 아를이 르베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왜 랄프의 목소리가 신나게 들리지.”
아를의 말에 덩달아 피식 웃은 르베나가 말했다.
“첫 견습 치고 와이번은 좀 힘들긴 하지.”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드드득 소리와 함께 하늘이 어둡게 물들었다. 수백 마리의 와이번 떼가 하늘을 모두 가리며 허공 위를 둥글게 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리더를 죽인 르베나와 아를을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빛내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르베나와 아를은 웃는 표정을 순식간에 완벽히 지운 채 각자의 검을 치켜 들었다. 와이번 둥지의 소탕 작전은 지금부터였다.
* * *
“오랜만에 뵙는 군요, 유파시드여.”
건넨 인사말에 차분하고 기분 좋은 음성이 깊은 울림으로 되돌아왔다.
“건강한 모습을 뵈니 좋군요, 디오니스의 왕, 제노스.”
디오니스 왕궁, 제노스 왕의 접견실 안.
젠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리더인 루드바하와 디오니스의 제노스 왕이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루드바하의 눈이 무례하지 않게 제노스를 훑었다.
건강해 보이는 얼굴. 총명함과 카리스마로 빛나는 녹안. 숨길 마음 따위 없이 몸 전체를 유유히 돌고 있는 건강한 마력.
미소를 지어보인 루드바하가 제노스에게 짐짓 짓궂게 말했다.
“이제 베이라인 건 비밀이 아닌 건가요.”
루드바하의 말에 제노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비밀을 지키려 하는 것이 더 우습죠. 하하. 그리고 이 년 전에는… 큰 빚을 졌습니다, 유사피드여.”
제노스 왕이 말을 함과 동시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 말에 루드바하의 얼굴에도 덩달아 씁쓸한 빛이 어렸다.
이 년 전. 디오니스에는 피의 바람이 귀족들을 온통 헤집어 놨다.
후벤의 주도와 루드바하를 위시한 젠의 전폭적인 지지로 조사된 르베나 살해 청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귀족들이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력과 왕권이 약해진 디오니스의 힘만으로는 처단하기 어려울 만큼의 숫자였다.
그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면 단숨에 왕궁이 뒤집어질 수 있을 만큼의 숫자.
그리고 같은 시기.
“세상의 모든 올바른 뜻을 펼치는 베이라는 세츠와 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젠 제국의 황제이자 유파시드로서의 제 방침입니다.”
제국으로의 선포를 마친 루드바하의 첫 행보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신마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왕국들의 지원을 약속했고 그 첫 번째가 바로 디오니스였다.
한순간에 제국이 디오니스 왕국, 특히 르베나와 제노스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귀족들은 모두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나르의 동생인 한슨 경은 바로 4, 5, 6 기사단장에서 해임되었고 후벤이 모든 기사단의 총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살려주시오! 나는 루치아가와 관련이 없소!”
“제발 우리 가문만은… 우리 가문만은…!”
그렇게 르베나의 살해 청탁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이들은 모두 재산과 직위를 박탈당했으며 직접적으로 관여한 귀족들은 그들의 진득한 피로 그들의 잘못을 갚아야 했다.
세나르는 왕비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성에서 평생을 갇혀 사는 벌을 받게 되었으며, 루치아 공작 역시 모든 재산과 직위가 박탈되었다.
원래는 사형에 처해져야 할 세나르 왕비는 드록 왕자의 생모라는 것이 참작되어 그 벌이 평생 유예로 그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아무런 혐의도 없는 드록 왕자는 겨우 궁에 남게 되었으나, 생모인 세나르 왕비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므로 왕위계승권의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 이후 제노스 왕은 스스로 베이라임을 숨기지 않으며 크론과 함께, 때때로 마법의 힘을 빌려 디오니스를 다스려 나갔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선한 베이라의 힘을 존중한다고 선포한 루드바하의 덕분임을 모르지 않았다.
곧 루드바하가 제노스 왕을 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디오니스와 상관없이 평소 제 소신을 말한 것뿐입니다. 제노스 왕께서도 아시겠지요.
신력과 마력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신력을 타고났다하여 존중을 받고 마력을 타고났다하여 핍박을 받는 세상은 제가 원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선악 그리고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에 따라 구별되어야 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제노스 왕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루드바하가 마치 이제 생각이 났다는 듯 호기심을 담을 눈을 반짝였다.
“아, 르베나 공주는 외궁에 없는 듯한데. 혹시 기사단 연습장에 있습니까?
그나저나 이제는 르베나 경이라고 불러야 하겠죠.”
루드바하의 말에 제노스 왕의 얼굴에 한순간 가릴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이 가득 묻어나왔다.
“하하… 맞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그 아이를 경이라 부릅니다.”
따뜻함을 가득 머금은 그의 녹안이 밝은 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우리 르베나 경께서는 지금 기사단과 함께 와이번 둥지를 소탕하러 갔습니다.”
제노스 왕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에 찰나의 순간 아쉬움이 어렸다. 그러고는 호수처럼 깊은 그의 눈이 제노스 방에 나 있는 큰 창을 향했다.
창문 저 너머, 푸르게 우거진 먼 숲 속.
그 어딘가에서 붉은 눈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