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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왕녀, 르베나-51화 (51/276)

51화

제1장 디오니스 외전 : 제노스 이야기 (4)

그렇게 모든 디오니스는 그와 르베나를 잊어 갔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무는 시종장 크론만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폐하. 잘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르베나 공주님을 지키기로 결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크론… 나는… 나는 정말… 실패한 왕이고 실패한 남편이자 실패한 아빠다. 하지만 실패한 할아버지만큼은 되고 싶지가 않았네. 하지만 내가 외면하게 된 수많은 백성들은… 그들은…….”

괴로워하는 제노스를 보며 시종장, 크론이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십 년. 딱 십 년만 지나면 르베나 공주님도 괜찮아지실 겁니다. 혼인을 하셔서 지켜 줄 가문이 생기거나 정식으로 마력을 훈련해 베이라로써의 힘을 기르면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해지시겠죠. 딱 그때까지입니다, 폐하. 다행히 아직까지 마력의 반응은 없으니 공주님의 신변에 큰 이상은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크론의 말에 제노스의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디오니스 왕궁에 베이라는 없다 하였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노스 왕과 그의 시종장 크론은 베이라였다. 그들은 르베나의 신변에 큰 이상이 있을 때 봉인이 깨진다는 사실을 알고 봉인이 깨지면 즉각 그들에게 발현되는 마법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그 마법이 발현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제노스 왕은 르베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왕의 위상. 정치적 힘과 권력. 사람들의 무시와 험담.

하지만 그는 그 대가로 르베나의 안전을 얻었다. 그래서 충분하다 여겼다.

그의 사랑스러운 손녀, 르베나가 부디 무사하기만 하다면. 그는 그걸로 감사했다.

그렇게 5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후벤 경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르베나가 학대를 당하는 것 같다며 조사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제노스 왕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무감각한 어조로 그에게 허락을 했다. 후벤 경이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심한 왕의 자리를 지켜냈다.

달칵.

하지만 후벤 경이 방을 나서는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의 몸은 휘청 일 정도의 충격과 고통으로 떨려왔다.

세나르가 르베나를 괴롭힌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았다. 종종 교육을 목적으로 한 꾸지람 정도라도 들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학대 수준의 괴롭힘이라니……!! 단순한 훈육이 아니라 학대라니……!

제노스의 온몸이 더없는 분노로 떨려왔다. 그 말을 들은 시종장 크론 역시 분노로 떨며 차라리 자기를 보내 달라 간곡히 청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었다. 아니, 크론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서 그 시녀들과 배후인 세나르의 가문을 모두 몰살시켜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노스는 나설 수 없었다. 그것은 제노스의 이름으로 한 언약. 르베나가 적어도 성인이 되어 안전해질 때까지는 공주라는 칭호를 달고 성 안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봉인이 깨져도 그나 크론이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르베나의 안전을 위한 거래와 약속. 그는 그것만을 되뇌었다.

들이 르베나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이상 그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 배후가 드러난다면 절대 가만 놔두지 않겠다 이를 갈며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어냈다.

“르베나 공주님 환후의 원인은 단순한 훈육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친 학대입니다. 그로 인해 공주님의 성장 역시 또래보다 월등히 떨어져 계십니다!!”

후벤과 사나를 통해 르베나는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귀족회의를 통해 드러난 르베나의 외궁살이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했고 고통스러웠다.

이후 제노스 왕은 매일 밤 르베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르베나가 당했을 고통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절대 세나르를 용서하지 않겠다 끊임없이 되새기며 마음먹었다.

하지만 세나르 쪽은 언제나처럼 금방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버렸다.

아직 르베나의 나이 열 살.

르베나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역시 인내할 시간이 딱 그만큼 더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건은 모두에게 아픔이 되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르베나의 곁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후벤과 사나. 제노스가 마음 놓고 르베나를 맡길 수 있는 이들.

이제 그들이 르베나를 지켜줄 것이다. 제노스가 지키는 것이 르베나의 생명이라면 그들은 르베나를 불안과 고통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지켜줄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제노스 왕은 지옥 같은 매일을 살아낼 수 있었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늦은 밤. 여느 날처럼 언젠가 다시 찾아올 권력을 위해 제노스 왕은 귀족회의에서 눈여겨 보았던 안건들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이제 어차피 모든 결정은 루치아 공작이 하게 되겠지만, 르베나의 안전이 확실해지면 그는 베이라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디오니스의 비리 귀족들을 척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날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남몰래 일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매일 밤 현재 정치의 흐름과 그가 주시해야 할 귀족과 나중에 중용해야 할 귀족들의 명단을 추리고 안건들을 검토했다. 여느 날처럼 그날도 늦은 시간의 업무로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힘에, 그 기시감에 그가 손에 쥐었던 만년필을 떨어트렸다.

언젠가 느껴보았던 힘. 강하고 따뜻하면서도 올곧은 힘.

“아아… 르베나……. 아아, 르… 베나… 나의… 손녀…….”

시간을 돌아 다시 돌아온 르베나가 열다섯 살의 어느 날. 본인의 마력을 모두 콘트롤하게 된 그 어느 날 밤. 한순간 폭사해 나간 그녀의 마력을 제노스 왕이 느낀 것이다.

동시에 그의 눈가가 벌게졌고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밖에 있던 크론이 서둘러 문을 열며 들어왔다.

“폐하, 방금……!!”

상기된 듯한 크론의 표정에 제노스 왕이 가볍게 그리고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론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이제 고작 열다섯 살에 이런 마력과 이런 제어라니……! 르베나 님은… 공주님은 정말……!! 흑…….”

말을 하던 크론 역시도 눈가도 벌게졌다.

혼자서 그 모든 고통과 외로움을 홀로 견뎠을 어린 공주였다. 누군가 필사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자신을 지킨다는 사실도 모르고 한없는 어둠 속을 혼자 걸었을 것이다.

그런 공주가, 그런 르베나가 이제 그 어둠을 찢고 나왔다. 스스로 봉인을 깨고 제 마력을 휘어잡았다. 더 이상 공주의 마력이 그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게 된 것이다!!

크게 기뻐하는 크론을 보며 제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집무실의 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의 창 가득 들어오는 작은 불빛이 켜진 어느 궁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너를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 그 모든 역경을 이기고… 그 마력들을 네 것으로 만들었구나! 장하다… 장하다, 르베나… 우리 아기… 너무도 장하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그 옆에 함께해 주지 못해서. 지금 느낄 너의 기쁨을… 함께해 주지 못해서…….”

그날 밤은 그에게 유난히도 길었던… 하지만 유난히도 기뻤던… 또 그만큼 슬픈 날이었다.

* * *

제노스 왕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언제나 유지하던 르베나의 무표정이 무참히 흔들렸다.

처음 듣는 그의 이야기에는 르베나가 어릴 적 그토록 갈구했던 넘치는 사랑이 가득했고, 르베나가 이전의 삶에서 도저히 놓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어린 손녀를 위해 한 번에 놓아 버렸던 그의 희생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는 이 오랜 시간. 아니 이전 삶의 르베나가 그 모든 순간을 지나칠 때마저 이 모든 것을 털어 놓지 않았다.

“어째서……?”

뒷 말이 없는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 왕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맺혔다.

“나는 필사적이었단다. 이미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었고 겨우 내 마음에 담은 내 손녀는 더없이 소중했지. 그런 너에게서 마력은 너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였고 출궁은 너를 뒤흔들 어둠의 소굴이었다. 궁 안에 두면서도 너를 지키는 방법을… 미련했던 나는… 그때의 나는 … 이것 말고는 알지 못했단다.”

제노스 왕의 말을 듣자 르베나는 순간 지나쳐 온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르베나 정도의 마력이 좀 더 어린 나이에 발현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 이전의 삶에서 사나의 죽음을 통해 마치 그동안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폭사했던 마력. 그리고 제노스 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좌를 차지한 르베나를 방관하던 제노스. 이번 귀족회의에서 그가 세나르를 향해 던진 말까지도……!

모든 게 그의 말대로라면 맞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그렇게 그녀를 아낀다면서, 사랑한다면서, 그의 모든 것을 그녀를 위해 내려놓았다면서.

그는 왜 이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을까?

마치 르베나의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제노스 왕은 말을 이었다.

“시간을 다시 돌린다면… 다른 방법으로 널 지켜주고 싶단다. 어린 널 외궁으로 보내지 않도록. 그들이 널 학대… 하지 않도록. 네가 어릴 적 그 미소를 잊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나는 실패한 것 같다. 아비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왕으로서도. 또… 할아버지로서도.”

그의 표정에는 온통 후회와 괴로움, 죄책감뿐이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어느 과거의 시점에서 홀로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르베나는 그가 미웠다. 언제나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그 얼굴도. 제 핏줄을 돌보지 않는 그 무책임함도. 왕으로서 백성을 살피지 않는 뻔뻔함도. 그 무엇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어째서 이전의 삶, 죽기 전의 제노스 왕이 르베나를 불렀던 일이 생각날까?

생전 제 왕위를 차지하고 왕실을 박살 낸 르베나를 찾지도 않던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죽음이 드리운 그의 앞에 무심히 서 있는 그녀를 이미 어두워진 녹안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안 됐구나, 안 됐어……. 참… 안타… 깝다.”

그때는 그게 르베나를 조롱하고 그녀의 작태를 비난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르베나는 알 것 같다. 그때 그의 눈빛이 어땠는지.

제노스의 마지막 눈빛은 전장에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자들의 눈빛이었다.

사랑하는 동료가 죽고 사랑하는 백성들이 죽고 그들을 지키지 못했던 기사단과 후벤 그리고 가스트의 마지막 눈빛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야만 하는 이의 눈빛이었다.

르베나는 그제야 제노스 왕이 외로웠을 마지막 순간까지 르베나를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죽어 갔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르베나의 보호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 한 것이리라.

르베나가 앞을 보았다. 그곳엔 제노스 왕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 언제나와 같은 눈빛에 담긴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그 눈빛으로 말이다.

르베나가 에메랄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상관… 없지 않을까요. 폐하의 목적대로 저는 안전하게 컸고 이제는 저를 지킬 힘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은데… 폐하께서 다스릴 디오니스는 여전히 여기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

비난과 책망. 고함과 눈물. 무시와 악담.

그 어떤 것도 각오하던 제노스 왕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담겼다. 그런 그의 표정을 확인한 르베나가 아주 조금은, 정말 조금은 미소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닮은 구석이 있긴 하네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

제 말을 마치고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르베나를 제노스 왕이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찻잔으로 가려진 사랑스러운 손녀의 작은 얼굴 옆, 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화해와 용서.

지금 그가 생각한 것이 맞다면 르베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그의 손녀가. 아마도 절대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하리라 믿었던 그 한 사람이.

그와 닮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아마 보게 된다면 누구보다 감정이 가득할 눈빛을 하고서. 곧이어 그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고는 환한 미소가 남은 자리를 차지해 나갔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구나. 내가 사랑할 디오니스도. 그리고… 너도. 여기 이렇게 있으니.”

주책 맞게도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서둘러 제노스가 제 앞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마주 앉은 가족은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찻잔으로 가렸다. 그리고 찻잔 옆 발갛게 달아오른 그들의 귀와 따뜻한 잔을 쥐고있는 오랜 세월을 담은 손만이 고요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런 그들을 포근한 미소로 바라보던 크론은 벌게진 눈가로 그들에게 다가가 비워진 티 포트를 가득 채웠다.

비워진 티 포트를 다시 따뜻한 물로 채우기에, 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으므로.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1장 디오니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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