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50화 (50/276)

50화

제1장 디오니스 외전 : 제노스 이야기 (3)

며칠 후, 루치아 공작 일당의 갑작스러운 태세 변화로 르베나는 왕가 인명에 공주로 정식 입적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노스 왕은 르베나 공주의 거처를 외궁으로 옮기라 명하였다.

“폐하, 정말 옳은 결정이시옵니다. 이 세나르가 르베나 공주를 딸처럼 보살필 것이오니 아무 염려 마세요.”

웃으며 말하는 세나르를 보며 제노스 왕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세나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얼마 후, 창가에 선 제노스의 손에 시녀들의 손을 잡고 외궁으로 향하는 작은 르베나가 보였다.

“이게 너를 지킬 방도이니… 못난 할아버지를 이해해 주렴…….”

세나르와 거래를 하고 르베나를 외궁으로 보내기까지의 며칠. 이 며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중대한 결정이었으며 아마도 언젠가 큰 후회가 되어 돌아오리라 생각되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에 그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순간 본궁을 벗어나며 제노스의 방을 향해 뒤돌아본 르베나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래서였을까. 그 순진한 눈이, 작은 몸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 아이의의 작은 뒷모습이, 걸음마다 남기는 그 작은 발걸음이… 아주 오래도록 그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겨 버렸다.

* * *

그는 르베나의 마력을 처음 본 날, 곧바로 그의 마력으로 르베나의 마력을 눌러놓았다.

하지만 르베나의 마력이 워낙 강한지라 언제 다시 발현될지 몰랐다.

르베나의 나이 고작 다섯 살.

그조차도 오랜 시간 눌러놓을 수 없는 마력은 분명 아이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수소문 끝에 실력 있는 베이라 하나를 알게 되었고 르베나가 잠든 틈을 타 그에게 르베나의 마력을 봉인 해달라 부탁했다.

얼굴을 가린 베이라는 잠든 르베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왜 굳이… 마력을 봉인시키려 하십니까.”

물어오는 베이라에게 제노스가 괴로운 듯 말했다.

“아시지 않소. 이 나이에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게다가 이 아이는 아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오. 내가 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마력을 봉인하여 아이의 생명을 지키고 이 아이가 자립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이 궁 안에 두는 것뿐이오.”

제노스 왕의 말에 한동안 르베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르베나의 작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한순간 그에게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다가는 르베나의 몸속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그때 아주 잠깐, 어떤 가느다란 빛이 그에게로 흘러 들어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워낙 순식간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꽤 오랜 시간 잠든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이에 제노스 왕이 의아함을 느낄 때쯤, 그가 제노스 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의 육체가 마력에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아이의 신변에 큰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봉인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이 아이의 마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봉인을 했어도 소량의 마력은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봉인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극렬한 감정에 휘말려 폭주하게 될 경우에는… 봉인이 깨져 버리고 말 겁니다.”

그의 말에 제노스 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노스 왕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마지막으로 잠든 르베나를 다시 한번 흘끗 보고는 나타날 때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이후 몇 번이나 그를 찾아보았지만 제노스 왕은 그를 찾을 수도, 그를 처음 소개시켜 준 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다행히 르베나의 마력이 해결되자 제노스 왕은 곧바로 루치아 공작과 세나르를 불러 조건을 제시했다.

“르베나를 공주로 입적하게 도와주시게. 그렇다면 내…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주도록 하지.”

제노스 왕의 이야기에 세나르와 루치아 공작은 잠시 놀란 듯하였다. 그는 상당히 고지식하고, 세나르와 루치아 공작이 욕심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그들에게 일절의 타협도 제안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그들은 바로 다음 날 제노스를 찾아왔다.

“좋습니다, 폐하. 폐하의 부탁인데 저희가 어찌 이를 거스르겠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저희의 부탁은 이렇습니다. 음… 이제부터 르베나 공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나르 왕비님께 주십시오. 르베나가 공주가 되면 엄연히 세나르 왕비께서 어미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르베나 공주의 양육에 관해 어떠한 것도 왕비께 일임해 주십시오.”

루치아 공작의 말에 제노스가 아연한 듯 제 손을 눈가로 가져다 대었다.

제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손녀였다. 너무 늦게 알아 본 손녀였다. 이제는 그에게 이 디오니스보다도 더 소중해져 버린 혈육이었다.

그런 르베나를, 그런 그의 손녀를, 세나르가 어떻게 대할지 제노스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눈을 피해 다른 집에 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적어도 그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가문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는 그렇게 믿었다.

피곤한 듯 눈을 뜬 제노스가 말했다.

“좋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한 가지를 꼭 약속하게. 만약 세나르 왕비나 루치아 공작, 그대들이 르베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어떠한 행동을 한다면 이 약속은 곧바로 파기일세. 더불어 그대들은 그에 따른 마땅한 책임을 지게 될 걸세!”

제노스 왕의 말에 세나르 왕비가 화려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당연한 말씀을요, 폐하. 저는 성심성의껏 공주를 내 자식처럼 돌볼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도 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들의 못 믿을 계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세나르 왕비는 르베나의 거처를 다른 궁으로 옮기라 명했고, 그 장도는 본궁과는 떨어진 외궁으로 결정되었다.

* * *

잠시 그들과의 대화를 떠올린 제노스 왕이 이제는 멀어져 보이지도 않은 르베나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제는 보기도 힘들겠지. 너를 다시 안을 수도… 다시 하비라 불리지도 못하겠구나. 그리고 어쩌면 너는… 그곳에서…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들리지 않아도 부디 전해지기를 바라며.

“하지만 르베나 기억하렴. 그곳은… 그 외궁은… 루아나의 공간이자 너와 나의 공간이니. 분명 사랑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멀리서나마… 보이지 않아도 너를 사랑하는 혈육이 이 궁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 주렴… 이것이 너의 목숨을 보장받을 유일한 방법임이… 틀리지 않았기를…….”

그렇게 제노스 왕은 어린 르베나를 외궁으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던 제노스 왕의 정치 인생도 그 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루치아 공작과 세나르 왕비의 행동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사나를 외궁에 들이지 못하게 막고 세나르의 시녀들로 외궁을 가득 채웠다. 이어 제노스의 눈과 귀를 차단했고 훈육과 적응을 핑계로 제노스 왕을 비롯한 모두의 관심과 방문을 거절했다.

그리고 나아가 르베나를 핑계로 제노스의 입지를 점점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가! 루치아 공작.”

매서운 제노스 왕의 시선에 루치아 공작이 잠시 움찔하다가 다시 의연하게 제 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는 제 일을 할 뿐입니다, 폐하. 이 빈민가를 다 밀어 버리고 생활에 필요한 건물들을 지으면 백성들에게도 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루치아 공작은 고아들이 사는 지역을 모두 밀어 버리고 귀족들의 유흥가를 건설할 계획서를 들이밀었다. 분명 루치아 공작가에 연줄을 댄 어떤 귀족들이 참여할 사업일 것이다.

“그럼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겠나, 공작. 그들은 우리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분노한 제노스 왕의 강한 반발에 루치아 공작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망설이는 척 말을 이었다.

“당연히 저희의 백성이지요, 폐하. 그들은 곧바로 다른 시설로 보내질 것이니 조금도 염려치 마십시오… 아! 아이 얘기가 나와 말인데 이번에 르베나 공주가 크게 아팠다고 합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오니 아이들은 더 자주 아플 텐데… 참 걱정입니다. 폐하.”

루치아 공작의 말에 제노스 왕의 전신이 움찔하다가 곧바로 시리게 얼어붙었다.

“하하하 폐하, 그리 쳐다보시니 제가 무엇인가 못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전 그저 공주님의 상황을 전해드린 것뿐인데요. 오늘은 심기가 불편하신 듯하니 이 안건은 내일 귀족회의에서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루치아 공작은 시리게 얼어붙은 제노스 왕을 감상하듯 한번 보고는 유유히 방을 나섰다.

그런 루치아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던 제노스 왕이 그가 나감과 동시에 옆에 있던 유리잔을 집어 방문을 향해 던져 버렸다.

꽝, 쨍그랑……!

“폐하…….”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시종장이 말없이 사람을 불러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 했다.

평생 제노스 왕을 모셔온 시종장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제노스 왕을 바라보았다.

벌써 몇 번째이던가……!

루치아 공작 일당은 이런 식으로 매번 그들의 왕을 협박했다.

처음 제노스 왕은 당연히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안건들을 모두 반려시켜 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루치아 공작의 안건을 반려시킬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곳에서 끔찍한 보복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기가 막히게도 루치아 공작의 안건을 제노스 왕이 거절할 때마다 르베나가 크게 앓거나 아팠던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노스 왕은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궁인들이 조금씩 르베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단 소문까지 듣게 되었다.

르베나의 투병 소식과 르베나에 대한 궁인들의 태도가 차가워질수록 제노스 왕은 번민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리고 결국 하나둘씩 루치아 공작의 안건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로 벌써 여러 번 메이슨 공작과도 큰 소리가 오고 갔다.

그는 백성들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루치아 공작의 안건이 제노스 왕의 찬성으로 번번이 통과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었고, 점점 더 제노스 왕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제노스 왕은 제 오랜 친구이자 오래된 공작가의 가주가 제게 실망하며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디오니스의 수많은 백성들보다 하나 남은 자신의 손녀를 택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왕좌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 지독히도 끔찍한 죄악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르베나를 완벽히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 또한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지금. 제노스 왕의 권세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나라의 정치는 루치아 공작 일당의 손안에 떨어졌으며 메이슨 공작은 더 이상 제노스 왕에게 발걸음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왕이 아직도 루아나 공주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르베나를 무시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냐 속닥거렸다.

그리고 궁인들은 점점 르베나를 잊어 갔고 덩달아 제노스 왕의 위세도 그렇게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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