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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왕녀, 르베나-49화 (49/276)

49화

제1장 디오니스 외전 : 제노스 이야기 (2)

이후 제노스 왕은 종종 어린 르베나를 보러 갔다.

보면 볼수록 놀랍게도 정말이지 르베나는 루아나의 그 어떤 것도 닮아있지 않았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루아나와 왕비의 밀빛 머리도, 반짝이며 빛나던 루아나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도.

무엇하나 말이다.

하지만.

“아부? 아부부! 맘마!!”

제노스 왕만 보면 맘마를 찾으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그의 손녀는 루아나의 미소를 아주 쏙 빼어 닮았다. 그가 무뚝뚝한 눈으로 쓰윽 쳐다보면 뭘 알기라도 한다는 듯 방긋 미소 짓는 모습이 그의 책상 위 얹어져있는 루아나의 미소 그대로였다.

그래서 한번씩.

죽은 루아나가, 죽은 왕비가 그리울 때 그는 르베나를 찾았다. 어린 르베나가 한 번씩 방싯 웃으면 그가 사랑했던 그녀들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번씩 찾게 된 어린 르베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덧 그에게 일과가 되었고

르베나에게서 다른 이를 찾던 제노스 왕은 어느덧 르베나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손녀는 보면 볼수록 참 영특했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어린 르베나에 대한 애정을 느낄수록 결코 루아나에게서 태어난 게 르베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오랜 시간 그것을 외면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또한 루아나와 왕비를 보낸 잘못을, 실수를, 르베나에겐 되풀이 하지 말자 수없이 다짐하게 되었다.

“넌 내게 마지막 기회이고 깨달음이다, 르베나.”

그런 마음이 생기자 그는 르베나를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이 소중한 혈육만큼은 상처없이 오래도록 제가 지켜주겠다 제노스는 매일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비록 세나르가 이를 질투하고 견제하는 것은 알았지만 지켜줄 수 있었다.

이번 만큼은. 르베나만큼은.

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부쩍 말을 배우는 르베나는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일을 처리하다가도 르베나가 생각나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날들이 부쩍 많아진 것이다.

결국 평소보다 빨리 일을 마치고 제 손녀가 오늘은 또 어떤 말을 들려줄지 궁금한 그의 발걸음이 여느때보다 빨라졌다. 그의 빠른 걸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시종시녀들도 연신 미소를 띄며 그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르베나 덕분에 기운을 차린 그들의 왕은 조금씩 다시 국사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루아나가 죽고 제노스 왕이 국사를 놓은 일 년이 조금 지난 기간 동안 세나르를 위시한 루치아 공작의 세력이 커지긴 했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변화를 가져다 준 르베나는 온 디오니스의 보물이었고 감사함 그 자체였다.

어느새 그의 조급한 걸음이 르베나의 방 앞에 닿았다. 처음 르베나를 만난 날 제노스는 르베나의 방을 생전 왕비가 쓰던 방 중의 하나로 바꾸라 명하였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집무실에서 가까운 이 방이 그는 퍽 마음에 든다 생각했다. 르베나를 돌보던 사나가 제노스 왕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제노스는 언제나처럼 그를 보자마자 빠르게 아장아장 걸어오는 르베나를 번쩍 안아주었다.

“…꺄아!!”

제노스 왕의 품이 좋아 방싯 웃는 르베나를 따라 어느새 그의 입가에도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르베나, 오늘은 어떤 말을 배웠니? 이 할아버지한테 보여줄까?”

제노스 왕이 웃으며 말하자 르베나가 알아듣는 것 처럼 큰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는 그의 머리칼을 한손으로 움켜잡으며 말했다.

“하비… 하비!!!”

르베나가 제노스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하자 제노스 왕의 입에서 큰 웃음소리가 나왔다.

“하하핫. 하비? 나를 부르는 것이냐? 이 할아버지를 말이냐? 하하하.”

아마도 사나의 특훈 덕분이겠지만 이제 르베나가 그를 부를 수 있다니!!

이 순간 제노스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제노스 왕은 곧바로 남은 시녀들마저 모두 물렸다. 그리고 르베나와 둘만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자신의 손녀에게 말했다.

“르베나, 이 할아버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단다. 너의 엄마와 할머니만 아는 비밀이지……! 오늘 우리 르베나가 이 할아버지를 불러 주었으니, 할아버지도 르베나에게 선물로 이걸 보여 줘야겠구나!”

바닥에 앉히자 가만히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안아 달라 계속 손을 뻗는 르베나가 보였다. 이를 보고 환하게 웃은 제노스가 손가락으로 멀리 있던 르베나의 장난감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집중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르베나의 장난감이 르베나의 손 안에 툭,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비?”

이에 눈을 동그랗게 뜬 르베나가 다시 하라는 듯 손을 까딱하자 껄껄 웃은 제노스가 몇 번이고 반복하여 그것을 보여주었다. 얼마간 반복하고 르베나가 충분히 웃는 걸 본 그는 르베나를 다시 품에 소중히 안아 들고 아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르베나, 우리 디오니스의 왕족은 대대로 큰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단다. 그것으로 여지껏 귀족들과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왔지.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왕가는 이 사실을 숨기고 더 나아가 왕이 베이라로 태어나면 그 사실조차 숨겼단다.”

그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배었다.

“지키는 힘, 왕가의 마력이 단순한 권력과 누군가를 이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왕가가 타고나는 강력한 마력이 귀족들에게 큰 불안감을 심어 주기 때문이기도 했지.”

어딘가 자조 섞인 말은 조용조용히 계속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힘을 숨기고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모습을 감추며 백성들을 지켜왔단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네 엄마인 루아나는 마력을 전혀 타고나지 않았지. 그래서 루아나가 많이 속상해했지만… 어쩌면 르베나. 그건 널 위해서일지도 모르겠구나.”

제노스 왕의 말에 그의 품에 안긴 르베나가 졸린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고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제노스가 제 크고 투박한 손으로 르베나의 가슴팍을 조심조심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 만약 디오니스의 왕족에 베이라가 태어난다면…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은… 너무 무거우니 말이다.”

제노스 왕의 작은 말소리에 르베나는 곧 잠이 들어 버렸다. 잠든 르베나를 보며 제노스 왕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 널 위해서였나보다. 루아나가 마력을 타고나지 않은 건. 이렇게 소중한 널.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널.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넣지 않으려는… 신의 배려를 받았던 게로구나’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제노스 왕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나아가 그렇게 지키겠노라 마음먹었던 르베나를 지키는 방법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란 불안함이 그들에게 큰 폭풍의 모습으로 들이닥치리란 사실도.

르베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제 엄마 루아나를 꼭 빼닮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아이는 온 궁인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그리고 사건은 르베나가 다섯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벌어졌다.

회의실에서 귀족들과 회의를 하던 제노스 왕은 순간 궁 안에서 강력하게 진동하는 어떤 힘을 느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궁 안에서 마력의 힘을 느낀 그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는 바로 외궁으로 향했다.

제노스가 자주 산책을 데리고 다녀서인지 르베나는 외궁을 아주 좋아했고, 때문에 그곳에 가면 르베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궁으로 향하는 도중 그는 모든 시종들을 물리고 홀로 초조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제발… 제발……!!’

더없이 초조한 발걸음이 멈춘 순간 그리고 그의 녹안은 놀라움, 경이로움 그리고 좌절을 차례대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눈앞의 광경은 베이라인 그로써 믿기지도, 아니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외궁의 정원에서 혼자 놀던 르베나가 눈앞에 놓인 수많은 장난감을 마력으로 모두 들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몇몇의 시녀가 경악한 듯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마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공주가 베이라라니……!

그 순간, 르베나가 익숙한 인기척을 느끼고는 제 작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제노스 왕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비! 르베나도 하 수 이떠요!! 하비처러엄!!”

아무것도 모르고 환하게 미소 짓는 르베나의 모습에 그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이렇게 어릴 때 마력이 발현되는 베이라는 매우 드물다. 아니, 거의 없었다.

보통 마력이나 신력이 발현되는 나이는 십 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발현되는 베이라나 세츠의 경우는 한 가지의 사실을 시사했다.

그들에게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양의 마력이나 신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보통 그들은 자신들의 마력이나 신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직 어린 육체는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본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베이라들의 패배로 세츠들이 모든 정권을 장악한 때. 디오니스 또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디오니스 왕가에 강력한 베이라의 탄생은 분명 세츠들의 엄청난 경계를 불러올 것이다.

제노스 왕은 아무것도 모른 채 미소 짓는 르베나를 보며 초조함에 이름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절대… 르베나를 위험하게 둘 수는 없어!!’

본래 르베나는 어미인 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외인으로 분류해야 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몰라 계속 궁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루치아 공작 일당은 제노스에게 르베나의 출궁이나 입양을 권하고 있었다.

제노스 왕을 지지하는 세력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기는 하나 드록이 성장할수록 르베나는 루치아 공작에게 더 큰 위험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를 계속 지켜만 볼 그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날 며칠 고민에 빠져있던 제노스 왕은 일단 그 당시 르베나의 마력을 본 모두를 입단속 시킨 채 출궁시켰다. 모두 평생 먹고살 정도의 돈을 쥐어 주고 타국으로 보낸 다음 이를 지켜볼 눈도 딸려 보냈다.

사나는 갑작스럽게 밑에서 일하던 시녀들이 연달아 출궁을 하자 당황스러워했지만 각자의 개인 사정 때문에 출궁하는 이들을 말릴 수도 없었다.

“르베나를 디오니스 왕가에 ‘공주’로써 정식 입적시킬 것을 선포한다.”

이어 제노스 왕은 급히 귀족 회의를 소집해 르베나를 왕가의 인명에 올릴 것을 선포했다.

일단은 르베나를 디오니스의 왕궁에 머물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그의 발표에 엄청난 반대와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제껏 참아왔던 루치아 공작 일당은 전에 없던 처사라며 제노스 왕의 자질마저 의심하며 들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귀족 회의는 찬성과 반대파로 나뉘어 매일 열띤 고함이 오가게 되었고 제노스는 왕임에도 마음대로 밀고 나갈 수 없는 현 구조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노스 왕에게 메이슨 공작이 찾아왔다.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공작은 가문의 정통답게 쉬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많이 수척해지셨군요, 폐하.”

메이슨 공작의 말에 제노스 왕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러자 작게 혀를 차던 메이슨 공작이 말했다.

“정말 딱해서 못 봐 드리겠군요. 어차피 원래 출궁을 해야 하는 아이였습니다.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괜히 루치아 공작 일당에게 꼬투리나 잡히지 마시고.”

막역한 사이이기에 가능한 친구의 말에 제노스 왕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도 백 번, 천 번을 그리 생각했네. 하지만 안 되겠는걸 어쩌겠나? 르베나 그 아이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야. 이 상태라면 곧 어느 귀족 가문에 입양되거나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약혼녀 딱지를 받아 정치의 희생양이 될 것이 뻔하네.”

그의 눈에 수심이 깃들었다.

“게다가 난 이미 일 년이나 그 아이를 방치했네… 도저히 보낼 수 없어…….”

하지만 수심의 깊이는 말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심지어 르베나는 베이라일세. 그 아이가 베이라인 걸 알면… 귀족들도 세츠들도 눈에 불을 켜고 그 아이를 적대시하거나 이용해 댈 테지… 더군다나 그 힘으로 보아… 아이는 단명할지 모르니 꼭 내 옆에 두어야만 하네…….’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에 제노스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 그런 제노스를 보던 메이슨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메이슨 가문의 공작인 저의 입장은 그렇습니다, 폐하.”

메이슨 공작의 조금은 차가운 말에 제 오랜 친구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제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노스를 본 메이슨 공작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하지만 제가 폐하의 오랜 벗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자네가 만약 그렇게도 자네의 손녀를 지키고 싶다면 그들과 거래를 하게. 그 거래로 아마 자네는 큰 것을 잃게 될 테지만 그래도 좋다면… 그 아이를 지킬 수는 있겠지 나는 그런 자네라도 응원하겠네.’ 라고 말입니다.”

달칵.

어느새 그가 나간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제노스 왕의 시선이 책상 위 작은 초상화로 향했다.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그의 아내와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딸 루아나.

더 이상 그에게 망설임은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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