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48화 (48/276)

48화

제1장 디오니스 외전 : 제노스 이야기 (1)

사각사각.

펜과 종이가 만드는 가느다랗고 섬세한 소리가 방 안의 침묵에 홀로 대적하고 있었다.

그 방 안, 홀로 서류에 몰두해 있는 한 남성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아…….”

부드러운 잿빛의 머리에는 간간이 흰머리가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그의 지적 이미지를 높여줄 뿐 그를 나이 들어 보이게 하지는 않았다. 분명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은 또래보다 더 젊어 보였고, 젊었을 때는 분명 수많은 여성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 외모였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나이 때 귀족들에게 흔히 보이는 뱃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어딘가 지적이면서도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은 마치 날카롭게 세공된 에메랄드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결코 추하게 보이지 않는 오히려 세월이 완성해가고 있는 멋진 그림 같은 남성이었다.

“하아…….”

다시 한번 내뱉은 한숨과 함께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눈앞의 서류를 보며 잠시 초조한 듯 그의 눈길에 책상에 놓여있는 액자에 가 닿았다. 하나의 탁상 액자를 사이좋게 반씩 차지한 두 개의 다른 초상화였다.

그중 하나엔 진주로 장식한 고운 밀빛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성이 방의 주인인 남성과 함께 그려진 그림이었다. 곱고 기품 있는 미소가 그녀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게끔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초상화 속엔 풍성하게 흘러내린 밀빛 머리에 환하게 미소 지은 눈 속, 남자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쏙 빼닮은 젊은 여성이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있었다.

누가 봐도 옆에 있는 초상화 속 여자와 남자를 고루 빼닮은 외모였다.

“루아나…….”

남성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는 순간, 멀리서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긴장으로 굳어진 남성의 얼굴이 문을 향했다.

똑똑.

조바심이 담긴 노크 소리와 함께 문 앞의 시종이 누군가의 출입을 알려왔다. 동시에 남성의 입에서 간단한 허락의 말이 나오자 곧바로 문이 열리며 한 시녀가 들어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어느새 눈가가 벌게진 시녀의 얼굴이 보이자, 남성은 애써 치미는 불안한 생각을 없애려 제 주먹을 꽈악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마 남성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흐느낌을 참는 시녀의 입이 곧 열렸다.

“폐, 폐하… 흑……. 루아나… 공주님께서… 흐윽… 출산하셨습니다… 아주 예쁜… 으흑… 아기씨를 낳으시고… 품에 안자마자… 흑흑… 눈을… 감으셨습… 니다…….”

시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성, 제노스 왕이 통탄에 잠긴 채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이 감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웠다.

제국력 903년.

베이라들의 성지, 디오니스의 가장 현명한 왕이라 불리던 제노스 왕의 인생이 어둠으로 물더드는 순간이었다.

왕비의 밀빛 머리카락과 제노스 왕의 에메랄드 같은 녹안을 쏙 빼닮은 루아나 공주는 그의 자랑이자 디오니스의 자랑이었다. 부모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루아나 공주는 언제나 밝았고 올곧았다.

부정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보다 디오니스와 백성들을 사랑할 줄 아는 공주였다. 본인의 신분과 권세를 남을 위해 쓸 줄 알았으며 본인을 위해서는 아낄 줄 알았다. 미소가 많았지만, 결코 헤프지 않았고 배려가 깊었으나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가 디오니스의 왕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신마전쟁이 한창인 곳으로 얼마간 봉사를 떠난 그녀가 갑자기 부푼 배를 안고 나타나 임신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후 디오니스 왕궁에는 처음으로 차가운 칼바람이 불었다.

몇 해 전 왕비가 병으로 죽고 루아나만을 바라보던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밝히려 들었고, 공주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왕과 루아나의 신경전은 온 궁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제노스 왕의 고함 소리가 따사롭던 궁 안을 날카롭게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 칼바람에 몸을 힘껏 움츠렸다.

하지만 루아나, 그녀만은 이 모든 소동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듯 언제나와 같이 밝았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절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계속되는 왕의 외면에도 그녀는 언제나 제 배를 소중히 쓰다듬었고 아이를 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딸의 모습에도 제노스 왕은 미혼모가 되어 버린 루아나 공주의 모습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매일같이 가시 박힌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차마 사랑하는 딸을 내치지는 못하였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 제노스 왕은 루아나 공주에 대한 분노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출산과 동시에 출궁할 것을 명하였다. 그의 말에 루아나 공주는 슬픈 얼굴은 한 채 소중히 제 배를 감싸 안으며 알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루아나 공주가 아기를 낳다 죽었다. 그가 명한 출궁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정말 이 궁을 영원히 떠나 버렸다.

짧은 시간의 차이을 두고 가장 사랑한 두 여자를 잃은 제노스 왕의 삶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어둠에는 감히 누구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폐하, 드록을 보십시오! 반짝이는 눈이 꼭 탐스러운 꿀 같지 않습니까!”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하는 세나르와 이제 막 고개를 가누기 시작한 드록 앞에서 제노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린 아들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젊고 아름다운 왕비.

하지만 제노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로웠다.

왕비가 떠나고 루아나가 성년이 되자 귀족들은 새 왕비를 들일 것을 종용했다. 루아나 공주의 데뷔탕트와 혼처를 알아보는 것 모두 왕비의 소관이라고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단지 왕비가 죽고 그녀의 가문이 힘을 잃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의 욕심이라는 것을.

몇 년 동안 버티던 그는 결국 귀족들의 합세에 져 마음에도 없는 여인을 품고 그 여인과 아이를 보았다. 이후 제노스는 본인이 본능만 살아 있는 동물인 것만 같았다. 감정도 뭣도 없이 정치적인 계산으로 하룻밤 여인을 품고 아이를 낳다니.

새로운 왕비와 어린 아들의 재롱에도 제노스는 매일 밤 루아나가 죽기 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출궁을 명했던 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후회했고, 루아나를 잃은 슬픔에 잠겨 죽은 왕비를 더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세나르를 볼 때마다 먼저 간 왕비에 대한 죄책감과 루아나에 대한 후회가 매일매일 현명했던 그를 좀먹어 갔다.

그렇게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자주 자신을 찾는 세나르와 드록을 물린 제노스 왕은 혼자 산책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작고 아담한 정원. 그 뒤에 자리한 정원을 닮은 아담한 궁.

“아바마마, 이것 좀 보세요!”

언제나처럼 이곳에서 저를 보고 웃던 루아나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유독 이 정원을 좋아하던 루아나를 위해 제노스 왕은 이곳에 아담한 궁을 지어 올리고 루아나의 열다섯 번째 생일날 선물로 주었다. 이 궁을 처음 선물 받고 방방 뛰며 좋아하던 어린 딸의 모습이 아직도 그의 눈에 선명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이곳을 거닐었다. 그러면 꼭 예전의 그 어느 날처럼 왕비와 루아나가 그의 곁에서 웃는 것만 같았다.

맑고 청아한 루아나의 웃음소리와 그런 루나아를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던 왕비,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던 매일.

그렇게 한참 감상에 젖어 있는 그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공주님~ 공주님 어디 계세요?”

“공주님!”

여럿이서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공주……?’

이 디오니스에 왕인 그도 모르는 공주가 있단 말인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툭.

무엇인가가 그의 발치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기질적인 변해 버린 녹안이 무감각하게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아… 아부? 맘마?”

아주 작은 아이.

이제 막 발걸음을 옮길 법한 아이가 그의 발치에 걸려 넘어져 있었던 것이다. 넘어졌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는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바짓단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부부? 맘마??”

작은 입을 옹알거리며 움직이는 아이. 작디작은 손으로 그의 바짓단을 잡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제노스 왕의 무기질적인 녹안에서 툭, 투툭, 맑고 투명한, 그렇지만 더없이 뜨거운 것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순간 당황한 그가 손을 올려 제 눈가를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그 작은 아이를 보는 순간.

후두둑. 후두두둑.

“흡… 흐흑…….”

한두 방울로 시작하던 그것, 눈물이 어느새 손쓸 새도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뿌옇게 앞을 가로막은 시야 사이로 갸우뚱 고개를 젓는 아이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녹안을 가졌던 루아나 공주와는 판이하게 다른, 하지만 웃는 모습만큼은 지독히도 제 엄마, 루아나를 빼닮은…….

르베나, 그의 손녀가 보였다.

제노스 왕은 르베나가 이 세상에 나온 날부터 단 한 번도 아이를 찾지 않았다.

제노스는 마치 르베나가 궁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고 심지어 르베나라는 이름조차 루아나가 죽기 전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는 르베나가 어떻게 자라는지, 어디서 자라는지 등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단 한 번, 언젠가 죽은 왕비와 루아나 공주가 사무치게 그립던 날, 정말 단 한 번 생각이 나 그는 시종에게 르베나에 대해 물었었다.

“칠흑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루비를 닮은 붉은 눈을 가진 아주 사랑스러운 아기님이십니다.”

하지만 돌아온 시종의 말에 르베나에 대한 그의 마음은 비 오는 날 피어오른 작은 불씨처럼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단 한 군데도 루아나를 닮지 않은 아기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정말 새카맣게 잊고 지냈다. 사랑하는 딸이 목숨과 맞바꾼 아이 따위, 사랑하는 딸과 아내 누구의 어떤 모습도 닮지 않은 아이 따위.

르베나라는 그의 손녀가, 루아나의 딸이, 이렇게 버젓이 제 궁에 살아 있다는 것을.

그는 이때까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순간 제노스는 어색한 자세로 제 품 안에 안겨 있는 르베나를 내려다보았다. 세상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이 귀여웠고, 까맣고 긴 속눈썹이 어여뻤다. 씩씩 작은 소리를 내는 앙증맞은 코와 가끔 옹알거리는 입술 또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제 셔츠 옷깃을 작고 통통한 손 가득 쥐고 자는 아이의 손에서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이를 본 어린 시녀가 행복한 어투로 말했다.

“르베나 공주님께서 웃으실 때 루아나 님을 얼마나 닮았는지 몰라요. 공주님도 그걸 아시는지 자꾸만 예쁘게 방싯방싯 웃으시고!”

그녀의 말에 작은 미소를 베어 무는 제노스 왕의 얼굴이 어린 시녀의 다정한 갈색 눈에 가득 담겼다.

르베나를 거의 방치 하다시피 한 제노스 왕이 우연히 외궁에서 만난 아기를 안고 나타났을 때 시녀, 사나는 정말이지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혹시 무슨 사달이 날까 조마조마해 1초라도 빨리 르베나를 건네받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노스 왕은 어색한 자세로 르베나를 안고는 그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가 향한 곳은 그가 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해 본 곳. 바로 르베나의 처소였다.

본궁 구석, 아주 작지만 따뜻하고 아담한 손님방은 어느새 아기용품으로 가득 찬 르베나의 방이 되어 있었다.

제노스가 처음으로 자는 르베나를 바라보며 사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궁인들이 이 아이를 공주라 부르느냐?”

제노스의 물음에 멈칫하던 사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여태 르베나 님과 같은 아기가 궁에 머문 적이 없어 사실 모두 어찌 불러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르베나 님이라고 불렀지만… 어느새 하나둘 르베나 님을 아기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이가 생겨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모두가…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사나의 말에 가만히 르베나를 바라보던 제노스 왕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그의 말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옆에 있는 사나에게 전달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곧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나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고 눈가에는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루아나 공주가 죽고 그녀의 곁을 지키던 시녀장은 모습을 감춰 버렸다. 설상가상 왕조차도 저버린 작은 아기님.

그 작고 여린 존재가 궁 안 어느 작은 손님방에서나마 붙들고 버텨낸 시간들이 마침내 따뜻하고 다정한 대답이 되어 돌아온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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