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제1장 디오니스 (46)
제노스 왕이 세나르 왕비에 대한 살해 청탁 수사 지휘권을 후벤에게 임명하며 길었던 회의는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저마다 무리를 지어 급박하게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새로 드러난 사실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던 것이다.
베이라인 제노스 왕과 어느 누구보다 큰 힘을 가진 베이라 공주.
기사가 되기를 선언한 그녀의 저의. 앞으로 변할 세나르 일당의 위세.
어느 쪽에 줄을 서고 어느 쪽을 버려야 조금 더 안전한 길인지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결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것저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도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세나르 일당의 처우가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회의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르베나에게 한 인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짝.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어수선한 회의장에 경악 어린 침묵이 깔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 순간이었다. 가해진 힘에 의해 얼굴이 돌려진 채 앉아 있는 르베나와 그 앞에 서 있는 세나르에게로.
르베나가 다시 고개를 바로한 것과 동시에 다시 세나르의 손이 르베나의 뺨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 손을 제지하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세나르의 눈이 표독스럽게 자신을 막은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유파… 시드… 여.”
간신히 분노를 참아내고 내뱉는 세나르의 눈에 차갑게 가라앉은 루드바하의 얼굴이 보였다.
루드바하의 눈이 앉아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하얀 얼굴에 새빨간 자국이 남은 뺨을 보니 루드바하 본인도 모르게 살기가 치솟는 듯했다.
그의 기세에 잠시 당황한 세나르가 곧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이는 디오니스의 일입니다. 유파시드께서는 빠져 주시지요.”
짓씹듯 내뱉는 세나르의 말에 루드바하가 한마디 하려다가 르베나를 보았다.
분명 르베나는 세나르를 막을 힘도, 여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맞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 또한 있겠지.
“하아…….”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앉아 있는 르베나를 보며 왠지 어려운 상대를 고른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과 함께 루드바하가 세나르의 손을 거칠게 놓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는 분명 디오니스의 일이나, 저는 앞에서 일어나는 무분별한 폭행을 좌시할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더 제 앞에서 공주께 손을 대면 그때는 저도 이 정도로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싸늘하게 말한 루드바하가 조금 뒤에 선 채 팔짱을 끼고 세나르를 지켜보자 이를 보고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발갛게 부은 뺨을 하고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계집, 미치도록 얄미운 계집, 저 표정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리고 짓밟아주고 싶은 계집……!
“하. 제 어미를 닮아 몸을 잘도 굴리나 보구나. 천하의 유파시드를 꼬여낸 걸 보면! 어때, 그까짓 증거로 나를 잡았다 기고만장해 있느냐? 폐하와 유파시드가 너의 편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죽겠느냐? 하지만 똑똑히 기억하렴. 넌 곧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 거야. 오늘 네년의 편을 든 모든 사람이 단 한 놈도 빠짐없이 함께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자근자근 씹듯이 내뱉는 세나르의 말이 르베나의 귓가에 닿았다.
르베나는 가만히 세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어 보였다.
“……?”
르베나의 표정에 세나르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세나르를 보며 르베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나르보다 아주 조금 더 큰 키임에도 르베나가 그녀의 앞에 서자 세나르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누가 할 말을 누가 하는지 모르겠네.”
르베나의 말은 세나르와는 달리 힘을 싣고 뻗어나갔다. 둘의 공방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꿀꺽 침을 삼키며 르베나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주워 담았다.
다들 모르긴 몰라도 분명 세나르 왕비가 르베나를 도발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내가 지금 약하기 짝이 없는 그 손을 낚아채지 않고 맞아준 것은 앞으로 그대에게 벌어질 일에 대한 작은 조의라고 생각하십시오.”
“뭐… 뭣? 그대?? 감히……!!!”
르베나의 말에 세나르가 부들부들 떨자 르베나가 제 붉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제 곧 폐위될 당신에게 그 이상의 호칭은 필요 없겠죠. 아, 존칭도 필요 없겠군. 그러니 똑똑히 들어. 앞으로 내 검과 마력은 출신과 계급을 따지지 않고 휘둘러질 거야.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검으로 벨 것이고 내 사람을 건드리는 자는 마력으로 다스릴 거다.”
붉은 눈동자에 세나르의 얼굴이 선명하게 담겼다.
“그러니 한 가지 묻지. 그런 내 검과 마력이… 지금 가장 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르베나가 짙게 미소 짓자 곧 세나르의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제 앞에서 벌벌 떨던 작은 계집에게서 나오는 기세에 이 순간 온몸의 세포들이 도망가라 소리쳐 대고 있었다. 르베나가 세나르와 회의장에 아직 머무는 귀족들을 향해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발음 하나 뭉개지지 않게 또렷하게 전달되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붉은 눈에 얽혀드는 이들의 얼굴은 조여 오는 살기에 숨쉬기가 힘들어 호흡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세나르 쪽의 귀족들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누구든. 이 디오니스를 좀먹는 것들은 제일 살기 힘든 나라가 바로 디오니스가 될 거거든.”
모두에게 붉은 시선을 흩뿌린 르베나가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고요 속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르베나가 회의장을 벗어남과 여기저기서 풀썩, 풀썩 쓰러지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사람이라…….’
그리고 르베나의 뒤에 서있던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입 안에 굴려지는 단어의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 * *
펑. 펑. 퍼버벙!
거대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자 뒤를 이은 기사들의 행렬이 늘어졌다.
선봉에 선 이들은 그들의 검과 디오니스의 국기를 높게 치켜들었다. 줄이어 늘어진 기사들의 행렬 주위로 모든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 옆에 간간이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수많은 인파들의 침묵 속에 아픔을 담고 들려왔다.
오늘은 르베나를 위해 죽었던 제1기사단 기사들을 위한 국장이 있는 날이자 디오니스의 건립기념일이었다. 르베나의 청을 들은 제노스 왕의 명으로 그들은 기사 최고의 대우로 국장을 치르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그들의 가정에 영구히 매달 일정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아이가 있는 가정의 경우 평생의 교육비를 추가로 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동안 쓸데가 없어 모아두었던 재물들을 모두 돈으로 바꾸어 사나를 통해 매월 꾸준히 해당 기사의 집에 전달되도록 조치해두었다.
한 번에 줄까도 생각해 봤지만 누구든 갑작스러운 재물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건 그들의 삶을 방해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아들과 남편, 아버지를 잃은 그들에게 절대로 대신이 될 수 없지만 남은 이들의 삶이 적어도 경제적인 문제로 흔들리지는 않길 바란 그녀의 마음이었다.
모든 국민들의 애도와 슬픔이 담긴 국장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입술을 세게 물어뜯어 작게 피가 맺힌 르베나를 보며 그가 손을 올렸다가 멈칫하며 다시 내렸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녀를 위로할 수 없음을 그, 루드바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도회에 선 그대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군요.”
조금이라도 르베나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보고자 루드바하가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 루드바하에게 고개를 돌린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했다.
“그 자리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저일 겁니다.”
고통이 가시시 않은 르베나의 시선이 다시 기사들의 행렬로 향했다.
하얀 얼굴 위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 붉은 눈을 닮은 붉은 입술, 풍성하게 흐드러진 까만 머리, 가만히 있는 표정도. 언젠가 보았던 살짝 웃는 미소도 심지어 누군가를 기만하듯 지어 보이는 웃음조차.
“이렇게 매혹적인데… 그럴 리가…….”
루드바하의 작은 말소리에 르베나가 설핏 고개를 돌렸다.
듣지 못한 말을 되묻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루드바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그대의 데뷔탕트가 있다면 파트너는 꼭 제가 하고 싶어서.”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별 의미를 담지 않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디오니스의 건국제도 무도회도 모두 제1기사단의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원래는 무도회에서 가장 빛났어야 할 그녀는 슬픔을 담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떠난 자들을 기억한다.
이런 장소에서 그녀의 외모를 칭찬하는 누군가의 말은 크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군요.”
자신의 말을 못 들은 척 다른 이야기를 하는 르베나의 엇갈린 마음이 엿보였다.
데뷔탕트따위 관심조차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무안할까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낸 배려 깊은 마음이. 자신을 보호하다 죽은 기사들의 앞에서 한가로운 얘기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 어둡고 깊은 마음이.
그런 르베나를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은 루드바하가 그녀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답했다.
“그렇군요. 정말… 잊지 못할 만큼…….”
그럼에도 루드바하의 시선은 르베나의 시선과 달리 행렬이 아닌 그녀를 향했다.
이 시선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르베나는 줄곧 행렬에 제 시선을 고정했다.
그 무관심함이, 자신을 벗어난 관심이. 어쩌면 저 붉은 귓가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다른 마음이 루드바하는 벌써부터 못 견디게 아까웠다. 그는 오늘 국장을 보고 디오니스를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젠을 제국으로 승격하며 신마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가 덜 된 다른 왕국도 둘러봐야 하는 그는 이미 일정보다 오래 디오니스에 머문 상황이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지만 루드바하는 앞서 나가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대신 담담히 르베나의 모습을 하나하나 제 눈에 담아 두었다.
언젠가 다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언젠가 스쳐 지나도 한 번에 잡아챌 수 있도록. 다음 만남은 이렇게 스치는 만남이 아니길 바라며 아니, 그럴 것이라 다짐하며.
르베나의 붉어진 귓가는 언제였는지 모르게 사라졌고 행렬을 바라보는 눈은 깊은 어둠을 담았다. 슬픔을 참 듯 다시 제 입술을 짓이기는 르베나의 얼굴을 루드바하는 모두 빠짐없이 제 마음에도 담아 두었다.
다음에 볼 때는 그녀가 꼭 웃고 있었으면. 다음에 볼 때는 그녀가 그를 마주 보아 주었으면.
‘다음에 볼 때는 그녀가…….’
수많은 소망과 희망을 그리던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서 드디어 시선을 떼 멀리 두었다. 높이 떠오르는 해가 흰 천으로 둘러싸인 기사들의 관을 비추었다. 얕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결 좋은 은발을 흩날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더 생생히 와 닿았다.
길거리에 펄럭이는 디오니스의 국기, 바람에 살랑 이는 나뭇잎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기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추모와 눈물 그리고 애잔함.
그리고… 한 사람.
언젠가 다시 만날 그녀의 모습이.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1장 디오니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