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46화 (46/276)

46화

제1장 디오니스 (45)

제노스 왕과 유파시드의 선포 이후 회의장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재개되었다. 이번 회의는 쥬라 사건의 배후를 가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베이라임을 숨기고 살인을 저지른 공주에 대한 심문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왕위계승자였기에 필요한 심문이었다. 아까의 일 때문인지 세나르 측은 말을 아꼈다. 함부로 더 들쑤시다가는 더 큰 피해를 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도주에 대비해 후벤이 맡고 있는 2, 3기사단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공간은 더 얼어붙기 시작했다. 왕궁 기사들이 제일 존경하는 제1기사단을 그렇게 만든 원흉이 세나르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기사들의 눈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제껏 침묵을 지켰던 메이슨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중립을 고수하는 그였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모든 귀족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상기되어 있는 회의장을 시선 한번으로 조금 가라앉힌 후 르베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디오니스의 공작으로써 또한 백성으로서 공주님께 묻겠습니다. 공주님, 비록 살해의 위협을 당하셨으나 공주님께서는 기사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후 혼자 남으셨습니다. 그 모두를 텔레포트 시킬 정도의 대단한 마력이라면, 쥬라라는 베이라를 생포하셨을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그를 죽인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메이슨 공작의 질문에 모두의 눈이 다시 깊은 의문을 갖고 르베나에게 향했다.

그의 질문은 타당했다. 세나르의 짓임을 증명하려면 오히려 그를 생포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 이었을 테고 르베나 공주에겐 그만한 힘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굳이 힘을 들여 기사들을 대피시키고 혼자 남아 그를 죽인 것일까?

혹시 세나르 왕비의 탓을 하기 위한 모종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모두들 더욱 관심을 갖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온 대답은 더없이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에 귀족들은 모두 놀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대답만 들으면 그녀는 정말 어린 나이에 잔혹한 성정을 지닌 것이라

고백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슨 공작은 흔들리지 않은 채 차분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공주께서는 그 일을… 후회하십니까?”

공작의 질문에 모두 기대하는 눈빛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과연 이 기회를 잡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메이슨 공작의 질문은 르베나에겐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굳이 잔인한 어린 공주의 이미지를 가져갈 이유는 없다.

게다가 어느 귀족사회나 그렇듯 그들은 쉽게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간단한 말 한마디면 모든 잘못은 금세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귀족사회에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관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죄를 짓기도 그에 따른 면죄부를 받기도 아주 쉬웠다. 하물며 그녀는 베이라의 힘을 가진 공주다. 그녀가 여기서 후회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진실과 상관없이 귀족들은 더 이상 함부로 떠들지 못하리라.

메이슨 공작 역시 그런 의미로 질문을 던졌다. 르베나의 증언과 증거로 세나르 일가는 조사를 받게 되었으니 오늘 회의의 본질은 해결된 셈이었다.

더 이상의 시간 끌기를 통해 이 어린 공주를 베고 때리는 무의미한 공방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공주의 ‘후회한다’ 한 마디면 오늘의 회의는 좋은 마무리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르베나 역시 메이슨 공작이 던진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그래서 선뜻 답변을 들려주었다.

“아니, 전혀. 나는 추호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주변에 소리 없는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귀족들의 눈빛이 빠르게 오갔다. 이쯤 되면 공주가 막 나가자는 거였다.

질문을 한 메이슨 공작 역시 이번에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술렁거림이 소리로 변환되어 퍼지기 직전, 르베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제1기사단은… 이 나라의 왕족인 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 고작 나약한 공주 하나를 지키고자 목숨을 버렸고 기사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신체를 기꺼이 잃었으며 나아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자 하였다.”

그 목소리는 아주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디오니스를 수호하겠다 맹세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맹세에 따라 그들이 가진 무엇도 아끼려 들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지키는 것에만 전념했다.”

르베나의 머릿속에 이전 삶에 본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고성,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 그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지켰다. 그들의 맹세와 충의, 그리고 정의를……!

그리고 다시 한번 돌아온 이번 생에서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키메라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공주임에도 그들의 모든 것을 다해 맹세를 지켜냈다.

“하여 나도 나의 맹세를, 다짐을 지키고자 하였을 뿐이다. 그는, 쥬라는 그들의 충의와 맹세와 노력을… 한낱 농 짓거리로 짓밟았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내건 내 앞에서… 감히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르베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어느새 무표정하던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목소리는 깊은 분노와 슬픔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기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연인이었다. 집에서는 그들을 기다리며 가슴 졸이는 누군가가 있었단 말이다!”

그녀의 말에 몇몇 귀족들의 눈이 함께 붉어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디오니스의 백성들이었다. 나는 왕가의 핏줄을 타고난 덕에 그들의 충의를 목숨으로 받았다. 왕가와 귀족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에 비해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을 다스리는 이유는 하나! 명령함으로써 지키기 위함이다.”

물러서지 않는 목소리에는 굳은 기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는 감히 그들의 정의를, 충의를 짓밟은 이들에게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일이었다.”

르베나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침묵했다. 메이슨 공작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란 듯 침묵하였다.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진 듯한 가슴의 통증을 무시한 르베나가 시선을 옮겨 세나르 왕비와 루치아 공작, 그리고 그들의 일행을 바라보며 뚜렷하고 선명한 어조로 말했다.

“후회하냐고? 절대. 생포해야 했다고? 절대! 그를 살려야 했다고? 절대!!”

그 강경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난 그들에게 맹세했다. 그들의 정의를! 그들의 가족을!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그리고 난 내 자신에게 다짐했다. 다시는 어느 디오니스의 백성도 잃지 않겠다고!”

마치 제왕의 것인 듯 들리는 그 말투에 모두 절로 고개를 숙이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내 백성을 짓밟은 자들과 짓밟으려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 마력으로 태워버릴 거고 검이 부러지는 순간까지 베어낼 테니.”

르베나의 말이 스스로를 향함을 느낌과 동시에 세나르를 위시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스산함을 느꼈다. 그리고 르베나의 말을 타고 전해지는 공포가 스멀스멀 그곳에 있던 귀족들을 옥죄여왔다.

저 작은 소녀가,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소녀가 내뱉는 말이 그냥 허언이 아님을 모두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슨 공작이 그런 르베나를 찬찬히 살피듯 보고 나서 깊게 침잠된 눈빛으로 물었다.

“공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하나 묻고 싶군요. 어째서 많은 이를 지킬 힘을 가진 공주님은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베이라인 사실을 숨겼습니까? 공주님께서 좀 더 빨리 그 힘을 알렸더라면… 그들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메이슨 공작의 말에 모두 가려운 곳을 긁은 것처럼 시원한 얼굴로 르베나를 보았다.

그래, 그것이 알고 싶었다.

과연 저 앙큼한 공주는 왜 그동안 베이라인 사실을 숨긴 것인지. 저런 힘을 도대체 어디다 쓰려고 하는 것인지. 마치 저들을 위협하듯 내뱉는 공주의 저의는 무엇인지.

귀족들의 얼굴을 보던 르베나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전의 일들이 머릿속을 한바탕 휘저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다시 한번 되풀이되는 이번 생도 돌아보았다. 곧 르베나의 붉은 눈이 뚜렷한 빛을 내며 드러났다.

“난… 난… 디오니스 왕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베이라인 것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르베나의 말에 모두가 동요했다. 아무도 모르게 르베나 공주가 디오니스를 떠나려 했다니.

언제나 동요가 없던 제노스 왕조차 놀란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동요를 느꼈음에도 그녀는 천천히 제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모두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숨을 죽여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곳으로 치우친 왕권은 아무 죄 없는 어린 공주를 핍박하고 학대하였다. 또한 권력의 집중을 좌시한 왕으로 인해 국민들은 굶주리고 희망을 잃어갔다. 이에 동조한 귀족들로 인해 디오니스엔 악취가 들끓었으며 이를 애써 무시한 귀족들로 인해 디오니스는 무관심 속에 더욱 빠르게 시들어갔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모욕하는 말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르베나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려 했다.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다.”

애초에 르베나는 이전의 삶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디오니스를 다시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고 그녀는 그때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시 세차게 박동하는 디오니스를 재건하는 일.

그래서 보 고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어릴 때와 같은 모습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디오니스 따위는. 그녀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 다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디오니스가 아니라 기억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무너져 가는 디오니스 따위는 말이다.

그녀에겐 돌아가면 다시 살아나려 꿈틀대는 디오니스가 있으니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몰랐을 때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지만.

“하지만 나 역시 무너져 가는 디오니스를 방관으로 모른척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을 통해 알게 됐다. 언제나 생각지도… 무시하기만 했던 그들… 백성들은 대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목숨을 걸 줄 아는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 나약하고… 부끄러워졌다.”

르베나의 말을 회의장에 있는 귀족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메이슨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공주님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입니까?”

어쩐지 조금은 기대와 희망을 가진 듯한 메이슨 공작의 말에 르베나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높이 치켜올렸다.

하고 싶은 일. 앞으로 르베나가 걸어가야 할 길.

그녀의 앞을 듬직하게 막아주던 수많은 등을. 질 것이 뻔한 싸움에도 모든 것을 걸던 그들의 모습을. 더없이 약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그들을,

르베나는 떠올렸다.

곧 입을 떼는 르베나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망설임도,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앞만 보고 걸어 나갈 사람처럼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이 순간 어느 보석보다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키는 이가 될 것이다. 나는 이 디오니스를 정당하게 수호하고! 디오니스에 속한 이들의 인생을 지켜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탐욕, 재물만을 지키는 이들을 척결하고 자신의 정의와 믿음, 사람을 지키는 이들을 옹호할 것이다.”

르베나의 말에 메이슨 공작이 물었다.

“그 말씀은… 왕위를 잇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르베나의 한마디면 디오니스는 왕위찬탈에 따른 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들은 르베나는 웃기는 소리라는 듯 피식 웃었다.

‘나는 무능력한 왕이었고 자만으로 화를 자초한 지도자였다. 그런 나에게 왕이라니.’

곧 르베나가 메이슨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아니. 난 디오니스를 수호하는… 기사가 될 것이다.”

말을 하는 르베나의 눈빛에 더 이상의 어둠은 없었다. 망설임도 없었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대답하는 르베나의 모습에 한껏 허세를 부리던 귀족들은 이유 모를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 순간 르베나가 지어 보인 그 작은 미소가 왜인지 모두의 가슴에 알알이 박혀 들었다.

귀족들은 왜인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어느 역사의 변환점, 그 장대한 페이지 안에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르베나를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에도 잊을 수 없는 어느 장면의 그림처럼 미소 짓는 르베나의 모습이 뚜렷하게 박혀 들어 자리 잡았다. 이 순간을 그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예감했다. 그의 마음속 이름 모를 씨앗이 심어지는 이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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