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제1장 디오니스 (44)
“오늘 회의는 전적으로 디오니스 왕국의 일입니다. 이때까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나, 이것은 디오니스의 싸움이자 저의 싸움입니다. 진정 디오니스와 저를 존중하신다면… 유파시드의 참관까지 관여치는 않겠으나 그저 참관만으로 그쳐 주시길 바랍니다.”
이전의 삶이 되어 버린 그때, ‘다니아’를 소환한 순간 그녀는 보았다.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감싸던 젠의 기사들과 세츠들 그리고 녹색 머리의 기사를.
그들이 뒤늦게나마 누구의 명을 따라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보호했는지도 르베나는 알 것 같았다.
비록 시작은 적이었으나 아마도 그 역시 누군가의 모함에 빠진 것이리라 생각하니 르베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적대심을 품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뒤늦게라도 그녀를 믿어준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거기까지. 르베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누구보다 든든한 편이 되어줄 유파시드라 하여도.
생각지도 못한 르베나의 청에 루드바하 역시 약간은 당황해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얼어버렸다.
‘그게… 부탁인가? 나서지 말고 보기만 해달라는 것이?’
르베나의 말 한마디에 빠르게 가라앉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괜히 실망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하지만 그는 유파시드답게 옅은 미소로 노련하게 제 감정을 숨긴 채 다시 한번 말했다.
“공주, 내게 도움을 청해도 됩니다. 유파시드란 자리가 사리사욕을 채우라고 있는 자리는 아니나, 이번 일에서만큼은 전 그대의 편입니다. 얼마든지 유파시드라는 칭호를 그대의 방패로, 창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잠시 놀란 듯 이번에는 르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물론 더 이상 누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도 사실이었지만, 사실 르베나는 루드바하가 혹시라도 일주일 새 세나르 왕비 쪽에서 어떤 제안을 받고 불합리한 증언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돌려 말한 것도 있었다.
이전 삶의 마지막에서 그가 비록 자신을 믿고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구하려 했고 이제까지 봐온 그도 공명정대했지만, 르베나는 이제 쉽게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무리 젠의 왕이자 세츠들의 왕인 유파시드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인의 칭호를 르베나의 창과 방패로 마음껏 쓰라니.
루드바하 옆에 서 있는 유안 역시 황당한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아주 심한 욕을 하는 게 느껴졌다. 분명 입에 담기 힘든 수준인 것 같았다. 역시 평범한 제안은 아니었던 듯하다.
“음,음…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번 싸움에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직접,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진 빚은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유파시드.”
당황한 듯 붉은 얼굴로 시작한 말은 어느새 붉게 빛나는 눈빛만을 남겼다.
좀 더 성숙해진 것 같은 분위기. 뭔가 조금은 편안해진 듯한 얼굴.
아주 조금은 보일 듯 말 듯 한 입가의 미소.
‘시간이 지나면 저 입가에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드리울까?’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조바심도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네?”
루드바하의 뜻 모를 대답에 르베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루드바하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대에게 받을 것을 모두 받은 듯하니, 공주의 뜻에 따라 회의에서는 참관만 하겠습니다. 부디, 공주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빤히 보던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외궁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사뭇 편안해 보였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딴 약속 따위는……!!’
조금 전의 멍청한 자신을 떠올린 루드바하는 처음으로 본인이 한 말을 물리고 싶었다.
르베나는, 그녀는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타고난 마력은 아직은 서툰 면이 있었으나 훗날 유파시드인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옳고 그른 것을 정의할 줄 알았으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그녀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줄 알았고 그에 따라 희생해야 할 것 역시도 냉정하리만치 잘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칭찬받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고 키워 주며 소중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이딴 대접이 아니라 말이다……!’
루드바하가 회의장 분위기에 분노를 느끼며 한 명, 한 명, 르베나에 대해 악담을 늘어 놓는 귀족들을 눈에 새길 때, 르베나는 애써 희열의 눈빛을 감추고 있는 세나르를 보았다.
세나르가 건 이번 싸움에서 르베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잃었다.
그녀는 그토록 기억해내지 못하던 이전 삶의 마지막 기억과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아마도 일주일간 수없이 생각한 나름의 결과, 이것이 기적으로 주어진 또 한 번의 삶이라면 그 기억들은 새로운 그녀를 위한 기름진 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거름이 꽃을 채 피우기도 전, 르베나는 눈앞에서 또다시 그들을 잃었다.
그래서 감히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많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정의와 선의와 맹세가 르베나의 살갗과 뼈를 뚫고 강하게 전해진 탓이었다.
그래서 질 수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싸움만큼은.
“왕비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 조용하던 르베나의 물음이 힘을 싣고 퍼져나갔다. 이에 세나르가 다소 놀란 눈빛을 하다가는 아까부터 흘리던 거짓 눈물을 찍어 내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어미 된 자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모자라지만 어미의 사랑을 주려 노력했음에도 공주는 언제나 절 어려워했지요. 결국 저의 모자람이 공주에게 그런 잔혹성을… 흑, 다 저의 부덕입니다……!!”
세나르 왕비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제노스 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맞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느라 왕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르베나의 말에 세나르가 당황해하며 눈길을 돌렸다.
세나르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르베나의 입꼬리가 올라간 순간이었다. 그리고 르베나가 작게 입모양을 통해 그녀에게 분명히 말했다.
돌 려 줄 게.
그리고 르베나의 입모양을 읽은 세나르가 미간을 찌푸리던 순간, 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다한이 무슨 서류뭉치 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거침없이 들어선 그는 제노스 왕과 루드바하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는 곧장 들고 온 서류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모두가 의아해 하며 제노스 왕과 루드바하가 서류를 살펴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가 죽였던 베이라의 이름은 쥬라. 그는 저와 기사단을 죽이라는 세나르 왕비의 사주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 디오니스 왕가의 직인이 찍힌 수표를 다수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것은 증거! 그의 연구실에 있던 비밀금고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당신, 세나르 왕비 때문이 맞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치아 공작이 바로 책상을 쾅, 소리 나게 치며 일어났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전하!!! 세나르 왕비님을 쫓아내려는 저 간악한 베이라의 모함 말입니다!!
본인의 간악함과 잔인함이 드러나려 하자 술수를 부리는 것입니다!!!”
르베나는 그런 루치아 공작을 흘깃 보고는 다시 제노스 왕에게 말했다.
“쥬라의 연구실은 수사에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세나르 왕비님의 동생이자 현재 3, 4, 5기사단을 맡고 있는 한슨 경과 그의 기사단장들을 동행하여 급습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비밀에 부친 채로 말입니다. 그러니 증거에 대한 신뢰성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녀의 계속되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그곳에서 쥬라가 죽기 전 저에게 밝힌 비밀공간을 찾아내어 발견한 것이 저 서류입니다. 저 서류에는 디오니스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디오니스 왕가의 인장은 초대 드래곤의 숨결로 만들어진 것. 아직까지 이것을 복사하거나 흉내낼 수 있는 마법사는 없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르베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왕과 왕비뿐. 베이라인 저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전하께 묻겠습니다. 저 인장은 디오니스 왕궁의 것이 맞습니까?”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노스 왕이 서류를 보던 눈을 떼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디오니스 왕가 인장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겠지.’
그녀가 추측하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잠시 르베나를 바라보던 제노스 왕이 자신의 손에서 작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그의 눈을 똑 닮은 녹색의 불꽃, 마력이었다.
그 모습에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 심지어 르베나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도가 높은 마력.
이제까지 제노스 왕이 베이라라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전의 삶에서 제노스 왕은 르베나에게 강제로 왕위를 뺏기고 늙어 죽어가는 순간까지 그런 사실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마법이라니……!!
오직 루드바하만이 그의 행동에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곧 모두의 경악을 뒤로 한 제노스 왕의 마력이 서류에 닿자, 그곳에 찍혀 있던 인장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타올랐다.
모두들 그 모습에 한 번 더 놀라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이를 보던 제노스 왕이 말했다.
“디오니스 왕가의 직인에는 비밀이 있다. 디오니스의 성을 이어받은 자의 마력이 닿으면 마치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 우리는 예부터 이것으로 디오니스 직인의 가짜와 진짜를 구분했다. 그리고 이 직인은… 진짜로군.”
제노스 왕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지금 이 한 장면만으로 귀족들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복사할 수 없는 디오니스의 직인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봤다.
게다라 제노스 왕이 베이라라니!!
이거야말로 그들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에 누구보다 경악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세나르 왕비였다.
“어, 어떻게…….”
떨리는 음성으로 세나르가 경악하자 제노스 왕의 눈이 형형하게 타오르며 그녀를 향했다.
언제나 차분하던 그의 눈빛은 엄청난 살기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세나르!!!”
폭풍같은 그의 음성이 온 회의장을 가득 울렸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모두들 놀라 눈을 크게 홉떴다. 세나르는 덜덜 떠는 모습으로 두려움에 가득 차 제노스를 바라보았다.
“내 분명 일렀거늘! 감히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냐!!”
제노스의 호령에 세나르가 덜덜 떨다가는 자리에 폭삭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제노스의 시선이 매섭게 루치아 공작에게 향했다. 그 역시 제노스 왕의 분노에 놀라고 두려운 모습으로 제 손을 미약하게 떨었다.
이내 시선을 돌린 제노스 왕이 회의장에 앉은 모든 귀족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디오니스의 인장! 게다가 왕비만이 쓸 수 있는 인장이다. 여기에 쓰여 있는 내용은 르베나 공주가 말한 대로 공주와 기사단의 이동 경로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사망을 대가로… 디오니스 왕궁의 수표가 선지불되었다는 내용이다!!”
평소와는 다른 제노스의 왕의 위엄과 분노에 모두들 넋을 놓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노스 왕은 분노를 삭이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망설임 없이 이어 말했다.
“수사 결과가 모두 나올 때까지 세나르 왕비를 궁에 유폐시킬 것을 명한다. 그때까지 누구의 면회도 허락지 않을 것이며 만약… 이것이 진실로 드러난다면… 세나르 왕비는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라! 이것을 나 제노스 드 디오니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제노스 왕의 말에 회의장에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적막이 맴돌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세나르 왕비의 절규와 루치아 공작 일당의 항의가 커다란 소리로 빗발쳤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디오니스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지금 한순간에 절벽위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전하!!”
“이것은 베이라들의 작전입니다!”
“왕비님이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저마다의 이익과 가문의 존속을 위한 말들이 절규처럼 회의장을 어지럽혔다. 그러자.
쾅!!
점차 커지던 소란스러움에 제노스 왕이 제 앞에 있는 기다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다섯 명은 거뜬히 앉을 만큼 긴 테이블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테이블이 디오니스에서 가장 단단한 스파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회장 안의 모두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제노스 왕의 압도적인 무력에 두려움을 담은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더 이상… 나의 한계를 시험하지 말라.”
제노스 왕의 기세가 무서웠다. 빛나는 그의 안광에 마주칠까 싶어 모두가 서둘러 땅이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싯적 그가 활발한 정치활동을 할 때에도 그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왕이었지
이렇듯 날카롭게 벼려진 카리스마를 지니지는 못했다.
어쩌면 오랜 시간 아무도 몰랐을 그의 모습에 모든 귀족들은 더욱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루드바하가 부드러운 어조로 의견을 더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젠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수사에 필요한 세츠가 있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시길.”
그의 첨언에 회의장에는 더 큰 적막이 내리깔렸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디오니스의 왕과 세츠들의 왕인 유파시드가 전적으로 르베나의 뒤를 지키겠다고 모두의 앞에서 선포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