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44화 (44/276)

44화

제1장 디오니스 (43)

디오니스 왕궁은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다.

드록과의 내기로 짧은 여행을 떠난 르베나 공주 일행이 연락 두절되고 도착 예정 기한이 되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예정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후, 모두가 기다렸던 공주 일행이 돌아왔다. 게다가 그들을 모두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유파시드, 루드바하였다.

한 순간 왕궁에 강한 충격이 강타했다. 처음에는 타국의 공격이 아닌가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곧 엄청난 빛무리가 도래함과 동시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는 기적을 목도했다.

한 명만 성공해도 기적의 마법이라 불리는 텔레포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의 마법 실력이나 평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대규모 텔레포트의 기적을 한가롭게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모두가 기다렸던 르베나 공주 일행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드러난 그들의 처참한 모습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맙소사, 궁의, 누가 궁의 좀 불러줘요!!”

“공주님!! 다한 경!!!”

디오니스 최고의 기사단이라 불리던 제1기사단 중 네 명 사망, 한 명 복귀 불능, 다섯 명 부상에 이어 공주의 모습 또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공주의 어깨에는 어떤 털뭉치 같은 것이 매달려 요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 * *

그날의 사건으로 왕궁은 발칵 뒤집혔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귀족회의가 소집되었다.

쾅!

“모함입니다! 제가 베이라를 고용해 르베나 공주를 해치려 했다니요! 이것은 엄연한 모함입니다, 폐하!!”

분노한 듯한 목소리로 바들바들 떨며 세나르 왕비가 거세게 항의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루치아 공작을 비롯한 세나르파의 귀족들이 연신 그녀를 항변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후벤 후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의견 또한 지지 않고 이어졌다.

이들의 공방은 지칠 줄 몰랐고 궁정 회의실의 분위기 또한 계속 무거워져만 갔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제노스 왕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모두 저마다의 입장을 주장하니 끝이 없겠군. 그러니 누구나 신뢰할 증인, 세츠들의 왕인 유파시드께 답을 듣도록 하겠네. 모두가 알다시피 세츠들은 거짓을 말할 수 없네. 그러니 유파시드여, 답해 주십시오.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베이라가 맞습니까? 또한 그가 르베나 공주를 비롯한 기사단을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살해하려 함이 맞습니까?”

분명 존대를 하고 있지만 제노스 왕의 모습과 눈빛은 전혀 아랫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언제나처럼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무심한 눈빛과 모습을 보면 정말 르베나가 그의 손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냉담해 보였다.

제노스 왕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루드바하에게 쏟아졌다.

공명정대한 세츠들의 왕이자 곧 제국으로 승격할 젠의 왕이었다. 그가 태어나 디오니스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그렇기에 누군가의 편을 들어 얻을 수 있는 이익 따위도 없었다.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숲의 일대가 누군가의 마력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에 공주님 일행은 그 결계에 의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또한 결계가 파훼되고 나서 제가 르베나 공주를 보았을 때 현장은…….”

루드바하의 짙은 푸른 눈이 곧은 자세로 줄곧 세나르를 직시하는 르베나에게 향했다.

“수십 구에 달하는 키메라들의 시체, 그리고 공격 마법의 잔상이 뚜렷한 공간과 한 남성의 시체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그 마력의 주인, 베이라라고 추정합니다.”

그의 말에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루치아 공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베이라는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르베나에게로 향했다.

르베나는 루드바하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제1기사단에게 달려가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의 눈이 수십이었고 곧 궁 안에는 르베나 공주가 베이라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곧 루드바하와 가스트가 르베나를 만류하며 기사단을 대신 치유했지만 르베나의 손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본 사람들은 절대 그날의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회의장에는 그날 직접 현장에 있었거나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호기심과 경외감. 경멸과 불쾌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섞인 눈들이 르베나를 향했다.

곧 모두의 시선을 느낀 르베나가 시선을 돌려 루치아 공작을 향했다.

그러자 루치아 공작이 자그마한 입매에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가는 금세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어 말했다.

“공주님이 베이라라는 사실에 저희 모두 놀랐습니다. 한데… 이제 열 일곱살밖에 되지 않은 공주님께서… 수십 구의 키메라와 베이라인 성인 남성을 무참히 살해하셨다니……!! 저는 그 숨겨진 포악함과 광기가… 두려울 뿐입니다, 여러분.”

루치아 공작의 말에 회의장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그의 말은 모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 모든 시체가 르베나 공주의 짓이라고?”

“기사단이 한 게 아니고?”

“그러네!! 기사단이 어떻게 베이라를 죽이겠어!”

“아니, 저 여린 모습으로 살인을 했단 말인가!”

“맙소사… 끔찍해라.”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저 표정 좀 봐…….

“누가 애미 잡아먹고 태어난 자식 아니랄까 봐……!”

기사단과 루드바하 누구도 르베나가 쥬라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루치아 공작의 발언으로 연회장은 삽시간에 르베나에 대한 여론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론은 대부분 어둡고 부정적이었으며 한순간에 열일곱 살 소녀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극악무도한 살인범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려움. 경계. 환멸. 본능적인 거부감.

온갖 부정적인 느낌의 시선이 르베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루드바하가 제 주먹을 꼭 쥐고는 분노를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여전하군.”

채 그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 울려 퍼진 목소리에 모두의 호흡과 시선이 일제히 고정되었다.

이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르베나였다.

뚜렷한 목소리. 선명한 붉은색의 눈.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

르베나가 저를 향하는 시선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자 루치아 공작이 다소 높은 언성으로 르베나를 질책했다.

“공주님 언행을 자중하십시오! 지금은 공주님이 함부로 입을 열 때가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이 여전하다는 말입니까? 지금껏 본인이 베이라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숨긴 것도 모자라 잔인한 살육까지 하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일국의 공주를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제1기사단 중 누군가 공주님의 안위를 물으며 마지막 순간 그곳에 수십의 키메라와 베이라 그리고 공주님만 남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오… 맙소사 저희 모두가 감쪽같이 속았겠죠!! 하지만 저 역시 아직도 긴가민가합니다.”

마치 조금의 기회를 주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루치아 공작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대답해 보십시오. 정말 공주님이 그러신 겁니까? 공주님께서 그 베이라를 살해하고 수십의 키메라를 죽인 거냐 이 말입니다!!”

그의 말투는 격렬했고 절절했다. 마치 어리고 연약한 공주의 파괴성과 잔인함을 믿고 싶지 않다 절규하는 듯했다. 실제로 욕망과 감정에 솔직한 베이라들의 성지, 디오니스에서 왕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이 절제와 흔들리지 않는 감정 그리고 무분별한 살인을 금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엿보였다.

‘어서 말해. 네 입으로 말하라고! 네가 죽였다고. 네 손으로 잔인하게 그것들을 도륙했다고!!

이 모든 사람들한테 말하란 말야! 네가 얼마나 형편없는 베이라인지, 얼마나 제 감정과 욕망에만 충실한 베이라인지 모두 앞에서 말하라고!!’

그의 눈빛이 보내는 의미가, 의도가, 희망이 르베나에게 너무도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를 모두 차분히 눈에 담은 르베나의 얼굴에 헛웃음이 맺힌 건 순간이었다.

“결국 그게 궁금한 것인가… 하.”

르베나의 붉은 눈이 순간 싸늘하게 회의장을 훑었다. 르베나의 눈에 닿은 사람들이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제 몸을 문지르기 바빴다.

“그래, 내가 죽였다. 수십에 달하는 키메라와 베이라, 그것들을 모두 내가 죽였단 말이다. 이제 만족하나?”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에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세나르와 루치아 공작의 눈에는 엄청난 희열이 스쳐 지났다. 모든 진술이 그들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동시에 르베나의 답변에 싸늘해졌던 회의장에 순식간에 엄청난 동요가 퍼져나갔다.

궁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최근에는 가스트와 후벤에게 보호만 받던 공주가 베이라인 것도 믿을 수 없는데 사람을 죽이고 키메라들을 죽였다니!!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말이다.

귀족들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고작 열 일곱살에 사람을 죽인 공주의 잔인함이 놀라웠으며 수십의 키메라를 해치운 공주의 놀라운 마법 실력이 또한 두려웠다.

놀라움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와 경멸이 뒤섞인 눈빛들을 보던 르베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행했던 그 어떤 행동도 후회하지 않는다.”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치아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아… 정말 무섭고 두려운 분이시로군요!! 보통은 데뷔탕트를 치루어야 할 나이에 성인남성을 죽이고 수십의 키메라를 죽이다니……! 게다가 그렇게 두려운 마법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시고… 그 용의주도함과 잔인함을 가진 분이 이 디오니스의 공주라니……!! 아아… 신하된 자로서 저는 정말 두렵습니다. 이분이 디오니스의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오!”

루치아 공작의 발언에 꽤 많은 사람이 동요했으며 저마다의 말들을 앞다투어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내고자 르베나를 더욱 힐난하고 분위기를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권을 이은 공주가 뛰어난 베이라라는 사실 하나로 수많은 혼란과 가능성을 떠올렸고 이것이 곧 두려움과 공포를 낳았다. 제노스 왕이 사실상 많은 권한을 놓으면서 나눠 가졌던 자신들의 위치와 이익이 걱정되었고. 세나르에게 평생 줄을 댔던 그들의 가문이 한순간에 박살 날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루드바하의 눈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애써 참아내는 그의 감정을 한 톨이라도 안다면 저 겁쟁이들은 분명 바로 입을 닫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참아내는 이유는, 이렇게 화가 나도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누구보다 더 큰 감정을 느끼면서도 꼿꼿하게 앉아 있는 저 소녀, 르베나 때문이었다.

* * *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 루드바하는 르베나를 찾아갔다. 곧 있을 회의는 르베나에게 또다시 많은 상처를 남길 것이 뻔했다. 그리고 루드바하는 이를 그냥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르베나의 외궁은 주인을 닮아 여느 때처럼 조용했으며 온 궁의 사람들이 저를 두고 수근 대는데도 르베나는 남의 일인 양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안심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다른 한쪽이 아릿해져 와 루드바하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삼켰다.

“오늘 회의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순간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르베나가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호의가 담겨 있다 생각하면 그만의 우스운 착각일까 두려워 그는 애써 르베나의 눈을 피했다.

그런 루드바하를 잠시 제 눈에 담은 르베나가 말했다.

“유파시드의 염려, 감사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뜻하지 않는 르베나의 부탁이라니! 루드바하는 순간 심장박동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르베나의 부탁. 굳이 듣지 않아도 뭐든 다 들어주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나르를 왕비의 자리에서 내려달라 할까? 만약 디오니스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하면 젠의 속국으로 들여 르베나에게 처신을 맡기도 나쁘지는 않겠지. 드록은 당연히 방해가 될 테니 적당히 치워버리고 또…….’

다른 세츠들이 들으면 기함할 만한 생각에 이른 루드바하의 얼굴이 즐거운 상상들로 고조되어갔다.

하지만 들려온 르베나의 말은 그의 모든 상상을 처참하게 부숴 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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