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43화 (43/276)

43화

제1장 디오니스 (42)

루드바하는 곧바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텔레포트를 했다.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대한 집중해 그녀를 찾아내려 했다.

르베나의 힘, 르베나의 마력, 르베나의 기운을.

하지만 숲속 전체에 결계가 쳐있는 것인지 여기저기 흩어져 느껴지는 마력 때문에

몇 번이나 잘못된 곳에 도달하고 말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몇 번이나 도착한 곳에 르베나가 없자 순간 루드바하답지 않은 거친 말이 허공을 울렸다.

본인의 안일함에 치가 떨릴 정도의 짜증이 올라왔다. 아무리 유파시드라 하여도 익숙한 마력이나 신력이 아닌 이상 누군가의 위치를 단숨에 알기는 힘들었다.

익숙하게 겪은 마력, 신력이거나 또는 상대방이 마력이나 신력을 개방한다면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 르베나는 마력을 쓰고 있지 않거나 써도 위치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의 정도만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숲속에 쳐진 결계의 마력이 자꾸만 그의 집중을 흐트러 놓았다. 결국 몇 번의 실패 끝에 결계 전체를 아예 파훼시키기 위해 결계에 손을 대고 잠시 힘을 느끼던 루드바하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순간이었다.

‘상당히 깨끗하지 않은 마력인데? 아니 이게 마력이 맞긴 한건가.’

결계에 닿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의 기이함에 그의 눈에 묘한 의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결계를 친 마력에 이상함을 느끼자 곧바로 혼자 남았을 르베나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알아놓을 걸… 하아… 젠장.”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루드바하의 푸른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몇 개월 전 처음 그녀의 존재를 느낀 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제국으로의 격상 선포만을 남겨둔 채 오랜만에 혼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루드바하는 생각지도 못한 강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아주 멀리 있어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깨끗하고 강한, 그러면서도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를 만큼 뜨거운 마력.

루드바하는 그 마력을 느끼자마자 망설임 없이 첫 번째로 방문할 왕국을 정했다.

동쪽에 위치한 베이라들의 성지, 디오니스.

어쩌면 그곳에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누군가가 존재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모든 일에 무심한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잔뜩 높아졌던 기대와는 달리 처음 디오니스에 도착한 루드바하는 누구에게서도 그가 찾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디오니스의 왕도, 후계자라는 드록도 모두 그가 찾던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엄청난 실망만큼의 조바심이 그를 삼킨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들린 드록의 방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짙고 풍성한 검은 머리.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약간 위를 향한 티 없이 짙은 붉은 눈동자. 단정하지만 적당히 도톰한 붉은 입술.

그리고 차가운 표정의 그녀, 르베나를.

순간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드록의 방에서 매를 맞고 지쳐있는 시녀를 보고 뿜어져 나왔을 찰나의 힘. 그게 그가 젠에서 느꼈던 강렬한 마력이란 걸. 그리고 그녀가 바로 그 마력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에 그리고 다시 한번 그 힘을 확인하고 싶었던 갈급한 마음에 루드바하는 그녀를 찾게 되었다.

열일곱 살의 공주, 르베나 드 디오니스.

하지만 생각 외로 그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는 감정에 휘둘려 조금의 마력을 내보이는 일도 없었고 그조차도 놀랄 정도의 실력으로 마력을 꽁꽁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드바하는 그렇게까지 조심하는 르베나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녀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때로는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때로는 르베나가 힘을 그렇게 제어할 수 있음에 대견함을 느끼기도 했다.

르베나를 마주하는 루드바하는 언제나 이런 복합적이고도 낯선 감정들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가 마주하는 르베나는 루드바하와는 달리 언제나 한결같았다.

무감정한 표정. 짧은 대화 속 느껴지는 극심한 무관심.

아주 간혹 보이는 탐색과 의심의 눈초리.

그럼에도 그는 르베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살던 루드바하로서는 르베나와의 시간은 언제 겪어봤는지 모를 편안함이었고 또다른 설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는 르베나의 작은 감정의 조각들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아한을 보면서 작게 지어지는 입가의 미소. 사나와 후벤, 가스트를 볼 때면 아주 잠시나마 스쳐가는 온기 어린 눈빛.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찰나 스쳐 가는 아련함과 고통.

그런 것들이 어느새 그의 눈에도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그를 향해 비추는 그녀의 감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를 보면서 웃는 얼굴은 어떨까? 화를 낸다면? 짜증을 낸다면? 토라진다면? 행복해한다면?

르베나의 표정들을 상상하며 궁금해하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도 낯설었지만 그 느낌들이 퍽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의 그녀라는 것이 문제였다.

드록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붉은 피로 점칠 된 그곳에서 그녀의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은 땀과 피에 절어있었고 원래도 하얀 얼굴은 창백하리만치 질려있었다.

가녀린 듯 균형 잡힌 몸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루드바하는 모든 이성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에 묻는 피가, 그 창백한 얼굴이, 곧 쓰러질 듯 헐떡이는 호흡이

눈에 거슬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앞에서 웃고 있는 드록을, 그 앞에서 태평하게 차나 훌쩍이는 이아린 공녀를,

르베나를 보고만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유파시드가 되고 처음으로 자신의 자질이 의심될 만큼의 강한 살의를 느낀 순간.

가녀릴 것만 같았던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정확하면서도 일정한 선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짜릿한 선으로.

간결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는 움직임으로, 그녀의 동작은 스스로의 손에 칼을 쥐게 하였고, 순식간에 그녀의 칼을 드록에게 겨누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웃었다.

어느 때보다 환하게,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다해, 어느 때보다 아찔하게.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알 수 없는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킨 건 단순히 작은 돌멩이가 아니었는지 그 물결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파동은 어느새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뛰쳐나가게 할 만큼 굽이쳤고, 그녀가 없는 숲속에 들어서자 이성을 잃을 만큼의 신력을 방출하게 했으며, 그녀 없이 텔레포트 된 기사들을 보자 참을 수 없는 살의마저 느끼게 하였다.

언제나 여유롭고 언제나 안정적이던 그를 이렇게 조바심 나게, 이렇게 초조하게 만든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저기인가.”

숲속의 결계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루드바하는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갈구했던 그 뜨겁고 강렬하며 아찔하리만큼 아름다웠던 마력의 파장이 지금 그를 부르고 있음을.

“차라리 죽여…….”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제 몸에서 뿜어진 피 웅덩이에 간신히 누워있는 쥬라가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건 애원의 또 다른 형태였다. 힘겹게 치켜 올라간 쥬라의 눈이 더 위를 향하자 붉은 눈동자가 제게 싸늘하게 박혀 왔다.

아직 어린 소녀라고 하기엔 더없이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잔인하기까지 느껴지는 눈.

벌써 셀 수도 없이 증거를 내놓으라며 쥬라를 회복시키고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한

르베나를 보며 어느덧 쥬라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쥬라를 흘끗 내려다본 르베나가 문득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이제는 그만 끝을 내야 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르베나가 마력을 모으자 오른손 가득 검붉은 마력이 발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빛을 발할수록 르베나의 어깨 위 나팅이 마치 이에 반응하듯 작은 귀를 팔랑거렸다.

곧 끝이 다가올 것을 예감한 쥬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런 쥬라를 보던 르베나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너는 삶의 목적을 처음 세운 나에게 처음으로 그 목적의 일부분을 앗아 갔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보내 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삶의… 목적?”

쥬라는 끔찍한 고통에 더 이상 삶의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어리고, 이토록 강한 베이라가 가진 삶의 목적은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궁금했다.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베이라다웠다.

“그래, 내 삶의 목적. 나를 지키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 말이다.”

쥬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르베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손에서는 폭사하듯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얼핏 따뜻하기도 또 선연한 날카로움에 닿은 듯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쥬라는 그 이상의 생각도,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르베나… 공주님.”

숲속에서 기사들을 치유하던 가스트는 순간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의 파장에 고개를 들고 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강대한 힘, 깨끗한 성질, 하지만 어딘가 뜨겁게 느껴지는 강렬한 파동.

르베나의 마력이었다.

“끝이 났나 보군요. 그런데 어째서 이리도… 슬프게 느껴지는 건지.”

르베나의 마력을 느끼던 가스트가 잠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군더더기 없이 느껴지던 르베나의 마력에서 이질적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없이 슬프고 절망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폭발적으로 느껴지는 생명력.

그 무언가가 지금 가스트의 가슴께를 묵직하게 눌러 왔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에 그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루드바하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키메라의 시체들. 그리고 강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에서는 엄청난 피 웅덩이와 함께 모든 생기를 빼앗긴 것 같은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숲의 끝, 절벽 위에 홀로 서 있는 한 소녀가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멀리서 뜬 해를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이었다. 가늘게만 보이는 몸은 이미 상당히 지친 듯 보였다.

언제나 풍성하고 윤기 좋던 검은 머리칼은 푸석푸석한 채로 바람에 휘날렸고 누군가의 피가 잔뜩 묻어난 검은 그녀의 옆에 버려지듯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순간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루드바하는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곳에 가득 남아 있는 그녀의 마력을 느끼자마자 이번에는 끝없는 희열이 그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목이 꽉 조여올 만큼 답답하고 가슴께가 묵직한 감정 역시도 그를 서서히 잠식해갔다.

그의 눈에 비친 르베나의 모습은 몹시도 불안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력을 찾았다는 희열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이름 모를 조바심과 초조함이 그를 옥죄여왔다.

그래서일까. 본인도 모르게 빠르게 걸음을 옮긴 그가, 마치 곧 사라질 안개라도 잡듯 조바심이 뒤섞인 동작으로 르베나의 팔을 잡아챈 것은.

휙.

갑작스러운 힘에 그녀의 몸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 갑작스러운 대면에 얼굴이 구겨진 건 르베나가 아니었다.

“어째서…….”

르베나를 바라본 루드바하의 눈이 짙은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루드바하는 르베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다. 크고 흰 그의 손이 어쩐지 조금은 떨리는 듯했고 그 떨림보다도 조심스러운 손길은 르베나의 얼굴에 비로소 닿았다.

투둑, 투둑.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르베나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그 눈물에도 그녀는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다는 듯 제 두 손을 꼬옥 쥐고만 있었다.

“…하.”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얼굴에, 눈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온몸이 말 못 할 슬픔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차마 표출해내지 못하는 아픔을 겨우내 참으며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르베나의 모습을 떠올리자 루드바하는 어쩐지 못 견디게 가슴이 아파 왔다.

루드바하가 살며시 손을 높이 들어 르베나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레 감쌌다.

그러고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르베나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다가갈 거리가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조심히, 또 아주 살며시 르베나의 허락을 구하듯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지금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루드바하의 말이 르베나의 머리맡에서 나직이 울렸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품고도 남을 듯 넓고 따뜻했다.

그의 가슴께에 안겨있던 르베나의 몸이 순간 툭, 풀린 채 그에게 기대어 왔다.

“…싶었는데……. 나는… 그… 싶었, 는… 데.”

들리지도 않을 만큼 짜내지는 목소리에 루드바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곧 그가 조금 더 세게 제 품 안의 르베나를 안았다. 그러자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그의 가슴께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흐윽… 모두… 지켜 줘야 했는데… 내가… 흑, 믿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어리, 석어서… 흑… 그래서… 그래서 모두를… 잃어버렸어… 흑…….”

혼자 나지막이 내뱉는 르베나의 아이 같은 말에 루드바하는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이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수십 구의 키메라, 죽은 베이라의 시체, 텔레포트되어 돌아온 기사들.

열일곱.

아직은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기에 어린, 아직은 누군가를 대신해 목숨을 걸기 어린 나이. 본인을 대신한 누군가의 목숨이 더없이 무거울, 본인을 위한 누군가의 희생이 두려울 만한 나이.

하지만 열일곱 그녀는 하루 만에 그 모든 것을 겪어야 했다.

본인을 대신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그들의 희생을 봐야 했으며 결국 그들을 대신해 홀로 적들과 맞서기로 했다.

루드바하의 손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소녀였다.

찾으면 어떤 고생도, 어떤 아픔도 없이 지켜 주리라 수없이 맹세한 존재였다.

그 어떤 세상에서라도 그녀만은 지켜주고자 다짐했다.

그런데 열일곱의 소녀는. 그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소녀는. 그가 안고 있기에 너무나 뜨겁고 그보다 아파져 버렸다. 그래서 르베나를 안고 있는 루드바하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나 그를 지탱하는 몸은 서서히 분노로 떨리고 있었고 언제나 부드럽게 풀려있던 그의 벽안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만남을 가슴께에 물들어가는 르베나의 눈물로 시작해야 하는 지금이 끔찍이도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늦게 그녀를 찾은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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