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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왕녀, 르베나-42화 (42/276)

42화

제1장 디오니스 (41)

조금 전 르베나가 누워 있던 자리 주위로 어느새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르베나를 지키다가 그 주위에서 쓰러진 탓에 그들을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르베나가 앞을 바라보자 마치 벽처럼 높은 화염이 거세게 타오르며 그녀의 시선만으로 더 높은 장벽을 만들어 냈다.

장벽을 확인한 후, 르베나는 빠르게 기사들에게 다가왔다. 동시에 활활 타오르는 불의 장벽과 르베나를 번갈아 보던 다한이 말했다.

“공주님, 혹시라도 무리가 되시는 일이라면 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공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저희에게 치욕과도 같습니다!”

다한에 이어 이어진 룬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언제나와 같은 무감각한 눈빛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감정과 못 다한 말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 다한과 룬이 순간 할 말을 잊을 정도로.

고개를 저은 르베나가 천천히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며 감정을 최대한 지웠다. 적어도 지금은 이 넘실거리는 감정들을 지워 내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평소의 무표정을 지어낸 르베나가 다한과 룬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의식이 깨고 나서 거의 모든 마력이 돌아온 기분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운데 서. 나도 무리하면서 뭘 하고 싶지는 않으니.”

르베나의 말에 다한과 룬은 잠시 망설이다 가운데로 가 섰다. 지금 르베나의 상태가 결코 거짓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쥬라를 향해 날린 마법들과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거센 불의 장벽. 그리고 창백하던 혈색 마저도 어느새 평상시처럼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걸리는 건 한 가지.

“저… 털뭉치는 어째서……?”

당연히 이젠 사라졌을 줄 알았던 털뭉치 키메라가 어느새 당당하게 르베나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티끌만 한 어깨를 편 것같은 느낌까지 풍기며.

룬의 말에 제 어깨를 흘낏 바라본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해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지.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

르베나의 시선이 누워있는 기사들에게 향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는 위급한 기사들의 모습이 아프게 박혀왔다. 이에 다한과 룬 역시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곁으로 갔다. 지금 잠시의 지체가 저들에게는 목숨을 앗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곧 르베나가 그들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두 손 가득 환한 빛의 마력을 끌어 모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마력이 일행 모두를 감쌌다.

그 빛은 따뜻하고 아늑했으며 기사단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감싸 안으려는 굳은 의지마저 느껴졌다. 곧 르베나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대들에게 치욕일 줄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날 부디 용서하길.”

르베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무리를 향해 쏘아지며 넘실거렸고, 다음 순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르베나의 말에 놀란 얼굴로 무언가 다급히 말을 하려던 다한과 룬도. 그리고 르베나의 마력이 주는 느낌에 잠시 편안함을 느끼던 부상당한 기사들도. 이미 생을 다한 기사들까지도.

오직 한 사람.

깊은 산의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르베나만이 복잡한 눈빛을 돌려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키메라와 그 옆에 실성한 듯한 쥬라를 노려볼 뿐이었다.

진짜 싸움의 시작이었다.

루드바하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마법으로 속도를 더한 그의 걸음은 말이 걸음이지, 평범한 사람은 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의 속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조바심에 더 속력을 내는 루드바하의 손에는 어느새 긴장으로 땀이 고여 갔다.

언제나 변화 없는 표정. 무감각한 붉은 눈. 풍성하게 굽이치는 검은 머리.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그녀의 눈만큼이나 붉은 입술.

그리고… 아찔하게 웃던 그 미소까지.

곧 제 손을 더 꽉 쥐며 속력을 내던 루드바하가 움찔하며 갑자기 멈추었다. 빠르게 이동하다 멈춘 탓에 그가 멈춘 주변으로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그리고 비슷한 속도로 뒤따라오던 라웅과 가스트 역시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의 곁에 멈추어 섰다.

모두가 멈춰선 그때, 눈앞의 허공이 엄청난 힘의 파동과 함께 일그러지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순식간에 모습을 나타냈다.

“…텔레포트!”

가스트의 나지막한 탄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는 이가 유파시드와 실력 있는 베이라가 아니었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왜냐하면 이 허공의 틈에서 나타난 건 한 명의 사람이 아닌 열 명의 기사단과 시녀 루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행을 감싼 마력의 흐름은 안정적이었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타난 그들의 꼴은 가히 처참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이미 사망한 자들이 몇이나 되었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루는 기절을 한 것인지 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무사해 보였다.

기사단 역시도 갑작스러운 텔레포트에 이어 눈앞에 나타난 루드바하와 라웅, 가스트를 보고는 놀랐을 터였다. 하지만 몇 명의 의식 있는 기사들은 그들의 등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듯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공주는?”

여느 때보다 차갑게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물어오는 루드바하의 물음에 움찔한 그들이

이내 이를 악 다물고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한 허탈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긴 듯한 절망 어린 표정이었다.

차가운 아침의 공기 속 절망에 젖은 다한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어째서… 어째서……!!”

포효하는 듯한 그의 처절한 외침이 아직 차가운 공기를 거칠게 진동했다.

* * *

촤악. 솨아악.

한번 베어지는 은빛의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붉은 피가 허공에 뿌려진다. 한번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의 빛에 여럿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툭. 투툭.

마지막 키메라까지 처리하고 난 르베나가 칼날에 묻은 질척한 피를 털어냈다.

저벅저벅.

그리고 바닥에 누워 이제는 거의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쥬라에게 다가섰다.

순간 르베나의 발이 거칠게 쓰러져 있는 쥬라의 몸을 밀쳐 냈다.

“으윽……!!”

그녀의 자비 없는 발길에 강제로 바로 눕게 된 쥬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어느새 뜬 해를 뒤로한 채 검은 머리가 제 위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체엣… 겨얼… 국은… 크크크… 죽여… 라.”

말을 할 때마다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를 힘겹게 삼키며 쥬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감흥없는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던 르베나가 발로 쥬라의 상처 부위를 짓밟았다.

“아악!!”

엄청난 고통에 쥬라가 잔뜩 충혈된 눈을 크게 뜨며 충격으로 제 몸을 구부렸다.

“세나르의 명인가?”

지독히도 차가운 르베나의 말에 쥬라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 고통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하지만 르베나가 발에 더욱 힘을 주어 누르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쥬라가 그제야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는?”

르베나의 물음에 헉헉 숨을 몰아쉬던 쥬라가 두 눈을 가까스로 뜨며 답했다.

“어차피… 죽을 거… 거기까지 말할 줄 알았냐… 크크…….”

이어지는 쥬라의 말에 순간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쥬라의 몸속에 제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행동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아닌 쥬라였다.

왜냐하면 제 몸속에 들어온 르베나의 마력으로 쥬라의 상처 일부가 치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놀라는 것도 잠시,

“지금 이게 뭐하는……! 아악! 이 미친 공주야!!”

다시금 쏟아지는 공격적인 마력에 쥬라가 이번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이 미친것아!! 죽이려면 그냥 죽여!!”

악에 받친 쥬라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허공을 갈랐다. 르베나가 쥬라의 상처 일부를 치유하자마자 보란 듯 다시 상처를 낸 탓이었다. 마치 너는 내 허락 없이 죽지도 못한다는 듯.

자신을 그냥 죽이라는 쥬라의 말에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그와 눈을 맞출 만큼 제 고개를 낮추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싫은데? 그러니까 이제부터 닥치고 잘 들어. 이제부터 네가 겪게 될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들려줄 테니까.”

언젠가 들었던, 아니 했던 것과 같은 말이 르베나의 입을 통해 태연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쥬라의 얼굴은 점점 어둡고 고통스럽게 변해 갔다.

이 여자는 미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산속을 가득 메우던 쥬라의 결계는 깨끗이 없어졌다.

“르베나 공주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차갑게 박혀 오는 루드바하의 물음에 다한이 순간 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질문에 예상되는 답변을 차마 제 입으로 뱉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이렇게까지 수치스럽게, 르베나 공주가 거기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다한뿐 아니라 룬을 비롯해 아직까지 의식이 남아 있는 기사들이 모두 침묵하자 가스트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유일하게 가스트를 불안하게 했던 가능성.

‘아무리 뛰어난 베이라라 하여도 수많은 이를 보호하며 싸우기는 힘들지 않을까?’

잠시 스친 그의 기우가 결코 기우가 아니었음에 그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살기가 그들 모두를 빠르게 휘감았다. 그 짙은 살기에 안 그래도 큰 부상을 입은 기사들은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고 의식을 잃은 이들조차 꺽꺽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폐하!! 이들은 환자야!!! 뭐 하는 짓이야?”

순간 들려온 라웅의 외침만 아니었다면 뻗치던 그의 살기는 어디까지 갔을까.

“결국… 결국 그분은 그대들을 구하고 남으신… 겐가.”

침통하게 이어진 가스트의 말에 기사들은 아직 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제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더욱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면목이 없었다.

르베나를 지키겠다 맹세하고 떠난 기사단 열 명 전원이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어 지켜야 할 그녀만을 그곳에 두고 왔다는 걸. 이것이 자의가 아니라 르베나에 의한 것이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켜야하는 이들에서 지켜져야 하는 이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몫을 모두 떠안게 된 것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어리고 어린 공주였다.

죄책감과 무능력함.

이루 말할 수 없는 패배의 기운에 절어있는 기사단을 싸늘한 눈으로 훑은 루드바하가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저기 어딘가… 홀로… 있는 건가, 르베나 공주.’

“가스트, 그대가 이곳에서 이들을 치료하게. 라웅은 남아 이들을 도와라. 공주는 내가 맡지.”

간단한 말만 툭 던진 루드바하는 가스트와 라웅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이에 당황한 것도 잠시, 가스트가 공기 중 남아 있는 신력의 잔상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어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보다는 더 큰 힘을 지니셨으니… 믿겠습니다, 유파시드여. 부디 그분을… 외로운 싸움에 익숙해지신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가스트의 말에 함께 남겨진 라웅 역시#이미 자취를 감춘 루드바하에게 한마디를 보태었다.

“폐하. 이럴 거면 나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응? 대답 좀 해 보라고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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