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제1장 디오니스 (40)
순간 육체가 아닌 어딘가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그 충격에 반응하듯 르베나가 힘겹게 눈을 떴다.
뚝. 뚜둑.
눈을 뜨자마자 르베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 빛에 휩싸인 순간, 그녀를 부르며 울부짖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숨이 헐떡여질 정도로 무거운 가슴을 부여잡고 온 얼굴이 적셔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레 대면한 이전 시간의 마지막 기억은 르베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그렇게 몰아쳐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끼융~ 끼유웅.”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포근한 무엇인가가 르베나의 눈가를 덮었다. 잠시 어두워졌다 밝아진 시야에 르베나의 눈이 자신의 눈을 닦아준 듯한 옆의 존재를 향했다.
“…털뭉치…….”
나팅이라 불리던 키메라 털뭉치가 제 날개 같은 것으로 르베나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키메라. 마력의 흡수. 그리고……!!
“…쥬라!!”
순간 벌떡 일어선 르베나가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미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도대체 이게…….”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듯 그녀의 주위로 널부러진 기사들이 보였다.
이미 처참하게 숨이 끊어진 자들도. 보기 힘들 만큼의 상처를 입은 자들도. 마법으로 움푹 파인 땅 속에 반쯤 파묻힌 이들도.
기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그녀를 감싸는 모양새로 르베나 주변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두 개의 그림자가 르베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공… 주님!!”
“다한… 룬 경.”
기사 다한과 룬이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의 몰골로 르베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지금 이렇게 말을 하며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처참하고 심각했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다한과 룬이 르베나가 괜찮은지 빠르게 훑고는 말했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그런데 공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지금 기사들 대부분이 전투 불능 상태입니다. 만약 공주님께서 키메라 때문에 마력이 없으신 상태라면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러니 도망가십시오!!”
‘막… 겠다고……?’
그들의 상태는 장난으로라도 누굴 막고 말고 할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기적이랄까? 그리고 그때 이 순간 르베나가 제일 듣기 싫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이런이런… 기사님들을 모두 보내 드리고 나서 해치울 작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깨어나셨네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르베나의 눈이 그곳을 향했다.
그녀의 분노한 눈이 그를 향하는 순간, 차가운 살기가 쥬라의 전신을 빠르게 에워쌌다.
“이 숲 근처일 것 같습니다.”
나지막한 말에 벽안의 시린 눈빛이 무감각하게 향하자 가스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하렌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고 그 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열 명의 기사단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들 모두 연락이 어려울 만큼 위험에 처하고도 발각되지 않을 위치는 이곳뿐입니다.”
가스트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이 차갑게 숲을 향했다. 그리고 순간, 엄청난 양의 신력이 사방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솨아아---.
갑작스러운 바람에 숲속의 가지들이 신음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스트가 넋이 나가 바라보는 순간 루드바하가 짙게 가라앉는 푸른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쪽,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루드바하는 작은 소리로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라옹이 작게 한숨을 내어쉬고는 역시나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가스트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의문을 표했다.
“누구의 공주님인지… 모를 일이군.”
그렇게 중얼거린 가스트 역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조금 전까지 세 사람이 서있던 땅에는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악!!!”
고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와 함께 쥬라가 울컥 피를 토하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쿨럭.
조금 전 눈이 마주치자마자 엄청난 살기를 뿌리며 날아온 르베나의 마법에 쥬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울컥울컥.
자꾸만 뿜어져 나오는 피가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여기까지라고.
“내가 잠든 동안 잘도 이 난리를 쳐 놨군.”
하나하나 짓씹는 듯한 르베나의 말에 쥬라가 퉷 피를 뱉어 내고는 말했다.
“곤란하군… 아주 곤란해… 나팅과 계약을 맺은 베이라라니… 이건 아주 곤란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르베나의 물음에도 쥬라는 다음 말을 하지 않고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자 중얼 거렸다.
“나팅, 나팅이라니… 불가능한데… 아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혼자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쥬라는 꼭 미친놈 같았다. 나팅에게 거의 대부분의 마력이 빼앗겼을 거라고 생각한 르베나가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져.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마력을 보유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기 때문이었지만.
그리고 그 순간, 쥬라의 곁에서 미세한 살기가 느껴짐을 르베나는 기민하게 알아챘다.
하나, 둘, 셋…….
열댓 마리의 키메라가 안광을 빛내며 나타나 연신 혼자 중얼대는 쥬라의 곁에 선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잘게 제 입술을 깨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 불능의 기사가 여덟 명. 다한과 룬 경 역시 키메라를 상대하기엔 상태가 좋지 않아.’
그렇게 르베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전 투가능 인원을 체크하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공주님,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키메라는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아직 마력이 남아 계시다면 망설이지 말고 도망치십시오!! 저희가 키메라를 상대할 때가 적기입니다.”
여기저기 맨살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상처 입은 두 사람의 넓은 등이 보였다.
그리고 더없이 처참하게 상처 입은 그들의 등을 보는 순간 르베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다한과 룬… 그리고 제1기사단. 이제는 안다. 그들이 누구인지.
마지막까지 르베나를 지키기 위해 수 만의 적군과 용맹하게 싸웠던 후벤을 위시한 소수의 디오니스 기사들. 그들이 바로 지금 다한이 이끄는 제1기사단이었다는 것을.
르베나와 딱히 접점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주군에 대한 충의와 후벤에 대한 무한한 믿음만으로
수만의 적군 앞에 그들의 목숨을 내놓았다. 엄청난 수에 밀려 하나 둘 목숨을 잃을 때에도 그들은 결코 꺾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세츠들 앞에서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디오니스를 피와 살로 지키겠다 맹세한 왕국의 기사들 답게 힘없이 전장에 뛰어든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자신들의 팔과 다리 그리고 온몸으로 보호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충의를 맹세한 주군, 르베나를 위해 기꺼이 검붉은 피를 내놓았다.
그때의 흐릿한 기억 속, 처참히 죽어 가던 다한과 룬의 얼굴만큼은 지금 르베나의 머릿속에도 선명했다. 그들 대부분이 제법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드바하의 명을 듣지 않고 쏟아지는 연합군에 의해 결국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르베나가 ‘다니아’를 쓰기도 전, 적군의 칼날과 마법에 생을 다하였다.
무엇보다 르베나가 그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한과 룬은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자신들의 품에 안으며 전사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보호하고자 했던 그들의 정신을 왕으로서의 르베나는 그날 그곳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너희들은 또다시 나를 지키는군…….’
자꾸만 붉어지려는 눈시울에 르베나가 다시 한번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피 내음이 조금은 르베나의 감상을 지워주는 듯했다. 곧 르베나가 자꾸만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짓누르며 그들에게 말했다.
“부상자들과 전사자들을 한곳으로 모으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들려온 르베나의 말에 다한과 룬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앞에서 으르렁거리며 아직 다가오지는 않는 키메라에게 시선을 두고 검을 바로 잡으며 물었다.
“그건 어째서 물으시는 겁니까.”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
“대규모 텔레포트로 이곳을 벗어난다. 전투를 지속하기에 너희 둘의 상태로는 쉽지 않아.”
르베나의 말에 둘의 몸이 흠칫 떨렸다.
“대… 규모 텔레포트라구요?”
떨려오는 룬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혼자서 하는 텔레포트도 가스트 정도의 대마법사가 아니면 힘들다 들었다. 그런데 이 많은 인원을 동시에 텔레포트 한다고?
룬의 반응을 당연하다 생각한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를 믿어라. 지금 우리에겐 이미 죽거나 다친 기사들이 많아. 이 상태로 저것들 모두를 완벽하게 상대할 순 없어. 그러니 내가 키메라의 발을 묶을 동안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모두를 한곳으로 모아!”
“모두라 하시면…….”
룬의 말에 르베나가 마음의 고통을 참듯 제 손을 한번 꽉 쥐고는 말했다.
“…전사자까지 모두.”
순간 르베나의 싸늘한 눈이 앞에 선 키메라들을 향했다. 키메라들은 쥬라의 위험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나선 듯했으나 흑마법의 원천인 그들은 주인의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르베나의 기세에 머뭇거리던 룬에게 다한이 이내 결심한 듯 명했다.
“방법이 없다. 공주님을 믿고 모두를 모으자!”
다한의 말과 동시에 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한 역시 르베나와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힘과 속도로 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들에게는 고통이었겠으나 방법이 없었다.
르베나의 말대로 그들이 버텼다가 무너지면 르베나가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정의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키메라들이 쥬라의 명령을 들은 것인지 달려들기 시작했다. 르베나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빠르게 큰 화염 마법을 날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붉은 마력은 손에서 뻗어나가더니 곧 멋들어진 모습으로 거세게 불타올라 그들과 키메라들 사이에 화염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할 만큼 몸이 가벼워. 마치 마력이 계속 충전되는 것처럼……!’
제 손에서 나간 마력을 보며 르베나가 생각했다. 분명 저 털뭉치한테 마력을 모두 빼앗겨 기절한 상태였는데 어째서 몸 안에 이토록 충만한 마력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르베나가 마력을 쓸 때마다 왜 저 털뭉치는 작은 소리를 내며 힘들어하는 것인지.
‘하지만 일단 생각은 나중이다……!’
엄청난 규모의 화염 마법에 겁먹은 키메라들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사이에도 쥬라는 계속 혼잣말을 하면서도 연신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추가 공격을 하지 않아도 곧 죽을 모양새였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를 결코 그냥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전의 시간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르베나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
심지어 이번 기회에서조차 지켜주지 못해 이미 세상을 떠난 기사들을 위해서라도 쥬라를 이대로 곱게 놓아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공주님 모두 모았습니다!”
어느새 들려오는 소리에 르베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부쩍 지친 다한과 룬과 함께 한데 모여 있는 기사단을 보며 르베나의 붉은 눈이 어둡게 빛났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