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40화 (40/276)

40화

제1장 디오니스 (39)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르베나는 온몸의 마력을 한 톨도 남김없이 그려 모았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해서. 곧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마력이 모아졌다고 생각한 순간, 르베나는 기억해 두었던 주문을 차분하게 외우기 시작했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인정받은 디오니스의 왕이자, 신성한 혈통의 후계자, 나 르베나 드 디오니스가 명한다. 태초부터 시작된 신성한 계약을 지금 이곳에서 행하라. 내가 명한다. 그대여! 피와 생명으로 이어진 우리와의 약속을 기억하라!!”

작게 주문을 되뇌며 눈을 번쩍 뜬 순간 세상을 반으로 쪼갤 것 같은 엄청난 힘이 공간 가득 몰아쳤다. 하늘이 온통 어둡게 변했고 구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늘에는 해도 달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칠흑 같은 어둠에 모두가 놀라 하던 논쟁과 싸움마저 멈추었다.

그러고는 마치 인간본연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만 같은 원초적 공포에 한순간 사로잡혔다.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한 것처럼 모두 두려움에 사지를 벌벌 떨었고 큰 천둥소리처럼 들려오는 어느 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들려온 소리는 고막을 찢을 것처럼 컸지만 아주 멀리서 오는 소리같이 막연하기도 하였고

또 마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같이 선명하기도 했다. 정체를 모를 소리가 그렇게 모두의 머릿속을 윙윙 울리며 그 뜻을 전한 것은 그때였다.

“나를 깨운 자 누구냐.”

천둥 같은 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성도 여성의 것도 아니었고 인간도 동물의 소리도 아니었다. 공기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공명시키듯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가 들고 있던 무기마저 떨어뜨리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엄청난 힘에 압도된 것은 루드바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엄청난 힘의 존재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었다.

“드래… 곤……?”

태초부터 세상을 다스렸다는 신적인 존재.

세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녔지만 어떠한 이유로 오래전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드래곤은 이제 신화속의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런 존재가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유파시드, 루드바하의 입을 통해 거론된 것이다.

“오호… 나를 아는가.”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정말 드래곤이란 말인가. 압도적인 기백이 공간을 가득 채운 그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의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드, 드래곤을 부리는 마법… 다니아……?”

그 소리를 들은 모두의 눈이 일시에 르베나를 향했다. 예부터 디오니스에는 엄청난 힘을 가진 무기가 존재한다고 알려졌다. 어느 누군가는 그게 대량 학살을 일으킬 만큼 무서운 힘이라 했고 누군가는 고대 드래곤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오직 디오니스의 왕만 사용할 수 있지만, 누구도 사용법을 모른다는 전설의 무기, ‘다니아’.

그 전설이 지금 누군가의 입을 통해 거론된 것이다.

모두의 시선에 맞춰 드래곤의 시선도 단상 위 르베나를 향했다. 그의 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디오니스의 후계자여… 나를 부른 것이, 흠… 그대인가?”

모두가 경악에 차 르베나를 보았다. 루드바하마저 떨리는 벽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태연하게 답했다.

“그대를 부른 것은 나, 디오니스의 후계자 르베나 드 디오니스다.”

한쪽 입가에 선연한 피를 흘리며 답하는 그녀의 말에 연합군의 모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모든 세상을 입김만으로도 먼지로 돌릴 수 있다는 드래곤을 부르다니. 도대체 저 자그마한 소녀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 곧 그녀가 드래곤에게 어떤 것을 부탁할지 예상이 되어 놀라야 하는 건지

모두들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는 만큼 두렵고 낯설다는 것은 모두를 지배하는 공통된 감각이었다. 르베나의 태연한 모습을 본 드래곤이 매우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디오니스의 초대 왕과 이런 계약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누군가 나를 부를 줄은 몰랐다. 재미있군. 그래, 너는 이 계약의 조건을 알고 부른 것인가?”

그의 말에 르베나가 바로 답했다.

“알고 있다.”

그녀의 대답에 드래곤이 흡족한 듯이 물었다.

“좋다. 소원을 말하라, 디오니스의 후계자여. 나는 초대의 신성한 계약에 따라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 흠… 상황을 보아하니… 여기 있는 잔챙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그대의 소원인가?”

말과 동시에 드래곤의 눈이 모두를 한번 훑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공간을 지배했다.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곧 닥쳐올 위기에 몸을 떨었다.

‘저 마녀가 기어코 우리 모두를……!!’

하지만 그때 들려온 르베나의 대답은 이런 모두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이의 죽음이 아니다.”

르베나의 대답에 디오니스의 백성들과 연합군들 심지어 루드바하조차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역시 놀란 듯 잠시 말이 없다가는 다시 물어왔다.

“흐음… 이 잔챙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다면 디오니스의 어린 왕이여,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드래곤이 조금 더 즐거운 목소리로 물어오자 르베나가 주변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수만의 군대. 그 속에 섞여 간절한 혹은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디오니스의 백성들. 그들은 한참 눈앞의 상대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던 중이기도 했고 죽은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기도 했으며 감당하지 못할 분위기에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기도 했다.

세츠들은 마치 알아내야 할 것이 많은 보물처럼 가스트의 시신을 운반하고 있었고 후벤은 한쪽 팔이 잘린 채로 힘겹게 쓰러져 르베나를 바라보며 검을 집으려 하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과 공포가 뒤범벅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르베나 옆의 루드바하는 전보다 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모두를 하나하나 찬찬히 눈에 담은 르베나가 작지만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나의 소원은 하나. 오늘 이 전쟁으로 죽은 모두를… 살리는 것이다.”

순간 르베나를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에 어떤 깨달음과 함께 형체 없는 고통이 흘러나왔다.

“……!!”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 역시 예상치 못한 르베나의 말에 경악과 놀라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폐하……!!

후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모두의 귀에 꽂힐 정도로 사위가 조용했다. 수만의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모두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거라고……?”

백성들의 대표인 루센 역시도 루베나가 말한 소원이라는 것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되새겼다. 후벤과 루센 그리고 백성들은 알았다. 적어도 오늘이 르베나를 죽이고 디오니스를 차지하기 위한 누군가의 계략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 계략에 젠마저도 이용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 역시.

그 와중에 르베나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겪었고 가장 아끼는 가스트를 잃었으며 후벤도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였다. 누구보다 르베나 본인의 생사 역시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힘으로 드래곤을 불렀다.

그럼 당연히 소원은

“우리를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 중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드래곤 역시 르베나에게 다시 물었다.

“이놈들을 모두 쓸어 버리는 게 아니라, 이 일로 죽은 모두를 살려 달라는 게 너의 소원이란 말이냐? 그건… 너무 이상한데?”

위엄도 사라진 드래곤의 어투에는 잔뜩 황당함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게 드래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엄청난 마력의 소유자라는 건데 그런 본인이 해결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에서 드래곤을 불렀다면 응당 전원 몰살 정도가 맞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이 상황에 태연한 르베나만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나의 소원은 그것이다. 오늘 전쟁으로 죽은 모두를 살려달라는 것.”

고저 없는 르베나의 말에 드래곤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는 말했다.

“죽이는 것보다 힘든 게 살리는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소원을 들어주려면 더 큰 대가가 필요하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드래곤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루드바하가 뭔가 깨달은 듯 놀라며 제 신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르베나의 대답을 다시 확인한 드래곤의 눈이 한 명, 한 명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제게 향한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들은 온몸에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오한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겉을 살피는 느낌이 아니라 내면의 어떤 비밀스러운 부분까지도 샅샅이 파헤쳐지는 신랄하고도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루드바하를 향했을 때.

“호오……. 흐음… 그런 건가… 흠… 흥미롭구나. 엮이고 설킨 인연의 실이라는 건 말이야.”

그를 보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드래곤의 다음 말에 루드바하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왜인지 그런 루드바하를 보고 한번 웃은 것 같은 느낌의 드래곤이 곧 결정을 한듯 르베나에게 말했다.

“좋다. 너의 소원을 들어주지! 나는 태초에 약속된 신성한 계약에 따라 디오니스의 적법한 후계자 르베나 드 디오니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리고 그 대가로는… 너의 목숨을 받아 가마. 이것은 신성한 계약.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우리의 약속.”

처음과 같이 천둥 같은 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지던 드래곤의 목소리는 마치 엄숙한 종말을 선포하는 것처럼 장엄하고 무거웠으며 마치 어떠한 주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루드바하를 감싸던 무한한 양의 신력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놀란 루드바하의 눈이 드래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목숨이라뇨!!”

그 엄청난 힘의 목소리에 대항하여 소리친 자가 있었다.

“후벤…….”

르베나의 붉은 눈이 너무 많은 출혈로 하얗게 질려 있는 후벤에게 향했다. 후벤은 드래곤이라 느껴지는 허공에 대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누구도 폐하의 목숨을 가져갈 순 없습니다!! 그 누구도!!

폐하! 차라리 저들의 목숨을 가져가라 하십시오. 아니, 차라리 저의 목숨을 가져가라 하십시오! 모두를 살리는 대가가 폐하의 목숨이라면 저희 모두 이곳에 온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 제발… 저와 가스트 님을 생각하세요, 제발……! 혼자 남을 아한을 생각하세요!!”

절규하듯 내뱉는 후벤의 말에 백성들 역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 저희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폐하!”

“저희는 각오를 하고 왔어요!!”

“맞습니다!! 폐하께서 사셔야 합니다! 그게 맞습니다!”

“차라리 저놈들을 모두 죽여 주십시오! 저놈들이 제 친구를 죽였어요!”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목소리들은 어느새 드래곤에 대한 공포마저 잊어 가고 있었다.

저마다 르베나의 생존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떤 이는 르베나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연합군에게 더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후벤은 마지막까지 르베나를 지키겠다는 듯 남은 한쪽 팔로 검을 쥔 채 일어나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르베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의 이번 생은… 실패다. 나는 큰 힘을 가졌으나 바르게 사용할 줄 몰랐고 큰 사람들을 얻었으나 그들을 믿을 줄 몰랐다. 내가 행하는 행동에는 정의가 없었으며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은… … 오로지 나를 위함이었다.”

힘겹게 떨어지는 입술에서 나오는 무거운 말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래서… 나의 생은 실패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그대들이 있어… 완전한 실패로 끝나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내 마지막은. 그 끝만큼은. 내가 아닌 그대들을 위해 주고 싶다. 그래야 내 인생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이 또한 나를 위한 결정이라 꾸짖어도 할 말은 없구나.”

지친 듯한 기색을 띤 르베나의 얼굴에는 얼핏 후련함이 보이기도 했고 자조적인 미소가 어리기도 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담담한 그녀의 고백에 광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옆에 선 루드바하를 향했다. 그는 무엇인가에 많이 당황하거나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또한 중간에 무엇인가에 속은 것 같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르베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르베나의 마음이 편한 이유도 그가 존재함 때문이라는 게 우스웠다.

“약속해 주십시오, 유사피드. 이것으로 저는 목숨이 다할 것입니다. 분쟁의 원인인 제가 사라지니 더 이상 디오니스에 전쟁을 없을 거라고. 가스트와 후벤 그리고 나의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디오니스를… 베이라들을… 존중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시오.”

르베나의 붉은 눈이 담담히 저를 향하자 루드바하의 벽안이 수많은 감정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얼핏 죄책감과 괴로움을 담은 깊은 바다같기도 했고 소중한 이를 속절없이 잃어버린 누군가의 눈물같기도 했다.

“그대를… 유파시드 당신을 믿겠습니다… 정의에 따라 행하고, 그에 따라 처벌을 내리는 관대한 세츠들의 왕. 당신이라면 나의 결정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보잘것없는 목숨이지만 이로 인해 다시 태어난 그들을… 부디…….”

말을 마친 르베나가 활짝 웃었다.

이 장소에. 이 광경에.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미소가 참 아름다웠다.

그 미소를 담은 루드바하의 눈이 떨려오고 차마 떼지 못한 입이 떼어졌다.

“그럴… 필요 없다. 디오니스의 왕, 르베나여.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부끄럽지만 늦게라도 알았으니 내가 다시 돌려놓겠다! 그대에게 누명을 씌운 이들을 찾고 그리고……!”

“아니요…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소중한 생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미 너무 많은 생들이 지금의 삶을 놓았다.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데 루드바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제국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중심이라 불리는 그도, 젠 제국의 모두도 르베나와 같이 누군가에게 놀아났다.

그들이 젠이 아닌 르베나와 디오니스를 목표로 한 것은 단순히 디오니스가 제국보다 상대하기 수월하다 여긴 밑변의 저열함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정의가 결국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 허구였다는 것에 루드바하의 온몸이 수치로 떨려왔다.

‘그대가… 그대가 적어도 누구인지 먼저 알았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

차마 이 상황에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루드바하가 상황의 처참함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설핏 웃은 르베나의 눈이 이번에는 후벤과 그의 기사들 그리고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차례로 향했다.

‘정말 내 삶은 가여웠구나… 하나도 보지 못하였으니.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니……. 저렇게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편안하게 웃는 얼굴로 눈을 감은 르베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몸이 환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르베나!!!”

순간 누군가의 외침에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 순간의 평안이 꽤 마음에 들어 그 목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곧 처음과 같이 세상을 둘로 쪼갤 것만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찬란한 빛이 서서히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힘.

누구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 힘이 세상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