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9화 (39/276)

39화

제1장 디오니스 (38)

“가스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을 향하는 르베나의 눈에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들이 들어섰다.

엄청난 마력을 끌어 모아 백성들의 앞에서 실드를 치며 그들을 보호하는 가스트와 디오니스의 기사들을 검으로 상대하며 제압해 나가는 후벤과 그의 기사들.

그들의 모습에 르베나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어떻… 게.”

르베나의 말이 들릴 리 없건만 순간 가스트와 후벤이 뒤를 돌아보는 듯 보였다. 둘 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미 엄청난 전투를 치른 것처럼 몰골이 엉망이었다.

아마도 후츠 백작이 보낸 암살자들은 이미 모두 죽었으리라.

르베나의 붉은 눈에 이채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살아 있었어… 후벤도 가스트도 모두……!’

그들을 보고 일렁이는 르베나의 감정에 그녀의 마력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루드바하가 가만히 르베나를 바라보다가 앞에서 백성들을 지키며 싸우는 후벤과 가스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벽안이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은 그가 예상한 상황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무역을 위해 디오니스로 오던 자칸의 백성들은 르베나에 의해 죽어 나갔다. 그리고 르베나의 필적을 의심할 여지도 없는 문서들엔 제2의 신마전쟁의 척도를 그리는 계획이 자세하게 써 있었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연합군을 몰고 디오니스로 오기 전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검증을 마쳤다는 소리였다. 그 부분에 의심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마력을 본 순간 그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녀를 지키겠다며 서툰 자세로 무기를 든 백성들과 가스트를 보자 그 흔들림은 확신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뒤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스트다! 디오니스의 별이 나타났다. 모든 세츠들은 그를 제압하라!!”

그가 아닌 누군가의 명령을 시작으로 혼란스럽던 세츠들을 비롯한 연합군이 백성들과 가스트, 후벤을 뒤에서 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딘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와 함께 붉은색의 머리가 얼핏 보인것도 같았다. 순간 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이제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한편 앞으로는 디오니스의 기사, 뒤로는 연합군이 길을 돌아 몰려들자 후벤과 가스트의 합세로 잠시 기세가 올랐던 백성들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르베나 역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저들을 죽게 하지 마! 그럼 다 죽여 버리겠어! 너도 죽여 버릴 거야! 이거 놔 놓으라고!!!”

그들이 점점 위험에 빠지자 르베나가 거칠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앞뒤로 밀고 들어오는 수만의 병력에 가스트와 후벤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제 신력을 더 강하게 풀며 르베나의 마력을 제압했다.

“적어도 지금 뭔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 당신의 개입은 당장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합군의 화를 부추기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리고 전 당신을 절대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뜻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도 르베나는 미친 듯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그의 말 따위는 사실 들리지도 않았다.

“겨우 살아 온 사람들이야! 겨우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저들을 지킬 거야!! 저들이 죽는다면 내 목숨도 필요 없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흠칫.

발악하는 르베나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르베나를 제압하던 유파시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질 정도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때……! 엄청난 마력의 기운이 르베나에게로 빠르게 쇄도했다.

펑! 펑펑!!

계속해서 이어진 공격은 유파시드의 마법으로 간신히 막을 정도로 사력을 다한 위력이었다. 르베나는 이쪽으로 공격을 가한 베이라, 가스트를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으로 보았다.

그는 왠지 르베나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 마법을 날린 듯 보였다.

백성들을 위한 실드를 치랴, 디오니스와 연합군을 공격하랴 이미 후츠 백작이 보낸 이들과의 싸움으로 지쳤을 그의 모습은 르베나의 가슴이 찢어질 만큼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르베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스트가 마력을 담아 소리쳤다.

“도망치십시오, 폐하!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 하나입니다! 뒤도 보지 마시고, 저희를 생각지도 마시고 가십시오, 폐하!! 바로 지금을 위해 연마한 기술입니다!”

가스트의 말을 모두들 이해하지 못했지만 르베나만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른 이후 가스트가 제일 강조하며 가르쳤던 기술, 텔레포트.

지금 가스트는 르베나에게 텔레포트를 시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 루드바하의 신력은 르베나의 마력이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제압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나와 있거나 몸 속에 순환하는 마력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그것은 아무리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 하여도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은 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텔레포트를 르베나 본인에게만 적응한다면 마력을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 즉 이 상황에서도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시 본 가스트와 후벤을 두고 혼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후벤도 가스트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가십시오. 지금은 그의 말을 들으십시오.”

순간 르베나는 옆에서 가스트의 말에 동조하는 루드바하의 말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의 우두머리이자 신의와 정의를 위해서만 힘을 쓸 수 있는 세츠들의 우두머리인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도망을 격려한 것이다.

르베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자 루드바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곳의 문제는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적어도 당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서……!”

“폐하!!”

루드바하의 급박한 말과 동시에 초록 머리를 한 기사 하나가 그에게 급히 달려왔다.

“세츠들이 이상해! 특히 마르한과 켄느에서 온 세츠들이 우리 명령에 따르지를 않아! 폐하의 명령을 받은 젠의 세츠들이 공격을 멈추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들어! 이러다가는 세츠들끼리도 부딪힐 것 같아!!”

그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동시에 르베나 역시 연합군 쪽에서도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뒤에서는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향하려는 세츠들과 그들을 말리는 젠의 성기사와 세츠들의 소리가 난무했고 앞에서는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연합군 무리와 맞서는 디오니스 백성들의 전투가 한참이었다.

중간에 르베나에게 내내 검을 겨누던 디오니스의 기사 하나가 백성들의 앞을 막는 것도 같았으나 워낙 순식간이었다.

르베나의 시선은 다시 조금 전 자신에게 텔레포트를 권한 가스트에게로 돌아갔다. 그 순간조차 르베나를 보며 상황에 맞지 않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가스트의 얼굴은 평온했다.

“저희는 걱정마시고 어서……!”

“가스트!!!”

처절한 르베나의 소리와 함께 다가온 눈앞의 연합군을 베어낸 후벤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르베나에게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여러 명의 세츠들이 가스트의 실드를 뚫고 그를 공격한 순간을.

“…쿨럭.”

긴 회색수염 가득 피를 토한 그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의 모습이 마치 시간을 느리게 가게 만든 것처럼 천천히 보여졌다.

쓰러지면서도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회색 눈빛은 따뜻했고 피를 흘리면서도 르베나를 향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그가 작게 만들어 내는 입 모양마저 얄궂을 만큼 선명했다.

‘아한을… 잘 부탁… 죄송…….’

그의 입 모양을 읽어낸 르베나의 눈에서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곧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틈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젠장, 저거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 아냐! 어떡해, 폐하!!”

르베나와 함께 그 모습을 본 초록 머리의 기사가 경악에 차 루드바하에게 말하자 그가 곧장 기사에게 무언가를 전달했다. 그러자 초록 머리의 기사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루드바하의 시선이 쓰러진 가스트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르베나를 향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자잘한 신력의 자락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르베나 전하!!”

그때 다급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르베나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가스트의 죽음을 확인하고 급히 르베나에게로 다가오는 후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촤악!! 붉게 흩뿌려진 선혈이 그의 어깨를 물들였다.

“…후벤!!!”

울음에 잠겨 나오지 않는 르베나의 목소리가 수백 갈래로 찢어진 것처럼 터져 나왔다.

한쪽 어깨가 잘린 후벤은 이를 악물며 제 팔을 잘라낸 디오니스의 기사를 힘겹게 베어 내고는 다시 르베나에게로 다가왔다.

곁에서 루드바하를 호위하는 세츠들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하였지만, 루드바하가 그들을 저지하며 후벤이 다가오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어느새 르베나의 발밑까지 다가온 후벤이 본인을 제지하지 않은 루드바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한번 보았다가는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는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도망… 가십시오. 폐하. 아마도… 유파시드는 폐하를… 잡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아한을 데리고 멀리… 부디 행복하게… 아프지… 말고…….”

털썩.

힘들게 말을 마친 후벤이 르베나를 바라보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적신 피의 양이 그가 지금 무릎 꿇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으… 으흑…….”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르베나의 눈에서는 쉴 새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 흑… 자고 돌아왔어… 그냥… 그냥 살았으면, 으흑……. 그냥 가지 왜… 윽, 아아…….”

채 나오지 못한 말은 수많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채 전하지 못한 진심은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 솟구쳤다.

그 순간 르베나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지켜 줄 사람이 없어 연합군과 디오니스의 기사들에게 일방적인 죽임을 당하고 포박당하는 디오니스의 백성들. 저 멀리 세츠들에게 끌려 나가는 가스트의 시체. 르베나의 발밑에 쓰러져 얕은 숨을 몰아쉬는 후벤.

가쁜 숨 사이로 눈가에 연신 뜨거운 것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내뱉는 입김은 더없이 뜨거웠으나 저들이 흘린 피가 더욱 뜨거우리라.

차가운 냉기에 그녀의 손도 시리고 저렸지만, 땅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저들의 시체가 더욱 차가우리라.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 힘도 권력도 왕좌도… 도대체 난 무얼 위해 쓴 거지…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친 가스트와 후벤, 사나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무 의미도 없던 나의 행동에 무지한 백서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럼 난……. 난 도대체… 저들을 위해 무엇을…….’

끝없는 절망에 갇힌 채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있던 르베나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그래… 그런 거……!’

곧 르베나가 가스트와 후벤 그리고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차례로 눈에 담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몸 안의 마력을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눈에서는 차마 멈추지 못한 눈물들이 뜨겁게 쏟아져 내렸고 르베나의 주위는 조용한 사위에 잠기어 갔다.

그리고 같은 시간, 다시 돌아와 무엇인가를 고하는 초록 머리 기사의 말에 루드바하의 신력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곧 그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하며 급히 명했다.

“젠의 세츠들과 성기사들을 지금 당장 디오니스의 백성들에게 보내라, 당장!!”

루드바하의 명과 동시에 초록 머리 기사가 서둘러 사라지자 루드바하가 초조한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눈에 신력을 집중해 본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금방 자폭이라도 할 것처럼 온 마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놀란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소리 내어 부른 순간이었다.

“르베나, 안 돼……!”

그 순간 루드바하는 순간적으로 폭사하는 엄청난 힘을 느끼며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그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졌다.

그곳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존재가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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