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8화 (38/276)

38화

제1장 디오니스 (37)

수만의 대군 앞에 선 수백 정도의 이들.

그들 중 선두에 선 이가 르베나에게 크게 소리쳤다.

“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폐하!”

“…빚?”

르베나가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그가 소리쳤다.

“남들이 뭐라 하든 폐하는 저희에게 최고의 왕이십니다! 저희를 굶지 않게 해 주셨고, 재난 때마다 저희를 살려 주셨습니다! 제 아들놈을… 살려 주셨고 저의 노모를 살려주셨습니다!”

그의 소리에 르베나가 상황을 살피고는 소리쳤다.

“난 그런 적이 없다! 그리고 이곳은 너희가 낄 데가 아니다. 시민들은 모두 남쪽으로 대피해라! 명을 받지 못했는가! 어서 피해라! 어서!”

르베나의 목소리에 다른 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흉작이 들 때마다 곡식을 풀어 저희를 먹이셨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 약을 풀어 저희를 살리셨고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들에게 왕국의 땅을 내어주어 묘지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행차 때마다 부조리한 귀족들을 처벌하여 저희의 목숨도 살려주셨습니다!”

순박한 목소리에는 그가 일구는 대지와 같은 단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지한 저희지만 지금 폐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저희가 돕겠습니다! 수만의 군대도, 디오니스의 기사도 저희가 죽이겠습니다! 그러니 폐하, 도망가십시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르베나의 당황스러움이 공기를 타고 울렸다. 그 말에는 어이없음과 함께 애꿎은 백성들이 세츠들에게 괜한 죽임을 당할까 하는 염려도 잔뜩 실려 있었다.

그녀는 결코 성군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한심한 왕일 뿐이었다.

본인이 궁에서 배고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저들을 굶지 않게 했을 뿐이다.

본인이 어릴 적 학대를 많이 당했기에 맞지 않게 해 줬을 뿐이다.

전염병이 돌면 약을 풀고 눈앞에서 부조리를 보면 무조건 관료들부터 질책하고 처벌하였다.

그리고 이는 모두 백성이 아닌 르베나 자신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행동들이었다.

결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저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어린 시절 고통받은 자신을 위한 나름대로의 위로였고 위안이었을 뿐이다.

“그게 뭐라고 지금……!”

그게 뭐라고 목숨을 걸어 날 지킨다는 것인지 르베나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최강의 베이라인 그녀를 지키겠다고 전장에 온 이 상황이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몰랐다. 르베나가 왕으로서 행했던 그 모든 행동이 굶주린 디오니스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

그들은 쇠퇴해져 가는 약소국의 시민으로 굶주리고 억압받았다. 디오니스의 왕들은 주변의 다른 왕국들에 비해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왕들이 많았으나 선왕인 제노스는 딸의 죽음 이후 예전만큼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죄 없는 백성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관료들에게 착취당하고 약탈당했으며 그것에 대해 항변할 힘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항변해 봤자 돌아오는 건 더한 폭력과 억압이었다.

하지만 르베나가 왕이 되고 그들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왕의 행차는 원래 과시의 행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최소한의 인원만을 데리고 나왔으며, 악행으로 유명한 관리들은 찾아내어 마법으로 단숨에 목숨을 끊어 버렸다.

수탈하는 관리를 왕이 직접 즉결처분한다는 소문나자, 어느 날부터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관료들도 이를 의식해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르베나는 본인도 모르는 새 성군이 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그런 그들의 왕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래서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일반인 징병을 하지 않고 대피부터 명한 그들의 왕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반기를 들 수 있었다.

물론 더 많은 백성들은 피난길에 올랐지만 르베나의 은혜를 잊지 않은 자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무기를 챙겼다.

그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왕족에게 받은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연합군 쪽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말만 들어보면 그녀는 진짜 성군이 따로 없었다. 백성들이 목숨을 걸어 지키려는 왕이라니. 루드바하도 무언인가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요를 알아챈 후츠 백작이 기사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는 귀족의 기사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었다.

“저들을 죽여라! 저들은 모두 르베나 왕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다! 저들은 모두 베이라란 말이다!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것이다! 어서 조금의 틈도 주지 말고 죽여라!!”

후츠 백작의 외침과 동시에 디오니스의 기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 모두 저들이 베이라가 아닌 걸 알았지만 이 전쟁의 승패에 가문과 목숨을 건 건 이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기세 좋게 맞서긴 했지만, 온갖 병장기를 든 근엄한 기사들이 다가오자 백성들의 눈에도 조금씩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르베나를 구하겠다 달려오긴 했어도 정식 훈련을 받은 기사들에게는 상대도 안 되는 그들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본인들의 무기를 더욱 힘주어 잡고 도망가고 싶다 애걸하는 다리를 땅에 박을 만큼 힘주어 섰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휙 고개를 돌려 가장 먼저 소리친 남자를 향해 외쳤다.

이름도 얼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지금 그녀의 힘은 유파시드에게 제압당해 아무런 도움조차 줄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지?”

소리쳐 묻는 르베나의 음성에 남자가 앞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다가는 빠르게 르베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루, 루센이라 합니다!”

점점 백성들에게로 다가가는 기사들을 보며 르베나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루센, 똑똑히 들어라! 나는 그대들을 아끼고 보살피려는 마음 따위 없었다. 그저 모두 나를 위해 한 행동일 뿐이었단 말이다! 그러니 나를 위해 목숨을 걸지 마라.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지키는 것은 나의 몫, 따르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니 그대들은 떠나라, 어서!!”

지척까지 백성들에게 다가간 기사들을 보며 르베나가 다시 소리쳤다.

“모두 가! 어서!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가라고! 가! 나를 위해 목숨 같은 거 걸지 말란 말이야!!”

르베나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백성들의 선두에 선 루센이 소리쳤다.

“맞습니다! 폐하는 저희를 지키시는 분이시고 저희는 윗분들의 명을 따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저희는 따르려 합니다. 저희를 이끄신 후벤 공작과 가스트 후작님의 말을요!”

“…뭐……?”

뜻하게 않은 이름에 르베나가 루센을 쳐다보았다. 굳은 의지를 담은 루센이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의 몇 걸음 앞에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디오니스의 기사들이 있었다.

“언제나 폐하께서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면 저희는 물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냐고. 그리고 폐하가 떠나시고 난 뒤 저희가 물으면 그분들은 항상 답했습니다. 언젠가 저희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저희 모두가 폐하를 지켜달라고. 그러니까 저희는 그때의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폐하!”

루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르베나의 귓전을 때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흩뿌려지는 피비린내.

여기저기 이어지는 절규와 같은 장면들.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는 연약한 비명들.

“으… 읏……!!”

르베나가 순간 루드바하의 힘에 대항하려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을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대는……! 지금 그대가 나서면 사태만 악화될 뿐입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르베나가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안 보이십니까? 저들은…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디오니스의 백성들입니다! 당신이 진정 제국의 유파시드라면 저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함에! 그 순진함에 목숨을 건 저들을 죽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절규와도 같은 르베나의 비명을 들은 루드바하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

그 순간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없는 혼란과 비참함, 그리고 슬픔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저는… 정의와 신의를 다하는 세츠들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 혼란을 막고 싶다면… 그대의 백성들을 지키고 싶다면… 그대가 무죄란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대가 평화협정을 어긴 확실한 증거 앞에서 나는 함부로 그대와 그대의 백성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들을 도왔다가 이것이 신마전쟁으로 이어진다면 훨씬 많은 수의 무고한 이들이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것이 내가 지켜 온 내 정의입니다, 그러니 마력을 해제하고 항복하세요, 르베나 왕. 그것만이 지금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최선입니다.”

르베나의 눈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에겐 이미 르베나가 젠을 치고 신마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실제 르베나는 국경을 어지럽히는 세츠들을 후츠 백작의 혀 놀림에 속아 죽이기도 했다.

신마전쟁을 꿈꾼다는 서류를 그녀가 작성한 적 없고, 그녀가 죽인 게 사실 세츠들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었다는 걸 그녀조차 몰랐다. 그러니 공정한 유파시드로썬 자신의 성기사들에게 전해 받고 들은 증거들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나 정의와 신의를 향하는 힘을 가진 그도 지금 들리는 백성들의 비명에 고통스러워한다는 게 묘한 위로가 되는 아이러니였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제 마력을 해제할 수 없었다. 이건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였고 무기였다. 그녀는 죽는 순간조차 마력을 놓지 못할 자신을 알았다.

그때, 갑자기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손을 뻗어 무형의 방어막을 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마법의 파장이 일대를 울렸다.

위이잉---

공간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두 마법의 마찰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제 귀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리게 빛나는 눈으로 앞을 본 루드바하가 작게 말했다.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

그리고 그의 작은 목소리는 르베나에게 또 다른 전율로 이어졌다.

* * *

“공주님을 지켜라! 한시도 눈을 떼지 마!”

어느새 숲속은 아수라장이었다. 르베나의 말대로 동이 트자 나타난 쥬라는 르베나를 감싼 보호막을 보더니 꽤 많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곧바로 기사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 보기에도 외상이 심해 보이는 쥬라가 던지는 마법들은 다행히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았다.

르베나의 마력에 당한 상처는 몇 시간으로 치료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쥬라 자신은 단숨에 치료를 할 만큼 마력이 넘치는 뛰어난 베이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임무는 완수해야 하기에 상황을 살펴 기사들부터 치우기로 한 것이다.

의식이 없는 르베나는 키메라로부터 무형의 보호를 받는 듯했다. 비록 지금 르베나에게는 무력도 마법도 통하지 않지만 언제 저 보호막이 깨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에 쥬라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기사들은 난사되는 쥬라의 마법에도 모두 이를 악물고 르베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 다음부터는 이른바 몸 빵이었다. 발 빠른 기사 몇이 쥬라의 눈길을 끌고 마법을 유도하여 간발의 차이로 피하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고 만일 쥬라가 르베나 주위로 공격을 하면 판단에 따라 피하거나 르베나가 위험하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던졌다.

그렇게 목숨은 건 아슬아슬한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비릿하게 번지는 혈향은 짙어지고 있었고, 기사들의 움직임은 점점 눈에 띄게 늦어지고 있었다.

“벌써… 다섯인가…….”

온몸이 화상으로 그을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다한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다섯.

기사단 중 벌써 절반이 사망하거나 큰 부상으로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모두 도망가지 않고 그들의 공주, 르베나를 지키겠다며 베이라에게 맨몸으로 맞선 처절한 흔적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다한의 불안한 눈빛이 아직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이 혼란, 이 소음, 이 치열함 속에서도 그녀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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