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7화 (37/276)

37화

제1장 디오니스 (36)

몸이 무거웠다.

마력이 다한 르베나의 몸은 점점 비워진 마력을 채우려 생명력에 깃들어 있는 마력을 탐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의식은 점점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르베나는 어느새 알 수 없는 그 끝에 닿았다.

의식의 끝. 어둠의 종착지.

그리고 그곳에서 르베나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이전의 마지막 시간. 수만의 군대 앞 홀로 남겨졌던 시간.

그 시간의 뒷이야기가 르베나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 * *

“베이라들의 공격이다!”

“르베나 왕을 구하러 베이라들이 왔다!”

“베이라들을 응징하라!”

그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갑작스레 날아온 공격에 방심하던 세츠들은 힘없이 죽어 나갔고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를 시작으로 세츠들은 그들의 건물 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난 베이라들을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시작했다.

고성과 폭파음, 비명과 피비린내, 흩날리는 먼지와 정신없이 뒤섞인 마법의 파장들.

르베나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

후츠 백작의 배반에 이어 약속되지 않았던 베이라들의 등장과 공격에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펼쳐졌다. 설상가상 나타난 베이라들은 마치 미끼인 양 그 수도 현저히 적어 세츠들에 의해 금방 진압되고 말았다.

“윽……!!”

방금의 공격을 가했던 베이라들을 생포한 세츠들이 그들을 마법으로 포박하여 루드바하의 앞에 무릎 꿇렸다. 르베나의 눈 역시 포박당한 그들을 향했다.

꽤 여러 번 베이라들을 이끄는 그들의 수장들을 만나보았고 디오니스로 몰려든 거의 모든 베이라들을 보았다 생각했지만 그런 르베나조차 처음 보는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곧 루드바하가 그들을 향해 시린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답하라.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연합군을 공격하였는지!”

유파시드의 음성에는 시린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공격으로 방어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세츠들과 연합군들이 한순간에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붙잡힌 베이라들 중 하나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우린 유파시드를 죽이고 디오니스를 제국으로 만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위대한 르베나 폐하의 뜻! 모든 베이라는 베이라들의 왕, 그분의 뜻에 따라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의 세츠라도 더 말살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답을 마친 베이라의 몸이 한순간에 폭사하였다.

몸에 남은 모든 마력을 끌어 모아 자폭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십여 정도 되는 베이라들이 하나같이,

“르베나 폐하 만세, 베이라 만세!”

를 외치며 같은 방법으로 죽어 갔기 때문이다.

실로 끔찍한 자살 방법이었지만 연합군과 세츠들의 눈에는 미치도록 끔찍한 충성심으로 보였다. 그리고 충격으로 굳어진 르베나 역시 그들의 모습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열댓 명 베이라들의 몸이 차례차례 폭사하는 빛과 함께 터져 나갔다.

환한 빛은 곧 핏빛으로 물들었고 르베나의 얼굴에도 그들의 선혈이 그어졌다.

본인들의 마지막 마력을 모두 모아 자폭한 그들의 힘은 위력적이었지만

결코 세츠들에게 닿지조차 못했다.

루드바하가 가볍게 그은 손짓으로 생겨난 실드가 폭발 장소 근처에 있던 모두를 보호한 덕이었다.

곧 루드바하의 시린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몸은 더 뻣뻣하게 굳어져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속은 것인지.

아니, 르베나 자신을 속이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르베나의 손이 저릿해질 정도로 차갑게 시려 왔다.

그리고 그때, 이 상황에 쐐기를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파시드여! 부디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진 디오니스와 베이라들을 구하소서. 모든 디오니스와 베이라들이 르베나 왕의 힘에 굴복하여 이런 참혹한 짓을 계획해 왔음을 저희는 목숨을 건 용기로 고백합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절절한 기색까지 깃들어 있었다.

“베이라들은 오로지 힘에 지배받는 단체! 그들은 왕의 명에 따라 유파시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실패할 시 자폭하라는 르베나 왕의 명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한 일입니까! 유파시드여 부디, 르베나 왕을 죽여 주시고 저희를 구하소서!”

후츠 백작의 간절한 외침이 쏟아진 것과 동시에 르베나의 뒤에 시립해 있던 모든 군사 귀족들과 그들에게 속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희를 구하소서!”

“르베나 왕을 죽여 주시옵소서!”

“디오니스에게 유파시드의 축복을!!”

그리고 그들의 외침 뒤로 정적을 가르는 나지막한 소리가 점점 소리를 키워 갔다.

“크… 하핫! 하하하하하……! 푸하하하!!”

모두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 사악한 힘의 근원. 악의 여왕이자 베이라들의 왕인 그녀,

르베나가 미친 듯 웃고 있었다. 제 배를 움켜잡으며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본 모두는 오싹함에 치를 떨었다. 방금 자폭한 베이라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정말 재밌다는 듯 웃는 그녀의 모습은 기괴한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그녀의 몸에서는 마력이 들썩였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격해질수록 붉은 마력은 속절없이 요동쳤다.

그 기운은 더없이 광폭해 보였으며 점점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르베나가 고개를 젖혀 웃는 얼굴로 후츠 백작을 보았을 때는 평범한 사람도 볼 수 있는 만큼의 거대한 마력이 르베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 모두 다 나의 탓이다. 너 같은 놈을 믿어 이렇게 되었다… 너 같은 놈들을 믿어 디오니스를 멸망케 한 왕이 되었고, 너 같은 놈을 곁에 두어… 나의 사람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나의 힘에 도취되어… 이… 빌어먹을 힘 때문에……!!”

깊은 분노와 거대한 자괴가 그녀의 심장을 휩쓸고 있었다.

“진정 나를 위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나의 권력에 취해 깊이 없이 살랑대는 네놈들의 달콤한 말들만을 새겨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이것이군.”

르베나의 붉은 눈이 더 빨갛게 충혈된 채 사방을 훑었다.

여기저기 죽어 있는 베이라들. 저들은 무얼 위해 죽은 걸까.

르베나를 두려워하는 연합군들. 저들은 나의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지금의 내가 두렵긴 할까. 제게 검을 겨누고 있는 디오니스. 저들은 또 무얼 얻고자 시린 검을 손에 들었나.

수백 수만의 생각이 르베나를 빠르게 스쳐 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생각 어디에도 희망의 쪼가리 따위는 없었다.

르베나는 모두를 잃었고 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가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된 믿음과 신념으로 처참하게 짓밟히고 뭉개졌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디오니스도… 후벤도 가스트도… 그리고… 아한도……!!’

아한의 말간 미소를 떠올린 르베나의 눈이 제 앞에 선 루드바하를 향했다.

그의 눈은 얼핏 시린 분노에 휩싸여 있는 듯 보였지만 마치 할 말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만의 적 앞에 르베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모두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죽음만을 바라고 있었다.

유파시드.

저 자가 입을 열면 수만의 공격이 그녀를 향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을 것이고 디오니스는 처참히 짓밟힐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 순간 죽은 제노스 왕이 생각나는 까닭은.

그는 마지막 순간 르베나에게 말했다.

가엾다고… 네가… 너무도 가엾다고.

‘아아… 그는 이 순간을 예견한 걸까…….’

르베나는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그 시간 동안 제가 잘한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온통 후회와 원망, 자괴감뿐이었다. 하여 그녀는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그녀는 이제 혼자였으니.

르베나의 붉은 눈에 점차 생명의 빛이 꺼져갔다.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마력이 정점을 찍듯 점점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이성을 놓아버린 것만 같은 그녀의 마력이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발악하지 말자… 끝이 왔다면, 받아들이자…….’

체념한 듯 순간 몸의 모든 힘을 떨구는 그녀의 모습과는 반대로 그녀의 마력은 거대한 핏빛 강물 같이 요동쳤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솜털이 주뼛주뼛 서는 본능적인 공포에 잠식당했다.

하나둘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어가고, 여기저기 툭, 툭 기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부드러운 바람이 일대를 뒤덮으며 모두를 감싸 안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졸린 목이 풀린 것처럼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르베나의 새카맣게 죽은 붉은 눈이 제 옆에 자리한 이를 바라보았다.

유파시드.

가볍게 도약하여 르베나의 옆으로 온 그는 어느새 활활 타오르던 르베나의 마력을 강제적으로 잠재우고 모두를 신력으로 보호했다.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디찬 벽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당신도 포함입니다.”

유파시드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절망으로 잠시 흔들렸다.

‘죽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한다, 라…….’

피식 실소를 흘린 르베나가 그를 마주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의 벽안은 르베나에게 꽤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당신 혹시…….”

그리고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그 순간. 엄청난 함성 소리가 일대를 뒤엎었다.

“와와~~!!”

“달려라! 앞으로 가!”

“귀족들을, 기사들을 쳐내!”

갑작스런 소동에 모두가 놀라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를 보았다. 가장 바깥쪽에 시립해 있는 디오니스 기사들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여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은 저마다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죽을 힘을 다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소리가 가까워지자 새카맣게 죽어있던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들은……!’

디오니스의 기사단과 맞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온 이들이 단상에 선 르베나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르베나 전하이시다!”

“폐하!!”

“저희가 왔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게… 무슨……!”

혼란스러운 르베나의 눈이 빠르게 눈앞의 광경을 담았다. 그리고 르베나 만큼이나 당황한 세츠들 사이에서도 빠르고 강렬한 혼란이 번져갔다.

“뭐야… 저것들은?”

“저 사람들 뭐야?”

“저거… 디오니스 시민들 아냐?”

“뭐? 남쪽으로 대피시켰다던?”

저마다 몽둥이며 농기구 같은 것을 들고 전장에 들어선 이들이 눈앞에 가득했다.

어정쩡한 모습에 무기라 할 수도 없는 무기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렬한 눈빛만은 살아 있는 이들.

… 디오니스의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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