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제1장 디오니스 (35)
“공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합니다!”
다한의 큰 외침에 모든 기사들이 놀라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한의 바로 옆에서 르베나의 말을 함께 들은 기사 룬 역시도 떨리는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공주님에게서 들은 말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다한, 똑바로 들어. 그 자식은 분명 우리를 살려서 보낼 생각이 없어. 그리고 그놈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면 이번엔 죽을 각오로 마법을 날릴 거야. 그리고… 절대로 나의 마력 없이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기사들 사이에서 침음이 흘렀다. 르베나는 이를 악물고 말을 덧붙였다.
“그대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힘의 근원이 다르기 때문임을 그대들도 알겠지.”
르베나의 말에 다한과 기사들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빠르게 오가는 마력,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움직임. 조금 전 베이라들의 싸움에서 기사들은 그들의 검을 학 획도 긋지 못했다.
마력이 없는 인간의 몸으로는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의 싸움, 그것이 베이라들의 싸움이었다.
“팔 하나 없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작은 희생을 두려워하면 그곳엔 개죽음밖에 없다. 난 여기서 저런 놈한테 내어줄 목숨 따위 없어! 그러니 이건 왕족으로서의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단어에 기사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직이 말하는 그 명령은 그들에게 지나칠 만큼 잔혹했다.
“난 이제부터 내 남은 마력을 죽지 않을 정도만 남겨 놓고 모두 이 녀석에게 쏟아부을 거다. 만약 그래도… 이 녀석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다한 경. 절대로 망설이지 마라. 마력을 소진해 기절한 베이라는 쉽게 깨어나지 않으니까 고통 따위는 염두 하지도 말고!”
르베나는 말을 하면서도 순간 핑 도는 현기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미친 키메라는 절대 제게서 떨어지지 않을 기세였고, 아마도 날이 밝으면 쥬라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공격해 올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르베나마저 마력을 쓸 수 없다면 이들, 그리고 르베나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르베나는 이 조그만 털뭉치 때문에 이곳에서 죽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세나르의 약점을 잡아 이곳에 남을 사나와 후벤, 가스트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어야 했고,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르베나의 소중한 이들을 죽인 모두에게 복수해야만 했다.
르베나의 눈이 아직 그녀의 팔에 붙어 토끼 같은 작은 귀를 팔랑팔랑 움직이며 부지런히 마력을 흡수하는 키메라에게 향했다.
“팔이 잘리면… 그땐 너도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나직이 읊조린 르베나의 말을 들은 건지 키메라의 푸른 눈에서 또 눈물 같은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를 가만히 보던 르베나가 각오를 다지며 눈을 감았다.
‘한 번에… 간다!’
르베나가 몸속을 순환하는 마력들을 빠짐없이 감지했다. 마력들은 마치 물 빠진 독처럼 한 군데를 통해 모두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로 키메라가 문 왼쪽 팔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르베나는 서서히 몸속 마력들을 그러모았다.
천천히, 천천히. 모이는 마력 중 일부는 조금씩 키메라가 문 팔로 새어 나갔지만, 나머지 마력들은 모두 착실히 주인의 명에 따랐다. 이윽고 상당한 양의 마력들이 둥글게 모이며 그 부피를 더해 갔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인해 르베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마력을 그려 모으던 르베나의 몸이 이기지 못할 압력에 잘게 떨려왔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곧 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압박감은 아주 깊은 속에서부터 진동했다.
르베나는 이 정도의 마력을 한 번에 외부로 쏟은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럴만한 상대도 없었을뿐더러 급격한 양의 마력을 소진하는 것은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르베나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마력만을 남겨 둔 채로 마지막 힘을 모두 모았다.
‘만약 이 마력을 다 쓰고도 다한이 팔을 베어 내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마력마저 키메라에게 뺏겨 나는… 죽는다.’
르베나가 문득 눈을 떠 다한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르베나의 눈을 마주 본 다한의 눈은 사정없이 떨리었다가는 점차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믿는다. 다한 경…….”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을 끝으로 르베나는 이제껏 모은 모든 마력을 키메라가 위치한 왼팔로 쏟아내었다. 곧 왼팔에서 터져나갈 듯한 뜨거움과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마력이 좁은 통로를 통해 터져나가듯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눈이 서서히 감기며 몸이 풀썩 흐트러졌다.
얼른 제 손으로 르베나를 받아낸 다한의 눈이 그녀의 왼팔에 머물렀다. 털뭉치 같은 키메라가 잔뜩 배를 불린 채 여전히 르베나의 팔에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에도 털뭉치의 보석 같은 푸른 눈은 더욱 요요하게 빛날 뿐이었다.
“다, 단장님……!!”
르베나가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여전히 그녀의 팔에 이를 박고 있는 키메라를 본 기사 룬이 떨리는 눈으로 다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르베나를 바르게 눕힌 다한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침착하게 말했다.
“룬, 소독한 검을… 가지고 와라!”
“단장님!!”
“단장님, 안 됩니다!”
다한이 명을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만류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베이라라 하여도 신체를 다시 붙이기는 어렵다. 아주 강한 치유 세츠라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지금 여기엔 세츠의 옷자락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디오니스의 공주이고 여자였다. 팔이 없는 공주라니.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기사 룬이 다한에게 다가와 말했다.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팔을 자르는 건… 차라리 저희가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그 새끼가 나타나 마법을 난사하면 저희가 몸으로라도 막으면 되지 않습니까!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래도 팔은 안 됩니다, 팔은!!”
룬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 다한이 제 주먹을 꽈악 쥐며 말했다.
“그러고… 싶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이미… 이미 공주님은 최소한의 마력만을 남겨 두시고 마력을 모두 저 키메라한테 쏟아부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다한의 고함에 룬이 입을 딱 다물었다.
“만약… 만약 이대로 둔다면 그 새끼가 나타나기도 전에 공주님이 죽는단 말이다! 후벤 경께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지키겠다 했는데…….”
털썩.
다한이 누워있는 르베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크고 넓은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에 그곳의 누구 하나 더 이상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모두가 한마음일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르베나를 지키고 싶은 그 마음은.
하물며 제1기사단장인 다한은 누구보다도 그 마음이 클 것이다. 엎드려 가늘게 어깨를 떠는 다한을 보며 기사 룬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그의 눈이 창백하게 누워 얕은 숨을 뱉고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참 잔인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기사가… 마땅히 검과 목숨으로 당신을 지켜야 할 저희가……!! 검을 들어 당신의 신체를 자르게 하다니…!!
그것만이 당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그렇게… 잔인하게……. 그 방법만을….
룬의 못다 한 말이 사방을 메웠다. 곧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르베나와 검을 내팽개친 채 엎드려 소리죽여 우는 다한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이 젖어 갔다.
일행 중 가장 강했던 르베나와 다한의 약한 모습이 그들의 눈에 아픈 가시처럼 박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폭사한 눈부신 빛이 르베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놀란 기사들과 엎드려있던 다한까지 놀라 고개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더없이 하얀 아니, 푸르기도 하고 또 붉기도 한.
수많은 색이 섞인 것만 같은 빛은 폭사하듯 르베나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단장님……!”
룬의 부름에 다한의 눈이 놀라듯 치켜 떠졌다. 절대로 르베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키메라가 드디어 르베나의 팔뚝에 박혔던 이를 빼낸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처음의 주먹만 한 크기로 돌아간 키메라의 털은 왠지 이전보다 더 보드랍고 윤기가 흘러 보였으며 요요히 빛나던 파란 눈 역시 더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없던 꼬리가 생겨났는데 폭사한 빛은 그 꼬리의 끝에서 흘러나와 르베나와 키메라를 함께 감싸고 있었다.
툭.
다한이 다급히 제 손을 내밀었다. 키메라를 얼른 치워버리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르베나와 키메라를 감싼 빛의 경계에 막혀 튕겨 나와 버렸다.
팍……! 파팍……!
더 강하게 빛의 경계를 향해 주먹을 날려보았지만 마치 강철과도 같은 강도의 경계는 다한의 손을 가볍게 튕겨내기만 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다한이 급히 검을 세워 들었다. 그러고는 빛의 경계를 향해 제 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째애엥……! 콰직.
듣기 싫은 진동 소리와 함께 너무도 간단하게 다한의 큰 검이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투명한 빛의 결계 안, 요요한 푸른 눈의 키메라는 마치 르베나를 지키듯 그녀의 머리 맡에 앉아 그, 다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바심과 당혹스러운 마음의 다한이 초조함을 담아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얕은 숨을 내쉬던 르베나의 안색이 어쩐지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귓가를 맴도는 여름밤이었다.
* * *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거지?”
흠칫. 놀란 인영이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뭔가를 망설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유파, 시드여…….”
인영에게 말은 건 이, 루드바하가 제 얼굴을 가린 로브를 거둬내며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 이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어딜 가는 거지?”
루드바하의 짙은 푸른 눈이 빈틈없이 가스트의 회색 눈을 압박하듯 조여 왔다.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잠시 멈춰있던 가스트 역시 그 눈을 한참 마주 보다가 곧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루드바하에게 물었다.
“유파시드여, 혹 르베나 공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입니까?”
가스트의 말에 루드바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옆에 시립한 녹색 머리의 사내가 그 질문에 흠칫 놀라며 루드바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제정신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내 라웅의 눈과 루드바하의 얼굴을 본 가스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눈이 모든 걸 말씀하시는군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루드바하는 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몸에 두른 검은색의 로브를 머리 끝까지 다시 끌어 올리며 가스트를 지나쳐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녹색 머리의 라웅 역시 루드바하의 옆에서 가스트와 루드바하를 번갈아 보며 어정쩡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츠들의 중심 유파시드와… 숨겨진 베이라들의 공주라…….’
조금 전 미소 한 점 없던 루드바하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린 가스트가 루드바하와 라웅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은 발자국소리가 빛 한점 없는 어둠에 묻혀 점점 옅어졌다.
“결국… 하아…….”
털썩.
잔뜩 지친 기사 룬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밤새 그는 전날 밤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이는 룬뿐만 아니라 제1기사단 모두가 그러하였다.
“저 털뭉치 새끼! 으득…….”
한 기사의 증오 섞인 말에 모든 기사들의 눈이 르베나의 옆에 떡하니 붙어 있는 흰 털뭉치에게로 향했다.
환한 빛의 폭사 이후 기사들은 키메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빛의 경계를 깨기 위해 밤새도록 달려들었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은 르베나를 그냥 두었다가 죽기라도 할까 싶어 그들은 검, 주먹 심지어 돌덩이까지 가리지 않고 빛의 경계를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결계는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르베나의 목숨이 언제 다할지 모르는 상황에 기사들은
점점 초조함에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렇게 점점 사위는 칠흑 같은 밤을 지나 밝아오고 있었고 빛의 결계는 여전히 견고했으며 그들은 모두 전날보다 훨씬 수척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르베나 공주가 아직 그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꼬리 좀 치우라고, 이 빌어먹을 키메라 새끼야!!”
룬의 절규와 같은 소리와 함께 숲속의 새들이 놀라 후드득 날아갔다.
“팅팅! 티이잉~?”
그 순간 키메라가 낸 소리에 룬과 기사들의 이마에 열십자가 새겨졌다.
처음에는 결계를 내리치는 기사들을 경계하던 눈빛으로 바라보던 키메라가 어느 새부터 왠지 비웃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들어 댔기 때문이다.
토끼의 것처럼 생긴 작은 귀가 팔랑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룬의 비명에 키메라는 마치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저… 키메라 새끼! 죽여 버리겠어!!”
키메라의 도발에 넘어간 기사 룬이 다 부러진 검을 들고 다시 뛰어들었다.
타앙……!
그리고 언제나처럼 맥없이 튕겨 나와 널브러졌다.
“낏.”
그 모습을 보고 왠지 풋 하고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는 털뭉치 키메라의 소리에 기사단 사이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이내 인내심의 한계를 열 번 이상 겪은 그들에게 내려앉은 고요한 절망과 같이 어둠을 비추는 그날의 해가 점점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장… 해가 밝아옵니다… 그 베이라 새끼가… 나올 시간이에요.”
이윽고 절망 섞인 한 기사의 목소리가 무겁게 그들 사이를 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