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제1장 디오니스 (34)
키메라들이 모두 격퇴당하는 경우의 수, 그런 것 따위는 쥬라의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 호각을 이루던 싸움이 저 공주가 합세하고 나자 승기가 기사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쥬라는 초조해졌다.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간과 공을 들여 결계를 쳤다. 돌고 돌아 저들이 지칠 때쯤 키메라를 풀어 모두 죽이면 산에서 길을 잃은 일행이 마물에게 공격당해 죽었다는 자연스러운 시나리오가 완성될 참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의 실력은 듣던 것보다 훨씬 굉장했고 공주라는 계집 또한 놀라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쥬라는 틈을 노렸다. 키메라를 모두 격퇴하고 방심하는 사이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기사단장을 죽이고 혼란할 틈 타 남아 있는 키메라들을 풀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키메라는 열 마리 남짓. 적재적소에 풀어 모두를 실수 없이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연이은 두 번의 공격이 막힌 것도 모자라 역습을 당하다니……!
그 여파로 힘들게 친 산의 결계가 깨질 뻔했다. 쥬라 본인이 당한 내상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였다. 반대로 말하면 저 공주의 마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라는 얘기도 됐다.
쥬라는 만약 조금이라도 방어에 늦었다면 여기에 시체로 누워 있는 건 본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기사들은 이전에 협의했던 대로 모두 르베나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베이라가 나타나면 르베나를 몸으로라도 지키자 미리 상의한 탓이었다.
“너를 움직인 건 세나르 왕비인가?”
르베나의 질문에 쥬라가 피를 퉤 뱉어내며 말했다.
“베이라가 있다면 아까와 상황이 달라지는데 내가 함부로 입을 열 리가요? 흐음… 이를 어쩐다… 베이라는 죽이기 너무 아까운데… 하! 하지만 안 죽이자니 지금 내가 너무 아파서 말이야… 빌어먹을!!”
고통이 꽤 심한지 말을 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그를 르베나가 찬찬히 살폈다.
‘알맞은 타이밍에 한 방……!’
그것으로 그를 제압해야 했다.
차라리 일대일의 대결이었으면 간단했을 것이다. 쥬라 따위야 제대로 컨트롤 되지 않던 이전 삶에서의 르베나 마력으로도 쉬웠으니.
하지만 르베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이번 승부의 관건이었다.
르베나가 섣부르게 쥬라를 공격할 경우 그가 난사하는 마법으로부터 르베나는 본인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도 보호해야 했다. 또한 차라리 죽이는 거라면 일격에 끝내면 그만이지만 배후를 알아내고 세나르의 확실한 약점을 잡기 위해선 그를 생포해야만 했다.
르베나는 이참에 어린 시절 세나르가 쥬라를 이용해 궁에 약물을 푼 것까지 폭로할 셈이었다.
그러면 세나르는 더 이상 디오니스에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커억!”
쥬라가 다시금 피를 내어 뱉은 순간, 르베나는 빠르게 마력을 모아 주저 없이 그에게 날렸다.
펑!!
큰 소리와 함께 그가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격은 정확히 쥬라의 몸을 저격했다.
다한을 비롯한 모두가 르베나가 가볍게 던진 마법의 위력에 놀라 쥬라가 아닌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공주님은 검술에 마법까지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지……!’
강하게,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날린 공격 마법은 이제껏 베이라를 잘 보지 못한 기사들이 보기에도 엄청난 실력 같았기 때문이다.
“주, 죽은 건가?”
한 기사의 말에 모두의 눈이 이번에는 다른 한곳으로 향했다. 르베나의 마법에 맞고 뻗어 있는 쥬라, 그가 있는 곳을.
여기저기 피를 잔뜩 흘리고 어쩐지 팔 한쪽도 크게 상한 것으로 보이는 그는 꼭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워낙 빠르게 맞았으니 제대로 된 방어는 하지 못했을 거다.’
누워있는 쥬라를 응시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르베나의 앞을 순간 다한이 막아서며 말했다.
“공주님, 확인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 계시지요.”
하지만 다한의 말에 르베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도면밀한 자다. 기절한 척한 것일 수도 있으니 내가 가는 게 맞다.”
제 말에 다한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르베나는 쓰러져있는 쥬라에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공격 마법에 대비해 몸에 방어 마법을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통의 방어 마법은 마력이나 신력을 막는 것이었고 상위 개념의 방어 마법은 물리력까지도 함께 막을 수 있었지만 쥬라 같은 베이라에게 물리력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르베나는 마법만을 막는 방어막을 두르고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쥬라에게 다가간 르베나의 눈이 쓰러져 있는 그를 향했다. 그의 팔 한쪽은 거의 덜렁거리는 수준이었고,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내장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용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기절은 했겠지.’
르베나는 다시 한번 방어 마법을 확인한 뒤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그를 마법으로 포박하면 끝이었다. 다만 포박마법은 근거리 시전이 되지 않아 포박할 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야 했다.
르베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쓰러져 있는 그의 상체쯤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손끝에 마력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홰액……!!
기절한 줄 알았던 쥬라의 품에서 무엇인가가 확 튀어 올랐다.
“…윽!”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뾰족한 무엇인가가 르베나의 팔뚝에 박혔다. 순식간에 르베나에게 다가온 어떤 것이 르베나의 팔을 물어버린 것이다.
“키메… 라?”
르베나의 작은 중얼거림에 쥬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윽… 크윽!”
눈을 뜨자마자 남은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친 쥬라가 뒤로 물러나 힘겹게 섰다.
한쪽 팔은 이미 거의 끊어져 달랑거리고 있었고 내장은 모두 강력하게 맞은 마력으로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지금 깨어난 것이 거의 기적인 수준이었다.
‘제길… 회복마법을 걸어도 꽤 시간이 걸리겠는데…….’
불안한 듯 주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결계가 흐릿해지고 있음이 보였다. 그의 눈이 재빨리 앞에 서 있는 르베나에게 향했다.
지금 르베나는 제 팔에 붙은 것을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키메라를 향해 내리치자 검이 단단한 무엇인가에 부딪힌 듯 나가 떨어졌다.
아무리 제 왼팔을 털어내고 주먹으로 키메라를 내리쳐도 작은 키메라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깊이 이를 박고 있었다. 심지어는 마법조차 통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쥬라가 비릿하게 웃었다.
“소용… 없다… 크… 그 키메라는 한번 문 마법사의 마력이나 신력이 다… 하아하아… 하기 전까지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니까. 크크… 품에 품고 다닌 보람이… 쿨럭… 있군.”
쥬라의 말에 르베나가 제 왼팔에 이를 박고 있는 작은 키메라를 보았다. 흰색 털뭉치처럼 생긴 키메라는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를 가졌다. 크기는 사람 주먹만 한데 푸른색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요요하게 빛났다. 거기에 달린 작은 토끼 귀는 때때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푸른 색 눈동자가 르베나의 붉은 눈과 마주치자 토끼 귀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키메라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귀여운 외양이었으나 지금 그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
순간 르베나가 느껴지는 감각에 놀란 눈으로 제 팔에 박힌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흐흐… 이제 느꼈나… 그 키메라는 마력이나 신력을 빨아먹도록 만들어진 거다. 이를 박은 숙주의 마력이나 신력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지.”
그의 말대로였다. 르베나는 자신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 마력을 더듬거렸다.
“멈출 방법은 하나. 그 키메라가 먹고 있는 것과 다른 성질의 마력이나 신력을 주입하면 되지만… 흐흐. 여기에 베이라와 세츠라고는 너와 나 둘뿐이니 어림도 없지… 크크크.”
쥬라의 말에 제 왼쪽 팔에 붙어 계속 마력을 빨아들이는 키메라를 보던 르베나가 쥬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방법도 있는 것 같군. 이 상태로 일단 널 죽여 버리는 방법이 말야.”
르베나가 서서히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써는 쥬라를 빨리 포획하고 궁으로 돌아가 가스트에게 키메라를 떼어 달라고 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르베나는 언제나 판단이 빨랐고 그 판단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침없던 르베나의 눈이 잘게 떨렸다.
“와하… 크하하하하하!!! 말했지……! 쿨럭… 마력을 빨아들인다고… 네년이 마법을 쓰겠다고 마력을 모으면… 하아… 그만큼 빨리 빨아들일 뿐이다…….”
쥬라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르베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아직도 모르겠나? 그 녀석을 달고 있는 한. 너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는 거다! 크크… 쿨럭!”
쥬라의 말에 르베나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방금 마법을 쓰려고 모은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팅… 이 세상 어딘가에는 마력이나 신력에 반응하지 않는, 심지어 그 힘을 조절할 수도 있는 동물이 산다고 전해지지.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의 동물, 나팅……!”
그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찼다.
“나는 하늘이 도와 그 나팅을 보았고 내 마력으로 각성시켰다. 크하하하! 비록 한 마리밖에 없어 언제나 품고 다녔지만… 크크크…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쥬라의 말을 들은 르베나의 눈이 작은 키메라를 향했다.
‘나팅… 신화 속에 나오는 신의 동물이라…….’
이 순간에도 키메라는 계속해서 르베나의 마력을 빨아들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볼록하게 부푸는 것이 보였다.
르베나가 시선을 돌려 쥬라를 보았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검을 다시 주워 들었다.
스르릉.
“마법이 안 된다면 이런 것도 있어.”
르베나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휘두름과 동시에 펑, 소리가 나며 쥬라가 머물렀던 자리가 비워졌다.
“젠장……!!”
분명 마지막 남은 마력을 사력으로 그려 모아 어딘가로 피신한 것이 분명했다.
어질.
그리고 순간 르베나의 몸이 휘청였다. 급하게 뛰어온 다한이 가까스로 르베나를 받쳐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공주님!”
다한의 부름에 르베나가 짜증스레 손에 붙어있는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창백해진 르베나의 안색이 현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감을 말해주는 듯했다.
“제길… 이 키메라가 빨아들이는 마력이… 생각보다 많아… 하아. 녀석은 분명 회복 마법을 걸러 갔을 거다. 주인이 결계에서 멀어지면 마법이 깨지기 때문에 멀리는 못 갔을 거야…….”
헐떡이는 르베나의 숨결에 다한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하아… 녀석의 상태로 볼 때 하룻밤… 하룻밤 정도면 얼추 몸을 추스르고 다시 나타날 거야.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못 나타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안 나타날 이유가 없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이걸… 떼어내야 해.”
르베나의 말에 다한의 시선이 르베나의 왼팔에 붙어 있는 작은 털뭉치에게로 향했다.
‘검으로도, 힘으로도 심지어 마법으로도 떼어지지 않는 키메라라니……!’
어둡게 가라앉은 다한의 얼굴이 르베나를 향했다. 르베나의 얼굴이 시시각각 더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동시에 다한의 얼굴에도 낭패의 기색이 깊어졌다.
타닥타닥.
일행은 르베나의 말을 듣고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수풀 가운데 자리를 잡고 부상을 입은 기사들과 키메라를 보자마자 기절한 시녀 루를 눕히고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기사들이 그들을 치료하며 가운데 불을 지폈다.
르베나의 곁에 앉은 다한은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검으로 다시 내리치고, 악력으로 터뜨릴 듯 쥐어짜 보기도 했지만 키메라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악력으로 세게 쥐면 아프다는 듯 푸른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떨어지지 않는 키메라를 보며 다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때 거의 백지장 수준으로 창백해진 르베나가 힘겹게 눈을 뜨며 그에게 말했다.
“다한 경,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지 빨리 이 녀석을 떼어 내고 마력을 회복해야 해. 그러기 위해… 도박을 하나 하지.”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침통한 얼굴을 들었다. 키메라를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르베나를 지키는 기사였지만 지금은 르베나 팔에 붙은 털뭉치 하나 제거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키메라라도 한정된 부피를 갖는 생물인 이상, 이 녀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을 거야.”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공주님의 마력이 모두 소진되어 버리시면…….”
“그래서 도박이라는 거다. 나도 이 녀석이 어디까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한계는 있을 거고 한계에 차면 이 녀석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그 이후 휴식을 취하면 마력은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 다만, 내가 거의 모든 마력을 소진해도 이 녀석이 떼어지지 않으면…….”
르베나의 붉은 눈이 다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는… 내 팔을 잘라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