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4화 (34/276)

34화

제1장 디오니스 (33)

“끼에에엑……!”

“쿠어억!!”

여기저기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흩뿌려진다.

홰액……!

쇄도하는 은빛 칼날에 또 하나의 키메라가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벌써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고 일행의 근처에는 족히 스무 마리는 넘어 보이는 키메라들이 무덤의 산을 쌓고 있었다.

“이제… 열 마리 남짓이다! 모두 정신 차리고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네!”

“정신 붙들어 매자!”

기사들에게 힘차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키메라에게 큰 칼날을 휘두르는 다한의 외침에 모든 기사들이 우렁찬 소리로 대답하며 기합을 다졌다.

벌써 몇 시간째, 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키메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키메라들은 모두 급소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급소라고 생각된 곳을 베어도 다시 일어나 덤비기 일쑤였다.

처음에 기사들은 저마다 르베나와 시녀 루를 가운데에 두고 둥글게 감싼 후 키메라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신경 써 가며 싸워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체력은 산을 헤매며 제법 떨어진 상태였고, 지치지도 않고 몇 번이든 달려드는 키메라를 상대하며 완전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키메라에게 부상당하는 기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모두의 만류에도 르베나가 검을 들어 공격에 합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오른 몸의 곡선이 둥글게 휘어진다. 이에 검은 머리가 풍성하게 아래로 쏟아지며 그려내는 선은 피투성이의 이곳과는 마치 다른 그림인 듯 보였다. 가느다란 팔에서 뻗어 나온 은빛의 검은 날카롭게 펼쳐져 빠르게 다가오는 키메라의 눈을 정확히 찔렀다.

푸쉭……!

“끄꺄아아악!”

부드럽게 뽑혀 나온 검과 동시에 듣기 싫은 키메라의 울음소리와 녹색 선혈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투두둑,

땅에 착지한 르베나의 뒤로 찐득한 녹색 선혈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어느새 누군지도 모를 것들의 피로 점칠 되어 있었다.

홰액……!

날카롭게 고개를 돌려 날아오는 키메라의 날개를 잘라버린 르베나의 눈이 순간 어둡게 일렁였다.

오싹.

다가오는 키메라들을 베면서도 기사들은 차마 그녀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절대로 검을 뽑으면 안 된다고 말리던 기사들의 말이 무색할 만큼 르베나는 가볍고 빠른 검술을 이용하여 여기저기 키메라들을 베고 다녔다.

한 번도 살생을 해 보지 않았을 어린 공주임에도 그녀의 칼날에는 한 치의 자비도,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가 지나간 곳에는 오직 녹색의 선혈과 키메라들의 잘린 몸뚱이만 남을 뿐이었다.

“젠장! 명색의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가 레이디께 질 수는 없지!!”

다가오는 덩치 큰 키메라를 힘껏 베어내며 기사 룬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다른 기사들도 르베나에게 질세라 더욱 검을 높이 치켜올렸다. 그렇게 치열하게 펼쳐지던 접전은 어느새 르베나 일행의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이윽고 마지막 키메라를 베어 넘어뜨린 다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욱한 피 냄새가 역겹게 올라왔다. 그리고 어느새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피 칠갑이 되어 있는 르베나에게 그의 시선이 닿았다.

‘저분이 평생 외궁에만 살았던 공주님이라니… 이걸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거지…….’

아무리 검술 실력이 좋은 기사도 실전에서는 다르다. 살육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망설임도 자비도 가지지 않게 된다는 것은 기사로서 중요한 자질임이 분명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임도 분명했다. 설령 악인이라 해도 살아있는 생명의 빛을 꺼트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르베나는 처음 살을 베어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분은 마치 이미 살육을 여러 번 해 본 사람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망설임 하나 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거지…….’

이어지는 생각에 문득 놀란 다한이 제 머리를 가볍게 떨어내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지나친 억측이다. 저분의 옆에 오래 함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눈앞에 선 르베나에게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갑작스레 뒤를 돌아본 르베나의 붉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순간 르베나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색의 기운이 다한을 향해 쇄도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다가오는 마법의 기운. 그걸 목도한 다한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 * *

“이제 이틀 남았나…….”

중얼거리는 루드바하의 말에 유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유안의 질문에 잠시 몸을 굳힌 루드바하가 곧 여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내가 뭐라고 했나? 유안 자네 귀가 어두워졌나 보군. 쯧쯧… 그러게 일 좀 적당히 하라니까.”

루드바하의 뻔뻔스러운 말에 유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는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서 보던 서류에 집중했다.

최근 너무 실없는 말을 자꾸 뱉는 루드바하 때문에 덩달아 유안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오늘 루드바하는 귀찮게 구는 디오니스의 귀족들과 아침부터 해가 진 지금까지 쭉 함께 있다 온 참이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달달 볶였을 그를 생각해 유안은 짐짓 무례한 본인의 생각을 서서히 지워 나갔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녹색 머리의 라웅이 들어섰다. 라웅은 손에 과자를 들고 오물거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땅치 않게 바라보던 유안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또 외궁에 가서 얻어먹은 거냐? 이러다가 라웅 네놈 때문에 젠의 위신까지 말아먹겠군! 잊지 말아라. 우린 곧 제국으로 승격할……!”

우적우적.

유안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라웅은 한 손으로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고 나머지 손에 든 과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먹어 대는 폼이 어찌나 기가 막힌지, 순간 제 입만 아파 오는 것 같았다.

“하… 디오니스의 디저트는 정말 훌륭해.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특히 공주님의 궁은 정말이지… 으……!! 아, 원래 루라는 시녀가 구워 주는 케이크가 진짜 맛있었는데… 쩝…….”

과자를 먹으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라웅을 본 유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왜인지 라웅이 뱉는 최고야 짜릿해 따위의 말이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오늘이었다. 무엇보다 저놈이 쓰면 안 되는 말인 것 같은 기분이 유난히 심기를 건드렸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드바하가 라웅의 말에 의문이 생긴 것도 그쯤이었다.

“왜, 그 시녀가 이젠 네 녀석이 귀찮다고 구워 주지 않아?”

루드바하의 말에 라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폐하가 뭘 모르시네. 외궁의 시녀들이 날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만 보면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난리도 아니라니까? 잘 먹는 게 너무 보기 좋다나? 하하 이놈의 인기.”

라웅의 말에 루드바하와 유안 모두 뭐 씹은 표정으로 그를 봤다가는 다시 본인들의 일에 빠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안은 더욱 빠르게 서류를 넘겼고 루드바하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마치 왱왱거리던 모기를 잡은 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같이 평화로워 보였다.

이 모습에 입 안 가득 과자를 물고는 심통이 난 얼굴로 라웅이 바락 소리쳤다.

“아, 진짜! 진짜라니까 그러네! 루도 나만 오면 얼마나 케이크를 구워서 줬다고!”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라던가. 유안은 외알 안경을 살짝 올리고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하… 루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원래는 그 공주님이랑 어제 오기로 되어 있었다던데. 케이크 빨리 먹고 싶다. 루가 만든 달콤하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고 고소한 생크림과…….”

유안과 마찬가지로 계속 중얼중얼 우는 소리를 내뱉는 라웅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루드바하가 문득 들려온 낯익은 이름에 라웅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공주? 르베나 공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루드바하의 말에 라웅이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마저 아까웠는지 혀로 날름날름 핥으며 그가 말했다.

“아… 응!! 그래서 지금 외궁 분위기가 거의 초상집 분위기던데? 그, 뭐라더라… 무슨 할아버지 베이라가 통신구를 줬는데 그것도 작동이 안 되고! 원래 어제 돌아오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더라. 후벤이란 단장은 당장 찾으러 가겠다 난동을 부리고, 음… 그 할아버지 베이라는 더 기다려 보자고 하고 이것저것 아주 난리던데?”

가볍게 이어지는 라웅의 말에 어느새 루드바하의 자세가 완전히 곧게 펴졌다. 계속 늘어져 있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져 창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에 깊이 물들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하늘과 같이 어둡게 빛나는 그의 짙고 시린 벽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펑. 퍼엉!!!

르베나가 던진 마력이 다한에게 닿자마자 주변을 울리는 강한 파공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어느새 다한이 있던 자리에는 자욱한 연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다, 단장님……?”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기사들이 전부 다한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두 손 가득 붉은 마력을 모아 허공을 향해 날카롭게 마법을 날렸다. 단 한 줌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퍼어엉!!

허공에서 큰 파열음이 남과 동시에 산 전체를 둘러싼 결계가 잘게 진동했다.

결계가 진동하며 언뜻 결계 바깥쪽이 보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두터워지며 외부와의 벽을 세웠다.

르베나의 눈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배었다.

그때 허공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입에서 연신 왈칵 붉은 피를 흘리며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쥬라. 그들이 찾던 베이라가 드디어 본체를 드러낸 것이다.

“젠장… 베이라… 였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르베나를 노려보는 쥬라를 보고 르베나 역시 표정을 굳혔다.

조금 전, 다한을 향해 쇄도하는 마법을 느낀 르베나는 급하게 비슷한 정도의 마법을 날리며 동시에 다한 주위에 실드를 쳤다. 그리고 연이은 두 번째 공격으로 그를 처치하려던 쥬라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녀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꼴에 베이라라고 예상치 못한 공격을 겨우 막긴 한 모양이다. 물론 내상을 입은 걸로 봐서 완벽히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쥬라를 훑어보던 르베나가 의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까짓 게 펼칠 결계가 아닌 것 같은데.”

르베나의 말에 쥬라가 멈칫, 하다가는 웃으며 말했다.

“호오. 아무래도 네년은 생각보다 실력 있는 베이라이고 말이야.”

분노가 가득 찬 쥬라의 눈이 르베나와 차가운 눈과 맞닿았다. 이건 그의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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