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3화 (33/276)

33화

제1장 디오니스 (32)

“제가 가 보겠습니다!”

“후벤 경, 조금 더 기다리게.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네.”

“‘하루밖에’라뇨!!”

높아지는 후벤의 언성에 가스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외궁 밖 궁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벌써 어제 도착했어야 했던 르베나 일행은 누구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벌써 이틀 째, 아무리 통신구를 통해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오지 않았다.

베이라와의 충돌이 있을 거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이 오지 않는 일행들에 후벤은 거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후벤 경, 자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공주님은… 그분은 정말 대단한 베이라라네. 그 어떤 베이라가 와도 그분을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란 말이네. 그러니 조금만 더… 그분을 믿고 기다리세. 그게 지금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일 걸세.”

가스트의 말이 분명 맞다. 그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심장은 계속 불길하게 뛰어댔고 어린 시절 르베나의 처참한 몰골이 자꾸만 생각났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제가 답답해 후벤이 휙, 외궁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후벤을 바라보는 가스트의 회색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분명 공주님을 제압할 베이라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강한 베이라였다.

가스트는 이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녀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맞았다. 상대가 베이라라면 후벤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테니.

만약 간다면 차라리 가스트가 가는 게 맞았다. 그리고 가스트는 오늘 밤까지도 일행에게 소식이 없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르베나 일행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그분은 분명 무사하실 거다. 내면과 외면이 모두 강한 분이 아니시던가.게다가 그 많은 기사들과 함께…….’

후벤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가스트의 눈가가 잘게 떨려온 것은 그때였다.

“기사들과 함께……!!”

나직이 말을 읊조린 가스트가 잘게 떨리는 손을 들고 얼굴을 덮어버렸다.

단 하나의 가능성.

아무리 대단한 베이라라 하여도 르베나가 무사하지 못할 단 하나의 가능성이 방금 가스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 * *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르베나는 쥬라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저 놈이 얼마나 정상적이지 않은 지 르베나는 지난 시간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을 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도 어린 르베나를 외궁에 철저히 고립시킨 건 저놈의 소행이 분명했다. 그렇게 쥬라를 보자마자 날린 르베나의 마법은 보기 좋게 쥬라의 몸을 관통했다.

‘역시……!’

르베나는 제 마법이 닿는 순간 흐릿해지는 쥬라의 몸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오호! 마석… 인가요, 공주님?”

순식간에 쇄도한 기운에도 당황하지 않고 안광을 빛내며 묻는 쥬라의 눈이 르베나에게 닿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손에.

르베나의 손에는 작은 보석이 있었는데 분명 방금 쇄도한 마법은 저 마석에서 발현되었다.

쥬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흠… 이 마력은… 호오… 가스트 님의 선물이군요!”

쥬라의 말에 르베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신중하게 쥬라의 형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르베나는 궁을 떠나기 직전 마석을 구해 가스트의 마력을 조금 넣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마하렌에서 떠나기 직전, 르베나는 가스트의 마력이 깃든 마석에 본인의 공격 마법을 추가로 주입했다.

이전의 삶에서 보았던 쥬라는 매우 간악하고 간교한 자였다. 그렇기에 자신 있는 싸움에도 선뜻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르베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본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공격 마법이 발동되는 마석을 준비한 것이다.

마석에는 가스트의 기운이 섞여 있으니 르베나의 마력의 느껴 보지 못한 쥬라는 그것을 가스트가 만든 마석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마석에 주입된 르베나의 마법을 파훼하는 정도로 현재의 쥬라가 어느 정도 마력을 지녔는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폭주상태라 저놈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니… 음… 하나는 성공했고, 하나는 실패했나…….’

르베나가 제 앞에서 히죽대며 웃는 쥬라를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이번 마법으로 확인했지만, 쥬라의 마력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공격을 받으면 적당한 힘으로 방어를 하지 않는다. 갑작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본인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방어를 하곤 한다. 이는 베이라나 세츠 역시 마찬가지라 르베나는 방어 마법 정도로 쥬라의 마력을 확인하려 했었다.

“일루젼인가…….”

순간 르베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들은 쥬라가 꽤나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오……! 공주님께서 마법에 흥미가 있으신가 보군요! 일루젼을 아시다니!”

쥬라의 눈이 큰 흥미와 함께 조금은 다른 것을 담고 르베나의 얼굴과 몸을 찬찬히 훑었다. 아직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도도한 표정, 그리고 벌써부터 굴곡진 몸매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니, 누군들 그녀를 맘에 들어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시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인영에 의해 가려졌다.

르베나를 둘러싼 기사들은 본 쥬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우리 기사님들이 화가 잔뜩 나셨네.”

쥬라의 빈정거림에 다한이 사나운 기세로 검을 세웠다.

방금 쥬라의 눈에 정욕이 깃든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감히 더러운 눈으로 아직은 어린 공주님을 훑다니! 다한의 분노가 제 검에 그대로 전해졌다.

“소용없다, 다한 경. 지금 저자는 일루젼이라는 마법을 시전 중이야. 저 몸은 본체가 아니라 환영 같은 것이라 일체의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단 소리다.”

하지만 들려온 르베나의 말에 다한이 애써 당황스런 마음을 숨기며 작게 물어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하는지…….”

다한의 말속에 섞인 심경을 이해한 르베나가 쥬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루젼 마법은 원거리에서 시전할 수 없어. 분명 이 근처에 본체가 있을 거다. 하지만 결계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본체를 찾기는 힘들어. 여기 베이라가 없다고 생각할 텐데도 저러는 걸 보면… 상당히 용의주도한 놈이거든.”

다한에게 놈의 마법에 대해 설명하던 르베나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상해… 본체가 아니면 마법도 시전하지 못할 텐데 왜 굳이…….’

작은 소리로 전해졌을 텐데도 다한에게 말한 마법 설명에 쥬라가 더없는 영광이라는 듯 짐짓 과장스럽게 팔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시군요, 공주님!! 아아, 맞습니다. 이건 제 몸이 아닙니다. 단지 환영일 뿐이죠. 기사님들께서 그 납덩이를 아무리 갖다 대어도 절 벨 수 없단 말입니다.”

쥬라의 말에 르베나를 제 등 뒤로 감춘 다한이 소리치며 물었다.

“우리한테 바라는 게 무엇이냐!!”

그 말에 쥬라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한 르베나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아… 공주님의 외모가 자꾸 눈에 밟혀 고민이 좀 되긴 하지만… 흠…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오늘은 시간이 좀 없어서!!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건 간단합니다. 여기서… 키키… 죽어 주시면 됩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여상히 말하는 쥬라의 말에 다한이 으득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까짓 것한테 줄 목숨 따위, 여기 있는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말해라. 누구에게 사주받은 것이냐?”

날이 선 다한의 눈을 보고 씨익 웃은 쥬라가 말했다.

“궁에 계신 어떤 분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말하도록 하지요! 남은 여러분의 일정이 많거든요!”

그는 가볍게 팔을 펼치고 연극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여러분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었습니다. 아아… 여린 공주님과 무력한 시녀까지 데리고 말이죠! 식량도 동나고 어쩐 일인지 길도 못 찾고 그렇게 빙빙빙… 그러던 중……!”

격렬한 몸짓으로 두 손을 꼭 모아 쥔 그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저열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아아… 어떡하나요. 갑작스레 마물에게 공격을 당하게 되었고, 전원 사망해 버리고 맙니다. 아… 정말이지 슬프고도 안타까운 죽음이군요. 혹시… 여기까지 이해 안 가시는 분?”

마치 선생님처럼 말하며 학생들을 채근하는 듯한 쥬라의 말투에 모두 미친놈 바라보듯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르베나가 말했다.

“어째서 마법으로 공격하지 않지? 그편이 훨씬 빠르고 간단할 텐데.”

르베나의 말에 쥬라가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 말했다.

“아!! 저도 너무나 너무나 그리고 싶답니다, 공주님!! 하지만 아쉽게도 공주님께서 여기서 죽으면 궁에 계신 가스트 님이 조사를 나오실 테고, 제 마력의 흔적을 추적당할 수도 있는지라… 하하… 아쉽지만 오늘은 마물에게 죽은 걸로 해 주셔야 겠습니다.”

쥬라의 말에 르베나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생각보다 훨씬 주도면밀하고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타입이다. 사후의 일까지 생각해 두다니.’

본체만 눈앞에 있다면 한 번에 보내 버리리라 다짐했던 르베나에게 조심성 많은 베이라라니,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대로, 보통 마력을 쓰게 되면 그 장소에는 마력의 흔적이 남는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나 추적술에 능한 마법사는 이를 흔적으로 마법을 시전한 베이라나 세츠를 찾을 수도 있다.

만약 쥬라가 디오니스의 베이라라면 분명 마법학원에 정보가 있을 테고, 그곳에 재직했던 가스트에게 마력의 흔적을 쉽게 읽힐 수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르베나가 다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한 경, 어떻게든 본체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체력을 아껴라!”

르베나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 다한이 쥬라를 보며 말했다.

“마물 따위 우리한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군. 우리를 죽이고 싶다면 네놈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다한의 말에 히죽히죽 웃은 쥬라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 맞습니다, 맞아요!! 상급 마물 정도가 되지 않고는 제1기사단 여러분을 죽이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을 위해 각별히 준비한 것이 있으니까요.”

쥬라의 말에 끝남과 동시에 오싹한 한기가 르베나 일행을 덮쳐 왔다.

검을 들고 경계 태세를 갖춘 기사들이 애써 이를 아득 물며 검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준 순간이었다.

“크르륵…….”

“끄아아륵…….”

“으으… 르…….”

일행의 주위로 족히 수십 마리는 될 듯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키메… 라?”

놀란 듯한 르베나의 말에 기사들의 어깨가 흠칫, 굳는 것이 보였다.

키메라.

그것은 동물 혹은 사람끼리 융합시켜 지각 능력을 빼앗고 오직 무기로만 쓸 수 있게 만드는 흑마법의 일종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든 베이라와 세츠들에겐 흑마법의 사용이 금기시되었다. 흑마법을 시전한 대가는 생명 그 이상의 것이었고, 마법의 결과물 또한 저주와 참혹함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래에 키메라는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갖가지 모습을 한 키메라들이 일행의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트롤의 몸에 사자의 머리를 단 듯한 것, 분명 다리는 두 개인데 얼굴이 각가지 동물의 모습으로 세 개가 달린 것, 코끼리 같이 큰 몸뚱이에 날카로운 이를 가진 흉물스러운 얼굴의 것, 마치 인간의 얼굴을 달고 있는 것 같은 조류까지.

족히 서른 마리는 될 것 같은 키메라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환하게 떠 있던 해는 키메라들의 걸음과 함께 점점 아래로 지고 있었다.

어둠이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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