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2화 (32/276)

32화

제1장 디오니스 (31)

르베나의 말을 곰곰이 듣던 다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의 르베나는 평소보다 화려하고 그만큼 아름다웠다. 사이렌을 파는 광부의 보석상에 가기 전 보였던 모든 보석상에서 한 건 잡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붙잡으러 나올 정도로 오늘의 르베나는 지갑을 펑펑 열 준비가 된 레이디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장부도 보지 않고 나오기에는 좀…….”

끝말을 흐리는 다한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물론 우리가 유추할 수 있건 그가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었지. 그가 말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난 아마 장부를 볼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말실수라면…….”

“그는 보석에 대한 내기를 모른다 하였다. 그리고 난 그에게 누군가 보석을 깨트렸다고 했지. 그런데도 그는 이미 누가 깼는지 알고 있는 듯하더군.”

“계집… 이 깨뜨린 보석. 이라고 했죠. 하!”

다한의 대답에 르베나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마치 제가 가르치던 어린아이가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 스승의 미소와 같아 다한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맞다. 그는 궁 안에 있는 누구에게서든 우리가 방문할 것이란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 분명히 들은 것이다. 하지만 마석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겠지.”

당연했다. 그것은 르베나와 가스트가 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아직 세나르는 이에 대해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으니. 곧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다한이 놀라듯 말했다.

“그럼 저자가 장부를 보여 주지 않은 건… 보석을 구하러 올 줄로만 알았지, 장부를 보여 달라고 할 줄 예상하지 못한 거군요! 마석을 조사하는 것까지 알았다면 장부를 꾸며 썼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광부는 자기가 감춰야 할 대상이 누군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님께서 굳이 베이라와 저주에 대해 말씀하신 건…….”

“맞아. 그는 우리가 떠나고 나서 분명 그 베이라한테 연락을 할 거야. 그리고 마석의 존재를 안 우리가 이대로 환궁하는 걸 그 베이라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제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말야. 그러니 배후는 기다렸다 그냥 잡으면 돼.”

“아…….”

다한은 진심으로 르베나에게 감탄했다. 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출발 전부터 의상을 준비하고 그의 작은 말실수 하나 놓치지 않으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 그물을 던지는 르베나는 절대로 평범한 열일곱 살 공주님이 아니었다.

‘게다가 베이라를 직접 맞닥뜨릴 작전까지 짜다니…….’

다한은 제1기사단 중 유일하게 르베나가 베이라임을 알고 있었다. 함께 여정을 떠나기 전 후벤과 르베나가 그를 따로 불러내 일러준 말에 처음에는 이들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대한 베이라, 가스트마저 확인해 주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무방비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그 작인 공주님이… 베이라인 것도 모자라 가스트 님마저 인정할 만큼 뛰어난 실력이라니… 게다가 일전에 보여 주신 검술은 같은 기사가 보기에도 훌륭했다.’

옆에서 생각에 잠겨 걷는 르베나를 바라보는 다한의 눈빛에 이전과는 조금 다른 빛이 하나 생겼다. 이전까지 르베나를 보던 다한의 눈빛이 보호, 동정, 연민, 애정이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다른 빛이 살며시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공주님이 베이라라고요?”

놀란 기사, 룬의 말이 작은 여관방에 울렸다. 그리고 룬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이를 보던 다한은 조금 전 르베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기사들에게 내가 베이라라는 사실을 밝혀도 상관없다.”

“네? 물론 못 믿을 녀석들은 아닙니다만… 현재 시국에 굳이 공주님께서 베이라란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걱정스런 낯으로 조심스레 말하는 다한을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어차피 베이라가 나오면 상대해야 할 건 나다. 그때 기사들이 내가 베이란걸 알면 허둥지둥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혼선을 줄이고 최대한 빠르게 베이라를 진압해 환궁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단호한 르베나의 말에 다한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물론 베이라가 마법을 난사한다면 기사들은 몸으로 막는 것 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시간 기사들은 그들의 공주님, 르베나가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다치게 하지 않겠단 일념으로 엄청난 시간 동안 훈련을 해 왔다. 그런 그들에게 르베나를 적과 싸우게 두고 물러나 있으라는 얘기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절대로 납득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한은 르베나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의 힘이 베이라 앞에 선 르베나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아까 르베나의 말을 떠올린 다한이 잠시 소란스러운 기사들 사이에서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런데 단장, 지금 상황에서… 아니 그러니까 젠이 제국으로 승격되고 베이라들은 다 자취를 감추거나 죄인처럼 취급받는 마당에 공주님이 베이라인게 알려지면… 공주님한테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순간 소란스럽던 공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듯 사위가 적막에 젖어 들었다. 다한 역시 그 말을 듣고도 선뜻 그렇다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도 뭐가 정답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신음을 삼키는 다한을 뒤로 한 채 기사들끼리는 때아닌 언쟁이 벌어졌다.

“그게 왜 공주님 탓이냐!! 그게 되고 싶다고 되고 안 되고 싶다고 안되는 것도 아닌데!!”

“누가 탓이래? 알려지면 공주님이 위험해지실까 봐 그런 거지!”

“아니 그보다 적이 배이라라니, 살아 있는 베이라가 있긴 한 거야?”

“있기야 하겠지! 다들 죽었겠냐, 그냥 어디 숨은 거지!”

“근데 베이라가 나타나면 우린 무용지물이잖아. 우리 공주님을 어떻게 혼자 싸우시게 하냐?”

저마다 이어진 이야기로 작은 여관방이 가득 채워졌다. 르베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야기, 베이라가 나타날 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 베이라를 어떻게 검으로 제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 무수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열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갖가지 이야기를 꺼냈어도 단 한 가지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놈들 중 누구도… 공주님을 혼자 싸우게 할 생각 따위는 없구나.’

시끄럽게 떠드는 기사단원을 뒤로하고 옅은 미소를 짓는 다한만이 홀로 떨어진 배경처럼 방 안에 자리하였다. 옆 방에 있을 르베나 공주님이 이 얘기를 들으시며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따위를 생각하며.

* * *

“다행이에요. 오늘이면 돌아오실 테니.”

탁탁, 잘 말린 테이블보를 펼치며 말하는 사나의 말에는 걱정이 반 이상, 안도감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르베나가 떠나고 벌써 3일, 오늘은 르베나가 돌아오기로 한 날이었다.

중간에 가스트는 르베나에게서 통신구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송받았지만, 거기에 대해 이렇다 말하지 않았고, 이전 회의에서 얘기된 것처럼 의심되는 베이라를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다만 전송구를 받은 후 후벤과 몇 마디를 나누던 가스트는 어쩐지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듯했다.

사나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가스트가 하늘에 시선을 고정 한 채 답했다.

“그러게 말일세. 벌써 오늘이군……. 공주님이라면 무탈히 돌아오실 것이네.”

르베나에게 받은 전송구에는 일의 전말과 아마 돌아오는 도중 베이라가 모습을 나타낼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궁에서 지원이 올 경우 세나르 쪽에서 냄새를 맡아 베이라가 자취를 감출 수 있으니 믿고 기다려 달란 이야기도 함께 왔다.

문제는 르베나의 말을 전해 들은 후벤이었다. 공주 바보인 그가 길길이 날뛰며 마중을 나가겠다고 우기기 시작했고 가스트는 그를 말리며 사소한 언쟁이 벌어진 것이다.

차마 후벤에게 전하지는 못했지만 베이라가 적인 이상 후벤은 르베나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스트 역시 르베나가 만약의 경우 궁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한다면 루드바하가 알 수 없도록 궁 내에서 혼선을 줘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르베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자책한 후벤은 그 뒤로 외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가스트를 뒤로하고 사나는 애써 불안함을 떨쳐내며 부엌으로 향했다.

‘분명 공주님은 가스트 님보다 훌륭한 베이라라고 했으니까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애써 마음을 다잡은 사나가 저녁쯤 도착할 르베나 일행을 위해 오늘 외궁의 모든 식자재를 총동원해 성대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여야 문득문득 떠오르는 불안한 가정 따위에 생각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생각으로 르베나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어린 베이라, 아한도 있었다.

가스트의 곁에서 함께 르베나를 기다리는 아한의 눈이 걱정을 담은 채 하늘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햇빛이 쨍쨍하던 하늘에 어느새 하나둘, 먹구름이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한의 머리카락을 닮은 그 구름이 어쩐지 싫어서 아한은 눈을 꾹 감아 버렸다.

* * *

“하… 또 여기입니다…….”

한 기사의 말에 일행 모두 좌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르베나와 시녀 루, 그리고 열 명의 기사단원 전부 지친 모습으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은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며 여기저기 옷이 물어뜯긴 기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칼로 X가 표시된 나무 밑에서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나누어 마시기 시작했다.

르베나는 조용히 입을 축이다가는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만의 버릇이었다.

벌써 이틀째. 일행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마하렌에서 출발한 르베나 일행은 올 때보다 빠른 속도로 야숙을 했던 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산에 접어들자마자 경계 태새를 갖추었다. 분명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베이라가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력이 없는 시녀 루와 그들이 보호해야 할 르베나를 가운데에 두고 기사단원이 앞뒤에 서서 이동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산을 거의 넘어갈 즈음에도 베이라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베이라를 잡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베이라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의 중간 어디쯤에서 기사들이 서서히 긴장을 풀 찰나, 르베나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분명 숲이 줄어들고 마을이 먼발치에 보여야 하는 시점임에도, 그들이 앞에는 마치 산의 초입에서 보던 수풀과 나무만이 무성했다.

곧 하나둘, 기사들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들이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이미 해가 지고 난 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야숙을 하고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찾자 하였다. 모두 긴장한 탓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르베나만이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인 밤은 그렇게 지났다.

“벌써… 이틀째인가…….”

룬의 혼잣말에 기사들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 뒤로 그들은 벌써 이틀째 이 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르베나의 말에 의하면 베이라가 마법으로 미리 결계를 씌워 공간을 비틀어 놓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공간을 비트는 마법은 시전자를 죽이거나 시전자가 직접 거둬들이지 않는 이상 파훼하는 방법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일단 마법을 시작한 시작점을 찾아 그곳에 시전한 마력보다 더 큰 마력을 주입해 파훼해야 하는데 이곳은 광활한 산이고 주변이 온통 녹색 천지였다. 조금 비틀어져 있는 공간을 시각에 의존해 찾기에 더없이 어려운 조건이었으며, 하나하나 마력으로 시작점을 찾다가는 르베나의 마력이라 할지라도 모두 소진될 만한 넓이란 것 또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만한 공간에 결계를 칠만한 베이라가 존재한단 말인가?’

르베나의 붉은 눈이 차갑게 주변을 훑었다. 보통 공간에 결계를 치는 것 자체는 상위 단계의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공간넓이에 경계를 치려면 엄청난 마력이 소모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르베나가 알기에 이 정도 마력을 지닌 이는 디오니스에는 이제 가스트 정도가 전부였다.

“공주님, 아무래도 그들은 저희가 지칠 때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벌써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돌아도 하급 마수 외에는 공격하는 무엇인가가 없는 걸 보면…….”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행은 가끔 마주하는 하급 마수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큰 공격도 당하지 않았다. 분명 그 베이라는 이들이 지칠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르베나가 일행을 한번 죽 훑었다. 이틀간 같은 자리를 맴돌고, 끊임없이 걸었다.

마하렌에서 가져온 식량은 벌써 동이 났고 기사들이 사냥해 온 동물들로 끼니를 두 번 정도 때웠다.

이제는 물도 거의 바닥났고 기초 체력이 거의 없는 시녀 루는 이미 앓아누워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업고 다녔다. 강한 훈련에 적응된 기사들마저 이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때, 이틀째의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만약 적이 우리가 지치길 노린다면… 지금 만한 타이밍은 없겠군.’

그런 르베나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을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지쳐있던 기사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르베나의 주위를 둥글게 막아섰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한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을 비롯한 제1기사단 여러분.”

씨익 웃는 그의 미소 뒤로 그날의 해가 저물어 모습을 감추었다. 사위를 감싸오는 어두운 그림자에 기사들은 제 손에 쥔 검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쥬라……!!!’

순간 르베나가 떠올린 이름의 베이라.

이 시간으로 돌아오기 전, 세나르를 위해 일하다 르베나의 첫 번째 각성에 휘말려 목숨을 다했던 그가 지금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자연스레 르베나를 향한 찰나, 무형의 날카로운 기운이 순식간에 쥬라에게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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