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1화 (31/276)

31화

제1장 디오니스 (30)

“사이렌?”

루드바하의 짙은 벽안이 손에 들린 종이를 향했다. 종이에는 보랏빛 보석의 형태가 그림으로 그러져 있었고 보석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써 있었다.

“예, 그렇게 불린다고 하더군요. 이전에는 베이라들의 마석으로 많이 쓰였던 모양인데 이제는 거의 수요가 없다 보니 구하기 힘든 보석이라고 합니다. 값은 별로 비싼 축에 속하지 않고요.”

유안의 설명에 가만히 종이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말했다.

“마석이라… 그래서 마력이 깃들어 있었나?”

“예? 마력이라니…….”

루드바하의 혼잣말을 들은 유안이 묻자 루드바하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아, 그 멍청이 왕자가 내게 주려 했다는 이거. 마력이 깃들어 있더군. 그것도 기분 나쁜 것으로.”

“아니 그딴 걸 유파시드에게 드리려 했단 말입니까?”

한쪽 눈썹을 매섭게 들어 올린 유안의 질문에 루드바하가 순식간에 차가운 얼굴로 답했다.

“나는 그저 핑계일 뿐. 그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였겠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보석이 유파시드에게 진상될 물건임이 이미 디오니스에 다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석이었다니…….”

유안의 말에 좀 전의 표정을 털어 내고 싱긋 웃어 보인 루드바하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서 멀리 떨어진 어떤 외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멍청한 놈이라고… 뒤까지 생각하고 일을 벌일 그릇이 아니야. 아니 앞이라도 보긴 할까…….”

루드바하의 말에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이 난 듯 유안이 물었다.

“그럼 폐하. 폐하께는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실 생각입니까?”

유안의 질문에 하늘을 담은 루드바하의 푸른 눈이 창가에서 떼어져 그에게 향했다.

“공주가 같은 마력이 담긴 사이렌을 구해 와야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세이렌을 구해 와도 되는 것입니까? 이 내기의 증인이자 심판이 폐하이시지 않습니까.”

유안의 말에 가만히 고민하던 루드바하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외궁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 선혈의 꽃을 피운 가녀린 몸. 그럼에도 절대로 꺼질 것 같지 않던 불꽃 같은 눈동자. 희고 작은 얼굴. 창백해진 입술.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날뛸 만큼… 매혹적인 미소.

“글세… 난 왠지 이미 판결을 내린 것 같은데. 사실은 처음부터 필요 없던 것일지도…….”

그의 눈이 르베나의 외궁을 품고 웃었다. 언제나 볼 수 있는 옅은 미소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깊은 흥미와 소유욕을 느끼는 진한 남자의 미소였다.

“이곳인가?”

허름한 보석상 앞에 멈춰 선 르베나가 다한에게 물었다. 다한이 칠이 다 벗겨진 붉은 문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사이렌이라고 불린다는 보석을 캐는 광부를 찾는 것은 작은 마을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간은 광부로 보석을 캐고 나머지는 마을 보석방에서 스스로가 캔 보석을 세공하여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찾기 쉬웠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기란 영 쉽지 않았다.

“오늘 장사하지 않는다는 말 못 들었소?”

보석방에 들어서자마자 짜증스럽게 답하는 광부에게 다한이 다가갔다.

“그저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어 그렇다. 혹시 사이렌을 베이라에게 판 적이 있나?”

“베이라에게? 하하. 이분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먼. 디오니스의 베이라들은 신마전쟁에서 죽거나 모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 않소? 더 이상 사이렌을 사러 오는 베이라 따윈 없단 말이오!”

불쾌하다는 듯 소치를 치며 돌아서는 남자를 보는 르베나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

“그럼 꼭 베이라가 아니더라도 이 사이렌이란 보석을 구입한 이들의 명단을 볼 수 있나?”

이어지는 다한의 말에 스윽 뒤돌아 르베나와 다한을 훑어보던 그가 퉷, 바닥에 침을 뱉더니 씹어 뱉듯 말했다.

“거, 재수가 없으려니까!! 가뜩이나 장사가 안 돼 죽겠구먼 아침 댓바람부터 뭘 자꾸 물어대?”

“뭐? 지금 감히 뭐라고 한 거지?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평민인 주제에 감히 공주님께 불손한 언사라니. 불쾌감을 느낀 다한이 바로 검집에 손을 대자 르베나가 빠르게 그를 저지했다. 그리고 눈앞에 앉아 그들을 노려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요즘 디오니스에서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나?”

그가 대체 뭔 소리냐는 듯 르베나를 쳐다보았다.

“디오니스에 젠의 유파시드가 왔다.”

그러자 그가 알겠다는 듯한 얼굴로 성의 없이 말을 이었다.

“아, 아무리 촌구석이라고 그 소문은 들었수다! 유파시드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디오니스에 와 수도가 난리라는 그 같지도 않는 이야기 말이오!! 우린 이 북부에서 하루하루 먹을거리 걱정이나 하면서 사는데. 팔자 좋은 새끼들.”

르베나는 광부의 거친 언사에도 개의치 않아 했다. 다만 재미난 이야기처럼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럼 이 이야기도 알겠군. 드록 왕자가 그에게 진상하려 했던 이 사이렌이란 보석을 두고 내기가 벌어진 일.”

“내기? 그건 또 무슨 트롤 코딱지 파먹는 소리요?”

그의 반문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은 르베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르베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달갑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기분이 상한 그에게도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드록 왕자가 사이렌을 유파시드에게 진상하려 했는데 누군가 이걸 깼다고 하더군. 그래서 지금 성 안에서는 이 사이렌을 다시 구해 오니, 못 구해 오니로 내기가 벌어졌다고 하고.”

르베나의 말에 광부가 이야기의 말미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이렌은 높은 분께 진상될 만큼 값어치 있는 보석이 아니오!! 수도 놈들 눈이 삐었구먼!! 혹 그거 때문에 사이렌이 필요해서 온 거면 저기 있으니 값을 내고 가져가시오!!”

그새 흥미가 떨어져 보이는 이가 대충 보라색 보석 하나를 가리켰다.

“그대의 말이 맞다. 사이렌은 그 정도 값어치를 가진 보석이 아니지. 하면 왜 드록 왕자는 이 보석을 유파시드에게 진상하려 했을까?”

하지만 르베나는 바로 보석을 사지 않고 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가 이제는 흥미가 다 떨어졌다는 듯 손이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걸 내가 어찌 안다 말이요!! 사이렌에다 금이라도 처발라서 주려고 했나 보지 뭐. 아, 귀찮으니 사든지 말든지 얼른 결정하고 나가시오!”

“비슷해.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그 진상되려던 사이렌에 마법이 깃들어 있더군. 그것도 저주… 의 마력이 말이야.”

하지만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흠칫 놀란 광부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르베나가 말을 이었다.

“유파시드에게 저주의 마력이 담긴 사이렌을 건네려 한 왕자라… 이게 밝혀지면 드록 왕자는 뭐라고 할까?”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시오? 난 사이렌을 판 일밖에 없소. 마력이니 저주니 그딴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란 말이오! 그리고 그쪽이 베이라도 아닌데 마석을 어떻게 구별한단 말이오?”

말을 하며 그녀를 슬쩍 바라보는 광부의 눈을 보며 르베나의 눈이 짧게 빛났다.

“친분이 있는 베이라가 있어 마하렌으로 오던 도중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장담을 했지. 그는 우리가 원한다면 디오니스 왕궁으로 가 증언을 해 줄 수도 있다 했고…….”

말끝을 늘이는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순간 불안해졌다. 그리고 르베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다한 역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조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그저 못 보던 보석이기에 진상하려 했을 뿐입니다. 저주가 걸린 마석 따위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진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판매자나 중개자가 술수를 부린 듯합니다.”

순간 르베나의 말을 들은 광부가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그리고 이를 본 르베나가 작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드록 왕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은데.”

르베나의 말에 광부의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성의 없이 르베나를 쫓으려 했던 그였건만. 그가 휙, 고개를 돌리고서는 아까보다 더 크고 무섭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그딴 말에 넘어가 장부를 보여줄 것 같아? 장부는 광부의 생명이야! 까딱 내 장부 보여 줬다가 네 놈들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놈들이면? 내 고객 다 빼앗아 갈 텐데 그 꼴을 보라고?

절대 안 돼! 그리고 웬 계집이 깨 먹은 사이렌을 가지고 왜 나를 달달 볶아? 필요하면 저기서 사!! 마석이니 베이라니 그따위 건 모르니까!!”

“흥분하지 말고 장부를…….”

상대가 너무 흥분한 것 같자 이를 보다 못한 다한이 나서 말하려는 순간, 르베나가 선수를 쳤다.

“정 그렇다면 사이렌만 하나 사 가도록 하지. 어차피 저주 마법이 새겨졌단 베이라의 증언만 더해지면 이것도 진상할 일이 없긴 할 테지만.”

급작스러운 르베나의 태도 변화에 멍해진 다한이 그녀를 바라보자 르베나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광부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얼른 사이렌 한 개를 건네고는 다한에게 값을 받았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둘을 쫓아내 버렸다.

이윽고 둘이 가게를 벗어나자마자 광부는 보석상의 문을 걸어 닫고 ‘영업 끝’이란 팻말을 매달았다. 그 모습을 본 다한이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공주님, 보석은 구했지만 이렇게 되면 배후를…….”

다한의 말을 들었음에도 르베나는 보석상에서 조금 더 걸음을 옮긴 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는 이틀. 그 안에 베이라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

되묻는 다한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그 광부…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한 첫 마디를 기억하나?”

“그게…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말했다.

“우리가 그 광부의 보석상을 가기 전 지나쳤던 보석상이 모두 다섯 곳. 그 다섯 곳에서는 어떤 말을 들었지?”

자꾸만 다른 소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다한은 르베나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했다.

“얼른 들어와 보석을 사시라……!!”

무언가 깨달은 듯한 그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맞다. 이곳은 보석을 캐고 팔아 근근이 먹고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이곳에 어리고 부유해 보이는 레이디와 기사로 보이는 이가 발걸음을 했다. 당연히 광부나 보석상들은 그들을 잡아 물건을 팔고 싶을 거야.”

르베나는 마하렌으로 오기 전, 루에게 화려한 장식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하나 챙겨 올 것을 명했다.

평소 심플하고 슬림한 라인의 드레스를 좋아하는 르베나였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 공주님의 명이니 군말 없이 챙긴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르베나는 외진 마을에서 입기엔 다소 화려한 드레스를 꺼내 입고 다한 경과 함께 길을 나섰다.

“혹시 이 드레스도 그래서……?”

다한의 물음에 르베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평범한 광부나 보석상이라면 우리를 놓칠 리가 없지.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물건들을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우리를 피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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