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0화 (30/276)

30화

제1장 디오니스 (29)

“…그러니까 차질없이 준비하도록.”

“공주님, 정말 내일 떠나실 수 있겠습니까? 힘드시면 저희만 가겠습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다한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저었다.

“유파시드 덕분에 모두 낫는 것을 보지 않았나. 나는 괜찮다. 경도 얼른 가서 쉬고 내일 보도록 하지.”

르베나의 말에 망설이던 다한이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베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다한이 아무리 말린다고 한들 들을 르베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정을 연기하려 해도 무도회까지 시일이 촉박하니 이도 무리였다. 저의 기사단이 르베나를 잘 보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 그들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어디를 가십니까?”

루드바하의 물음에 르베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말했다.

“보석과 관련된 일로 내일 다한 경의 기사단과 북부마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순간 르베나의 말에 왜인지 루드바하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마나… 걸리시는지요.”

“아, 오가는 일정은 사흘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루드바하의 질문에 르베나가 답을 하고 난 후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점점 얼굴을 굳히니 모두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은 마음에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건 르베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도움도 받았고, 방금까지도 드록을 몰아붙인 그의 모습에 르베나 역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르베나의 말 한마디마다 얼굴을 굳히니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르베나가 대답을 할 때마다 언제나 잘 갈무리되어 있던 그의 신력이 요동치는 것도 보였다.

“혹시… 신력을 쓰신 것 때문에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

르베나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못한 듯해서.”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놀란 듯 움찔한 루드바하가 급히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성급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피곤하고… 어… 그런 것 같으니 저는 라웅을 데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고… 무도회 때 뵙도록 하죠.”

조금은 당황한 듯한 루드바하의 인사에 르베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유파시드께서도 평온한 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오늘 아한을 데리고 계셔주시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르베나의 붉은 눈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아한이 폭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와 진심 어린 감사였다.

그리고 그 순간.

휘잉-.

어디선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일행을 감싸왔다.

“이건……?”

익숙한 느낌에 다한이 혹시나 싶은 얼굴로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르베나한테 멍하니 시선이 박혀 있던 루드바하가 화들짝 놀라더니 급히 뒤를 돌아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루드바하를 바라보던 라웅이 빠르게 르베나 일행에게 인사를 하더니 루드바하를 쫓아갔다.

다한과 르베나는 둘이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다 하며 내일의 일정 얘기를 더 나누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다한의 품에 안긴 아한의 녹안은 점점 멀어져 가는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깨끗한 색의 신력이 한 사람을 향해서만 시도 때도 없이 요동치면… 그건 뭐였더라?’

아한은 왠지 이 질문의 답을 내고 싶지 않아졌다.

* * *

“정말… 가실 거예요?”

사나의 울먹임에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보리색의 드레스에 혹시 모를 추위에 대비해 두른 짙은 버건디의 긴 후드가 이 순간에도 꽤 귀찮았다.

그럼에도 챙이 긴 모자를 챙겨 준 사나에게 말을 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돌려준 대신 받은 것이기에 일단은 둘렀는데 사나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이것마저 벗기는 그른 듯했다.

“벌써 열 번도 넘게 묻고 답했잖아, 사나.”

어제 저녁 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한 후벤과 가스트의 극성을 겨우 달래어 모두 돌려보내고 르베나는 피곤한 몸으로 늦게 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들 오늘의 일정을 취소하라 난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마하렌으로 가기 위해 일찍 잠에서 깬 르베나는 그때부터 제1기사단과 만나 출발 직전인 지금까지도 사나의 만류에 또 한 번 애를 먹고 있었다.

‘하… 그냥 칼같이 거절해도 되건만…….’

오히려 이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 문제였다. 이들 모두를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니 이들에게 어째 더 휘둘리는 기분이다.

게다가 옆에 나와 있는 후벤과 가스트 역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사나를 말리기는커녕 입들이 삐죽 나와 있었다.

평균 연령만 제 두 배가 훌쩍 넘는 이들이 아니었던가.

톡.

순간 느껴지는 움직임에 아래를 보니 아한이 작은 손으로 르베나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하… 이젠 아한까지…….’

“휴-.”

한숨을 내쉰 르베나가 아한과 사나, 후벤과 가스트를 한 번씩 보고는 말했다. 대신 이번만큼은 어조를 조금 더 분명하고 강하게 했다.

“이미 얘기가 끝난 일이고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그러니까 모두 그만해. 아니면 그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이전보다 훨씬 강한 르베나의 말에 모두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곧 기가 죽은 사나가 말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실 거죠?”

눈치를 보는 사나의 모습에 르베나가 한숨을 돌리며 답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러자 후벤과 가스트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싶으시면 무조건 저 녀석들에게 맡기시고 텔레포트 하십시오.”

“마력의 감지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유파시드 눈치 보느라 위험을 무릅쓰지 마세요.”

정말 유별나다 못해 지나치기까지 한 그들의 염려에 얼핏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사실 모두의 말에 르베나의 가슴은 따뜻하게 저려 왔다.

그렇게 모두를 한 번씩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아한을 한번 꼭 안아 준 르베나가 뒤에 시립한 제1기사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발… 하지!”

르베나를 위시한 열두 명의 사람들이 마하렌을 향한 짧은 여정을 시작했다.

“끼영차!”

작은 손이 야무지게 물통을 쥐었다. 그 손을 따라 물통을 기울이니 차갑고 깨끗한 물이 작은 통을 가득 메웠다.

“공주님, 세안하세요.”

시녀 루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물이 가득 담긴 통을 향했다.

“루, 물을 길어 온 건가? 위험하니 혼자서는 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칫 엄하게 말하는 르베나의 말에도 루는 그저 웃으며 답했다.

“가까운 곳에 개울이 있어서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어요! 그럼 전 가서 기사님들과 식사 준비를 할 테니 세안하고 나오세요, 공주님!”

“하아…….”

르베나가 제법 무섭게 말해도 생글생글 웃으며 겁먹는 법이 없는 루의 작은 몸이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예전 드록의 손에 잡혀 덜덜 떨던 시녀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어이없음과는 다르게 루가 길어 온 물을 보는 르베나의 얼굴엔 피식 웃음이 어렸다.

“왜 사나가 루를 보냈는지 알겠어.”

물이 아직은 좀 차게 느껴지는 이른 봄이었지만 르베나는 불평 없이 물로 얼굴을 헹궜다. 원래 이번 여정에는 시녀장인 사나가 와야 했지만, 이즈음 사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 기억한 르베나는 사나의 동행을 갖은 핑계를 대고 거부했다.

동행을 거절당한 사나는 그녀를 대신할 시녀 다섯 명의 동행을 요구했지만, 르베나는 속도가 느려진다는 이유로 이 또한 거절했다.

사실 르베나의 행렬에 시녀는 필요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방해만 될 뿐이었다. 르베나는 혼자서도 제 몸을 챙길 줄 알았고 제1기사단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끈질긴 사나 때문에 이들은 극적으로 시녀 한 명 합류로 합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뽑혀 온 일행이 루였다.

사실 합의하지 않으면 사나가 무슨 수를 써서든 동행할 기세라 르베나가 한발 물러난 것이었다.

그렇게 합류한 루는 르베나에 대한 열렬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를 보필했다. 르베나가 위험하다 뭐하다 아무리 충고를 하고 은연중에 무섭게 굴어보아도 루는 살뜰히 르베나를 챙기며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그런 루를 기사단도 모두 좋아했다.

“공주님,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르베나가 준비랄 것도 없이 간단한 차림으로 막사에서 나오자 아침을 준비 중이던 분주한 기사들이 인사를 해 왔다. 여행에 맞게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원단으로 편안하게 흘러내리는 보라색 드레스에 실크로 만든 진줏빛 허리띠를 두른 르베나의 옷은 꽤 편안해 보였다.

다한 역시 르베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공주님, 밤새 불편한 곳은 없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다한의 말이 뭘 뜻하는지 아는 르베나가 고개를 저었다.

마하렌은 워낙 작은 마을이었고 마을로 가는 길에는 여관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기사단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를 통해 첫째 날은 오는 길에 있던 작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지만, 어제는 이 근처에 있다는 여관이 며칠 사이 주인도 없는 폐가가 된 채 이들을 맞이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혹시나 하고 챙겨온 막사를 급히 쳐 르베나의 공간으로 내어 주고 밤새 교대로 막사 주위를 지키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편히 잤으나 그대들이 편치 않았을 것 같군.”

다소 피곤해 보이는 기사들을 보며 르베나가 말하자 기사들이 하하 웃으며 다들 괜찮다 대답했다.

항상 같이 훈련하는 사이임에도 이 순간 그들을 대하는 르베나는 같은 기사가 아니라 그들의 상전이었기에 말투도 조금 딱딱해졌다. 하지만 이를 껄끄러워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내 기사들의 상태를 확인한 르베나가 자리에 앉자 루가 곧장 따뜻하게 데운 수프를 가져왔다.

“우리 공주님은 어떻게 저렇게 배려가 깊지?”

“봤지? 우리 잠자리부터 묻는 거?”

“공주님의 기사라 정말 행복한 아침이다. 하아…….”

모두 르베나에게는 들리지 않게 소곤대며 하는 말이었지만 이미 뛰어난 베이라인 르베나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모두 들렸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피식 웃은 르베나가 천천히 수프를 뜨기 시작했다.

이제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마하렌이다. 그리고 보석을 구해 무도회를 다녀오면 이 일도 모두 끝이 난다. 조금의 웃음기가 어렸던 르베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바삐 오가는 기사 하나, 하나 그리고 루에게 한동안 머물렀다.

어느새 르베나의 눈에는 웃음기 대신 아련한 무엇인가가 자리했다.

이제 곧, 이별이었다.

* * *

“기별이 왔다고?”

약간은 고양된 듯한 목소리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짓으로 나가보라는 명을 내린 그녀, 세나르의 눈이 제 앞에 씩씩대며 앉아 있는 드록을 향했다.

“그리 분했느냐?”

세나르의 질문에 이틀 전의 르베나를 떠올린 드록이 으득 제 턱에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구보다 잘 보이고 싶었던 유파시드 앞에서 그딴 계집의 일격에 패배를 인정하던 꼴이라니, 두고두고 이불을 걷어찰 일이었다. 게다가 그 미소…….

“어머니, 그 계집이 보석을 구해오면 어쩌죠? 그딴 계집, 유파시드가 있든 없든 이젠 꼴도 보기 싫다고요!”

어쩐지 평소보다 더 분에 찬 드록의 말에 여유롭게 차를 들이켠 세나르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드록, 우리 왕자님. 그렇게 성나게 굴지 말거라. 왕궁엔 보는 눈이 많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세나르의 짐짓 여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드록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칭얼거리는 순간에도 환한 금발과 호박색의 눈을 가진 그의 모습은 꽤 봐줄 만했다.

“어머니. 그러지 말고 그 계집 좀 치워 주세요. 진짜 이러다가는 제가 그 계집을 죽여 버릴 것 같다고요!”

도를 넘은 드록의 말에 세나르가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고 했지 않느냐! 어떤 상황에도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안 돼!”

세나르의 엄포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쿠키를 씹는 드록을 보며 그녀가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고는 상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드록,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단다. 우리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말이야. 가령 기사단을 이끌고 작은 마을로 향하던 공주가…….”

세나르의 말에 어느새 먹던 쿠키를 내려 놓은 드록을 향해 씨익 웃은 세나르가 말을 이었다.

“사고로 그만 죽고 말게 된… 슬프고 가엾은… 그런 일들 말이다.”

말을 끝낸 세나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쏙 빼닮은 드록의 얼굴에도 벅찬 희열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세나르는 이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찻잔의 온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