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제1장 디오니스 (28)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에 멋대로 힘이 반응해 날뛰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강하게 일대를 쓸어왔다. 르베나의 미소에 빠져있던 외궁의 모두가 그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람의 근원, 그 바로 옆에 있던 라웅은 놀란 눈으로 루드바하를 바라봤다.
“폐하……? 이 인간이… 오늘 왜 이래?”
오랜시간을 함께하면서도 루드바하가 이렇게 하루 동안 두 번이나 세츠의 힘을 의지와 상관없이 방출한 적은 단연코 없었다.
“게다가… 얼굴 왜 저러냐?”
라웅의 물음에 아한이 고개를 돌려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푸른 눈은 언제나처럼 르베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약간의 홍조가 어려 있었다.
조금씩 동요하던 그의 신력이 아한의 눈에도 선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금방이라도 미쳐 버리겠다는 듯 요동치며 르베나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모습을.
흠칫.
갑자기 쇄도하는 기운에 놀란 르베나가 드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신력이 르베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놀라 그 힘을 피하려던 르베나의 시선이 그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발이 저절로 멈추었다.
‘저자가 왜……?’
왠지 넋이 좀 나간 듯 보이는 그, 루드바하가 자신의 후원에 있었다. 게다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전에 없이 심하게 동요한 듯 요동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저 신력들처럼. 그리고 그 잠시의 시간 동안 르베나의 몸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감싼 루드바하의 신력들은 그녀의 상처들을 빠르게 치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르베나의 몸을 감싸자 모든 상처가 순식간에 말끔히 나았다.
뿐만 아니라 땀과 피에 젖어 있던 머리카락도 살랑거리며 바람에 나부꼈다.
방금까지 출혈로 인해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에 가까운 기적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유, 유파시드……!!”
벌벌 떨며 내뱉은 이아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제 몸을 살피던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를 향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루드바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며 발걸음을 옮겨 드록과 르베나의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가장 놀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드록이었다. 어느새 제 앞에 선 루드바하의 시린 얼굴을 보며 드록은 놀라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록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눈은 르베나만을 향했다. 제 눈앞의 르베나를 본 그의 눈에 일순 안심하는 빛이 어렸다.
다행히도 피가 모두 멈추고 상처가 아문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옷 곳곳 찢기고 베인 천 사이로 붉게 물든 자국을 보자 그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드록… 왕자님.”
저를 부르는 루드바하의 목소리에 드록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네, 네……!!”
“괜찮으시다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듣고 싶군요.”
더없이 정중하게 물어오는 그의 물음, 언제나와 같은 옅은 그의 미소,
하지만 드록은 전에 없이 드리워진 한기가 제 몸을 덮치고 있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가에 드리운 옅은 미소와는 달리 싸늘하게 얼어붙은 그의 짙은 푸른 눈이 드록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유파시드의 등장으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다한은 조금 안심이 된 마음으로 구경하던 시종 시녀들을 모두 물렸고 사나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의 상태로 외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느새 후원에는 여덟 명의 사람들만 남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르베나와 그 옆을 꼭 붙어 지키는 다한. 그리고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드록과 그의 호위. 입을 앙다물고 있는 이아린. 마지막으로 루드바하와 그의 호위 라웅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아한.
르베나에게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며 본인의 겉옷을 덮어 준 루드바하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정리되고 떠나갈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돌지 않았다.
드록은 연신 루드바하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고, 다한은 드록의 기사와 드록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한 역시 라웅의 품에 안긴 채로 부은 눈에 있는 힘껏 잔뜩 힘을 주며 드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드바하는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신호가 모두의 본능을 울리고 있었다.
“공주님.”
다한의 부름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외궁의 입구에 쏠렸다. 깨끗한 블랙의 심플한 시폰 드레스를 입은 르베나가 나온 것이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자 루드바하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르베나가 오기 무섭게 그가 의자를 빼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이를 본 드록과 이아린의 눈은 경악으로 치켜떠졌다.
보통 남성이 본인보다 신분이 높은 레이디에게 에스코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본인보다 신분이 낮은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경우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연인일 때.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운 드록과 이아린의 시선이 얽혀 갔다. 혼란스럽기는 의자를 뺄 준비를 하다 허공에 손만 덩그러니 남은 다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르베나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전 디오니스의 왕이었고 누군가 그녀의 의자를 누군가 빼주는 일이 당연했기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모두의 눈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어렸다.
하지만 순간의 분위기에 르베나조차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문제라도……?”
르베나의 물음에 누구보다 빨리 루드바하가 답했다.
“문제는요. 그보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루드바하의 질문은 르베나를 향하는데 어째서 드록의 몸에 한기가 드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르베나의 감사 인사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가 드록에게 말했다.
“제가 관여할 일이 맞는지 아닌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디오니스는 남이 아니고 저희 젠과 깊은 인연으로 묶일지도 모르는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판단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시사하는 말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는 지금 젠이 제국으로 격상할 경우 디오니스가 속국이 될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한 드록이라도 지금의 상황이 본인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이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파시드 님. 왕자님께서는 친목 도모를 위해 공주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일전의 일로 속상함을 말씀드렸더니 왕자님께서 낯을 많이 가리는 공주님과 함께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셔서요.”
이 자리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이아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이어 갔다.
“그런데 공주님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우셔서 잠시의 말다툼 중 저 꼬마가 왕자님께 마력이 담긴 인형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왕자님께서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지만, 마력이 담긴 인형이라니… 이는 자칫 반역이지요.”
이아린은 목이 탔는지 어느새 준비된 차로 입 안을 한 모금 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가스트 님의 손자이자 공주님의 손님인 꼬마를 왕족 시해죄로 사형에 처하고 싶지는 않아 하셨어요. 그래서 마침 검술 연습을 하던 공주님께 대련을 하자고 한 거고요.”
“세상에 어떤 대련이 상대방을 묶어 놓고 시작합니까?”
다한의 싸늘한 말에 이아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가는 곧 루드바하를 보며 다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녀의 미소는 방금까지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던 영애처럼 천진했다.
“그쯤은 왕족의 작은 앙갚음이라 생각해 주세요. 드록 왕자님이 아무리 자비로워도 이분은 뼛속까지 왕족이세요. 누구와는 달리 말이죠. 그런 왕족이 시해를 당할 뻔한 일을 대련만으로 용서하시는데 묶어 놓은 밧줄을 자르고 시작하는 것쯤이야.”
사실 이아린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족 시해는 즉결처분에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죄다. 대련을 통해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얼핏 보기에 결과와 상관없이 대단한 왕족의 배려가 맞았다. 또한 밧줄이 아니라 쇠사슬로 묶어 놨다 하더라도 왕족은 그래도 되는 곳이 바로 이 세계였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 역시 왕족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는 엄연히 왕위계승권을 가지신 디오니스의 공주이십니다. 그런 공주님을 나무에 묶어 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칼로 수십 번 그으시다니요! 이는 단순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왕족끼리는 시해가 성립되지도 않습니다!”
다한의 말에 이번에는 드록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의 말대로 왕족 시해가 인정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혈연이었다. 혈연 사이에는 놀다가 다칠 수도 있는 일인데 일일이 시해 혐의가 붙으면 곤란하기도 하고, 혈연 간에도 왕위 다툼을 위해 온갖 수가 난무하는 이곳에서 혈연 사이 시해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아한의 죄를 르베나가 대신 책임져야 하기로 했다면 다한의 말처럼 같은 혈연이기 때문에 애초에 죄를 묻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공주님은… 왕가의 일원이 아니시잖아요.”
순간 이아린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한기가 스쳐 갔다. 르베나의 태생. 외궁에서는 금기와 같은 말을 이아린이 꺼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루드바하의 눈이 곧바로 르베나를 향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르베나에게서는 아무런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수없이 겪어, 이제 출생의 문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생채기도 남기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생채기가 날 수도 없게 딱딱한 상처가 났거나…….
루드바하의 진득한 시선을 느꼈지만 르베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평이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왕자님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은 저였고, 그로 인한 말로 왕자님을 탓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왕자님 역시 깔끔하게 약속을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르베나의 눈을 바라보는 드록의 눈이 떨려왔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패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저 눈.
하지만 그럼에도 드록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딴 계집애에게는 더욱.
그렇게 드록이 르베나를 보기만 할 뿐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루드바하의 싸늘한 눈이 드록을 향했다.
찌릿찌릿.
드록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운에 다시 몸을 떨었다. 제 온몸을 찔러오는 짜릿함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곧 저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살기에 가까웠다. 점점 더 떨리는 손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그 순간 기운은 더 거세어졌다.
“…윽.”
갑작스럽게 부들부들 동공을 떠는 드록을 보며 르베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디오니스의 성을 걸고 한 약조이십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도 드록은 대답이 없었다. 르베나는 이대로 드록이 또 말을 무를까 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르베나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루드바하의 살기가 드록을 향하고 있어 지금 드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신력을 쓰지 않고 날린 드록에게만 향한 살기는 당사자를 제외한 누구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 모를 불쾌함에 르베나가 다시 입을 열 찰나, 드록을 감싸던 모든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루드바하가 여느 때처럼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드록에게 말했다.
“당연히 패배를 인정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옅은 미소로 물어오는 루드바하의 물음에 이제는 거의 사색이 된 드록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드록의 눈에는 어느새 본능적인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런 드록만 보이도록 더없이 시린 눈빛을 한 루드바하가 다시 말했다.
“그 렇 지 요?”
루드바하의 말에 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드록을 본 루드바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더없이 만족스럽고 더없이 시린 미소가.
* * *
“감사했습니다.”
드록과 이아린 무리가 패배자의 꼴로 돌아가고 난 후, 르베나가 루드바하에게 감사의 의미를 전했다. 그 덕분에 마력을 쓰지 않고도 상처가 회복되었고 드록 역시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해야 할 루드바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폐하? 공주님이 감사하다잖아.”
보다 못한 라웅이 루드바하를 툭툭 치며 말하자 그제야 루드바하가 상념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답지 않은 반응에 르베나가 가만히 그를 살피다가는 그러려니 하며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아한과 다한에게 할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리고 아한과 다한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르베나의 옆모습에는 어느새 루드바하의 짙은 시선이 진득이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