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8화 (28/276)

28화

제1장 디오니스 (27)

‘하필 지금……!’

르베나의 눈이 침통한 표정으로 젖어 제 앞에 서 있는 다한에게로 향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밧줄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하필이면 다한이 오다니.

르베나는 본인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더욱 당당하고 곧은 모습만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건 왕으로 군림한 르베나의 자존심이었다.

근데 이 순간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로 물든 다한 경을 보자 르베나는 왜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건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고통은 이 방법을 택한 르베나의 몫이지 다한과 사나가 짊어져야 할 몫이 아닌데, 왜 그들이 자신보다 괴로워하는 것인지 르베나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앞의 다한이 자꾸 마음에 걸려 르베나는 그를 향해 무거운 마음을 뱉어내듯 입을 열었다.

“다한 경, 나를 믿어라.”

순간 깊은 분노에 잠식되어 가던 다한의 귓전을 두드리는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 곳곳이 붉은 선혈의 꽃을 피운 르베나의 눈이 그곳에서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다한은 그 순간 자신 안의 어두운 덩어리가 서서히 녹아 가는 것을 느꼈다.

지난 7년의 시간 동안 다한은 알게 되었다. 르베나는 결코 쉽게 꺾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역경에 쉽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믿으라고 하는 르베나의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닐 것이란 것 역시 그는 알았다. 그래서였다.

꾸욱.

주체 못 할 분노로 인해 너무 힘을 준 탓에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의 고통에도 다한의 눈은 르베나를 묶은 밧줄로 향했다. 그리고 이를 본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르베나의 뜻을 알아들은 다한은 턱에 한번 힘을 주고는 뒤로 물러섰다.

“한시도 떼지 않고 지켜보겠습니다.”

다한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르베나를 향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 그어오는 드록의 칼날에 르베나가 몸의 방향을 슬쩍 틀었다.

툭……!

밧줄에 묶여 있던 부위를 통해 작은 진동이 전해지자 르베나의 붉은 눈에 이채가 어렸다.

‘됐다!!’

곧 르베나가 제 눈앞에 서 있는 드록을 바라보았다. 순간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붉은 눈이 드록을 향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 색조보다 뜨겁던 눈은 순식간에 깊은 빙하의 차가움으로 변하며 성큼 그, 드록을 향해 다가왔다.

* * *

“헉!! 저게 뭐야? 저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라웅의 놀란 눈과 루드바하의 시린 벽안이 어느새 외궁의 후원에 닿았다.

조금 전, 느닷없이 제 방에 들어선 베이라 꼬마는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끅끅 흘렸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제 손을 잡아 끄는 모습에 루드바하가 살포시 눈을 찡그렸다.

‘마력이… 동요하고 있군.’

가스트란 자의 마법 때문인지 제법 표나지 않게 갈무리되어 있던 꼬마 베이라의 마력이 스멀스멀 아이의 감정에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 슬픔, 무력함,

아한의 마력이 흘끗흘끗 보여주는 동요의 빛을 읽은 루드바하가 순간 흠칫 몸을 굳혔다.

그동안 지켜본 아한은 아이라고는 믿기지 못할 만큼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소소하게 짓는 미소조차도 아주 보기 드물었고 분노와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조차 잘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 아이가 유일하게 감정을 내비친 일이 있었다. 순간 루드바하의 머릿속에 그게 무엇이었는지 떠오른 것이다.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루드바하가 아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외궁의 일인가?”

그리고 루드바하의 물음에 슬금슬금 나오던 아한의 마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연한 슬픔을 가지고. 그보다 큰 분노를 담아.

동시에 아한의 마력을 확인한 루드바하 역시 발밑이 푹 꺼지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뭔가 함정에 빠진 느낌 같으면서도 생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함이란 것 같기도 했다.

곧바로 유안에게 사무적인 일을 모두 맡긴 루드바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한숨을 쉬는 유안의 소리가 선명하게 제 귓가에 들려왔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루드바하는 라웅과 함께 아한을 데리고 외궁으로 향했다.

‘단지 눈에 계속 알짱거리는 저 어린 베이라의 흐름이 매우 불안해서 그렇다.

그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계속 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어서. 그냥 그뿐인 거다.’

루드바하는 지금 제가 서두르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젠의 왕이었고 곧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며 모든 세츠들의 중심인 유파시드였다. 어린 베이라가 폭주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막으러 가는 것은 그의 책무이자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확인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제가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하지만.

“저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아니 저런 놈이 어떻게 왕위 후계자가 될 수 있지?”

생각없이 루드바하를 따라 왔건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린 아한의 앞을 막아서는 라웅의 눈에 아주 선명한 미친놈이 보였다.

르베나 공주를 나무에 묶은 채 그녀의 흰 셔츠가 온통 붉게 물들도록 검을 휘두르는 세기의 미친 왕자가 극본과 주연, 연출까지 도맡은 장면을 말이다.

“와… 디오니스엔 진짜 미친놈들이 많은가 보다……. 와, 너무 무서워. 저 정도면 뭐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것보다 왜 주위 사람들이 말리지 못하는 거지?”

언제나 천진난만한 라웅조차 이 순간 눈앞의 장면에 치를 떨었다. 디오니스가 젠과 다른 분위기라는 것은 알았지만 왕자가 공주를 묶어 놓고 칼부림이라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잔인한 광경을 확인한 그는 얼른 아한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계속 미친 왕자, 미친 디오니스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라웅이지만 그건 기사들과 순수한 대련 혹은 시장에서 상인들간의 가벼운 다툼이었다. 지금 이건 그런 것들과 궤를 달리했다.

그렇게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과 경악에 물들어 있던 라웅의 몸이 움찔 떨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떨리오는 제 몸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세상에 젠의 총 기사단장인 그의 몸을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떨리게 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폐, 폐하……!!”

찌릿찌릿.

언제나 잘 갈무리되어있던 루드바하의 신력이 지금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루드바하의 통제를 벗어난 신력들이 날카로운 예기를 띠고 서서히 주변을 찔러오고 있었다. 이에 주변의 녹색 나뭇잎들이 자잘하게 제 몸을 떨었고 거대한 라웅의 몸조차 본능적인 두려움과 살의에 짓눌렸다.

찌릿찌릿. 찌릿찌릿

순간 좀 더 강하게 요동치는 루드바하의 신력을 느낀 라웅이 제 품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한의 떨림을 보았다. 라웅이 급히 아한을 제 큰 몸으로 빈틈없이 감싸고는 소리쳤다.

“폐하! 여기 어린 베이라가 있잖아! 정신 차려!! 아이가 고통스러워하잖아!”

그제야 라웅의 고함소리가 루드바하의 귀에 의미 있는 소리로 자각되기 시작한 걸까. 그의 푸른 눈이 움찔 떨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아한을 향한 것이다.

“아…….”

순간 루드바하가 놀라 빠르게 자신의 신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아한에게 다가가 제 손을 뻗었다. 다행히 아한은 놀라기만 한 것인지 루드바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는 조심히 신력을 흘려 아한의 몸이 괜찮은지 확인했다.

그 순간,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외궁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꺄아악!”

“왕자님!!”

“드록 왕자님!”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던지고 벌떡 일어난 이아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드록의 시종과 기사들. 그리고 어딘가 희열에 차 있는 외궁의 사람들.

그들 모두의 비명 소리가 외궁에 가득 울려 퍼진 것이다.

르베나는 드록이 이 말 같지도 않은 대결을 제안할 때부터 방법을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눈쌀이 찌푸려지기는 하겠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그건 드록의 칼날이 마구잡이로 자신을 향할 때마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 밧줄을 칼날에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아무리 드록이 안하무인이라도 르베나의 얼굴이나 손같이 보이기 쉬운 부위는 피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제 몸을 구속하던 한 줄기의 밧줄이 잘린 순간, 르베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발치에 떨어져 있던 검을 확인한 르베나는 발로 차서 그것을 들어 올린 다음 허공에 뜬 은빛의 검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이에 놀란 드록이 다시 검을 휘두를 새도 없이 르베나의 팔은 길게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쇄도한 르베나의 검 끝은 눈 깜짝할 새, 드록의 목젖에 와 닿았다.

일련의 행동은 빨랐고, 검을 겨누는 르베나의 모습과 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황한 드록의 눈이 고저 없이 저를 향하는 붉은 눈에 속절없이 박혀 들었고 외궁에 존재하는 모두의 희비가 이 순간 극렬하게 엇갈렸다.

찌릿.

순간의 짜릿한 전율이 다한의 몸을 타고 흐른 순간. 다한은 떨리는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짙고 풍성한 검은 머리는 땀과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은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유독 창백해 보였다. 늘씬하고 탄탄한 몸의 곳곳에는 붉은 선혈의 꽃이 드리웠다.

모든 것이 같았다. 7년 전 그때와. 하지만 눈앞의 소녀만은 그때와 달랐다.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는 눈빛과 굴복하지 않는 손짓만은 그때와 같았지만, 육체의 한계를 넘기지 못해 정신을 놓아 버렸던 그때의 소녀는 여기 없었다.

열일곱 살이 된 소녀는 이제 당당하게 제 손과 발로 무기를 쥐었다. 그리고 같은 기사조차 전율이 일 정도의 깨끗한 자세로 은빛의 검을 상대에게 겨누었다.

그녀가 검을 들어 드록에게 겨누는 그 찰나의 모습은 마치 어느 유명한 무희의 춤사위처럼 우아했으며 전장의 이름난 용병처럼 거침없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조차 그녀의 검 끝엔 분노와 수치 같은 일말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때의 연약했던 소녀는 이제 여기에 없었다.

다한에게 믿으라 말하던 르베나는 자신의 칼끝을 깨끗하게 드록의 목에 겨눈 것이다.

그리고 르베나는 웃었다. 눈이 휘어지도록 웃는 그녀의 미소에, 그 매혹적인 미소에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어느새 따뜻해진 봄바람조차 그녀의 웃음을 탐내는 듯 주위를 감싸 안았다.

“뭐… 무슨…….”

칼 끝에 목이 닿은 자신조차 찰나에 일어난 일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딱 그만큼 빨랐다. 하지만 목 끝에 닿아있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은 지금이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

순간 보인 르베나의 미소에 드록 조차 숨이 멎어 버렸다.

피와 땀에 절어있는 검은 머릿결. 유독 창백하게 질려 있는 하얀 얼굴.

몸 곳곳에 피어있는 선혈은 분명 모두 드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찔하리만큼 매혹적인 르베나의 미소는, 그것은.

오직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으득.

드록의 놀란 눈에 분노와 수치심이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드록의 눈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해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력의 힘 없이. 베이라로서의 르베나가 아닌 그녀만의 힘으로.

제 앞에 드리어진 드록에게 칼날의 끝을 갖다 대었다. 순간 말할 수 없는 전율이 르베나의 몸을 관통했다.

언제나 마력에 의지하던 르베나에겐 마력이 삶의 전부였다. 마력만이 르베나의 적을 벨 수 있었고 베이라인 그녀였기에 모두의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지금 처음으로 다른 길을 보았다. 베이라가 아닌, 타고난 힘이 아닌, 오직 노력과 훈련만으로 스스로 갖게 된 힘.

르베나는 그 힘으로 제 앞을 가로막은 드록을 겨누었다. 그 환희에, 그 전율에 르베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아마 베이라가 아닌 너도 꽤… 괜찮은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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