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제1장 디오니스 (26)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아한은 어느 시점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아한이 아주 어린 어느 날, 저택 사람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도련님 너무 천진난만하지 않아? 귀여우셔.”
한 시녀의 말을 들은 아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우연히 목이 말라 들린 주방에서 들려온 시녀들 대화는 무방비했다. 어린 도련님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부모가 없는 아한은 유독 시녀 시종들을 잘 따랐고 그들은 어린 아한을 귀여워했다.
아한 역시 이를 잘 알았기에 들려온 한 시녀의 칭찬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저를 향한 애정에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뒤따라 들려온 말에 아한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응, 귀엽지 도련님… 그런데 나는 좀 그래……. 큰 도련님 내외분이 신마전쟁에 참가한 거… 모두 아한 님을 위해서잖아. 작은 도련님마저 베이라로 키우긴 싫으시니까 공적을 세우고 이곳을 떠나시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시고.”
아한은 조용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스트 님은 작은 도련님 돌보겠다고 디오니스의 마법 학교 교장 자리도 박차고 나오셨어. 그 덕에 디오니스는 베이라들의 마법 학교이 아예 없어지고… 근데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나는 좀… 꼴 보기 싫어.”
“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해!! 물론 우리 모두 돌아가신 도련님 내외분을 너무 좋아하긴 했지만 작은 도련님은 그분들의 아이잖아. 나도 가끔 너무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면 좀 철이 없다 싶긴 한데 어쩌겠어. 아직 어리시니 그러려니 해야지.”
그들이 자리를 뜬 이후에도 아한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엄마가 있다면 그런 느낌일까 하였다. 아한이 싫다던 그 시녀는 언제나 아한에게 웃어 주었고 언제나 자기 전 아한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아한이 저택에서 가장 많이 따르던 시녀가 그녀였고 아한 역시 그녀가 본인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준다 여겼다.
“…….”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아한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마음 아팠다. 무엇보다 아한은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왜 아한을 위해 죽었다는 건지, 푸근한 미소만 짓는 할아버지가 무엇을 포기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 아한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아한이 정말 무서웠던 것은 그 시녀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아한에게 친절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아한을 챙기며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아한은 그녀들이 무서워졌다. 뒤에서는 아한을 헐뜯고 앞에서는 친절한 그녀들이.
그리고 그와 함께 다른 시종 시녀들도 무서워졌다.
아한에게 미소 짓는 그들이 뒤에서는 아한을 욕하고 조롱할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아한은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더 맛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아한이 제일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말이 서서히 아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해맑던 아한은 점차 미소를 잃어 갔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년 후, 아한은 사람들을 경계하고 말을 아예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변한 아한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가스트는 몇 명의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의원은 아한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결국 아한을 마력으로 훑어보던 유일한 혈육 가스트는 어쩐 일인지 아한을 다그치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그저 꼬옥 안아 주며 다 괜찮다고 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넓고 따뜻한 할아버지의 품에서 아한은 잠시나마 평온했다. 그 품에 있을 때는 아한을 바라보는 시종 시녀들의 눈빛에서 해방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허전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아한은 그 허전함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언제부턴가 생겨난 공백은 어린 아한을 메마르게 했다.
아한은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고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 온 외궁, 그곳에서 처음 검은 머리의 공주님을 본 순간 아한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언제나 비어 있던 마음 한구석이 공주님이라 불린 그 사람의 붉은 눈을 보자 따뜻하게 차올랐던 것이다.
이유는 몰랐다.
아한은 그냥 그 붉은 눈이 좋았다. 그리고 르베나가 좋았다. 적어도 르베나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아한이 처음 르베나를 본 그날, 르베나는 회의에서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했다. 어린 아한의 눈에 보기에도 대단할 만큼 쉽게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른들은 모두 마음속에 있는 것과 다른 말을 잘도 하는데 르베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르베나의 모습에서 아한은 도리어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르베나와 함께하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아한은 가끔 기분이 좋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르베나도 아한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르베나는 귀찮으면 왕이 불러도 귀찮다고 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관심과 따뜻한 품에서 아한은 가스트에게서도 채울 수 없던 어떤 것들이 채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한은 그렇게 더디지만 조금씩 감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르베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저 얼굴만 멀쩡한 남자에게.
어렸지만 아한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르베나가 얼마나 대단한 베이라인지.
아한은 부모에 비해 큰 마력을 타고 나지도 마법 실력이 훌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의 힘을 기민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한의 이 능력은 가스트나 르베나보다도 뛰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아한이 세상에서 제일 큰 마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가스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마력을 가진 르베나를 본 것이다.
아한은 르베나의 마력을 처음 느낀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르베나야말로 베이라들의 왕이 될 사람이라고.
그리고 지금, 르베나는 그 마력을 쓸 수 없었다.
유파시드.
이곳에 그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르베나를 짙은 푸른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그.
그럴 때면 기민한 아한의 눈에 작게 요동치는 그의 신력들이 보였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르베나를 담으며 작게 요동치는 그의 신력 따위는. 신력이나 마력이 요동치는 것은 감정의 동요. 르베나를 어떤 감정으로 보는지 알 수가 없어 그가 참 마음에 안 들었는데.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던 아한이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붉은 선혈에 물들어가는 르베나를 한번 눈에 꼬옥 담은 아이가 작은 발을 움직여 뛰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힘을 제약하는 그, 유파시드를 찾아서.
* * *
“하아… 심심해.”
옆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 거의 응하지 않아 역시나 쌓인 티 파티와 파티 초대장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본 유안이 다시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전 심심하다고 말했던 그 인간을. 이에 루드바하가 씨익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 넣었다.
“네가 알아서 잘해 주니까.”
“거절을 말이지요.”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게을러터진 폐하라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유안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분명 쌓여있는 서류 뭉치 중 그의 의견이 필요한 사안들은 그의 머릿속에 있을 것이란 것을. 어쩌면 이미 결제까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유안 선에서 처리해도 되는 일들이겠지.
파티 초청장이야 당연히 그가 일일이 봐야 하는 일이 아니었고 말이다. 게을러터졌지만 능력만은 타고난 저의 상사 폐하가 참 거슬리는 순간이었다.
“폐하!!”
그리도 한 명 더. 예법의 예 자도 모르는 저 덜떨어진 놈이 차기 제국의 총기사단장이라니.
“라웅, 예의를 지켜라.”
못마땅함이 가득한 유안의 말에 라웅이 그를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폐하, 이것 봐! 누가 왔는지!”
도대체 언제 예의를 배울지 모르겠는 라웅의 말에 무심코 유안의 눈이 문가를 향했다.
그리고 루드바하 역시 유안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머리에 맑은 녹안.
계속 루드바하의 신경을 긁어 대던 꼬마 베이라, 아한이 라웅의 손을 잡고 루드바하의 방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거슬리던 아한의 녹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루드바하의 신경을 더 거슬리게 만들었다.
“이게 도대체…….
급히 시녀의 연락을 받고 달려 온 다한 경은 눈앞의 광경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의 온몸에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공주님이 드록 왕자에게 계속 베이고 있다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시녀의 말을 들은 다한은 무작정 이곳으로 달려왔다. 비록 영문은 몰랐지만, 현재 후벤은 가스트와 조사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다. 당연히 궁의 상황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다.
게다가 제1기사단장인 다한은 후벤의 뒤를 이은 유명한 공주 바보였다.
그리고 외궁의 후원으로 들어선 그의 눈에 흰 셔츠 여기저기가 잔뜩 베이고 붉게 물든 채로 나무에 묶여있는 공주님이 보였다. 곧 분노에 찬 그의 음성이 외궁 가득 들어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갑작스런 외침에 드록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오늘 후벤과 가스트가 외출한다는 걸 확인하고 왔으니.
“아, 제1기사단장 다한 경이 아니신가.”
사뭇 날씨 얘기를 하는 듯한 드록의 말투는 여상했다. 다한 경의 눈에는 그만큼의 분노로 핏발이 섰다.
“지금… 저희 공주님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분노로 떨리는 몸으로 겨우 다가온 다한의 눈이 급히 르베나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벌써 깊고 얇게 베인 곳만 수십 군데.
울컥. 다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고는 허리에 두른 검집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지금 그를 막으면 안 되는 그 단 사람의 목소리가.
다한이 떨리는 음성을 다잡으며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는 왕실의 레이디를 지켜야 하는 기사입니다. 그런 제게 공주님의 안위가 달린 일에 나서지 말라니요?!”
다한의 말에 드록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후벤 경이 담당하는 기사단이 이 마녀 계집의 추종자들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이제 보니 나설 데 못 나설 데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로군.”
말 같지도 않은 드록의 말에 다한이 큰 목소리로 싸늘하게 일갈했다.
“공주님께 그런 호칭은 삼가십시오!!”
르베나를 두둔하는 다한의 말에 이번에는 드록이 사납게 답했다.
“감히 일개 기사단장 따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지금 이년은 왕족 시해 죄를 저지른 꼬마를 대신해 나와 합의된 정당한 대결을 하는 중이다. 만약 이를 누가 방해한다면 대결을 취소하고 나는 그 꼬맹이를 정식으로 귀족회의에 상정하겠다. 이의가 있나?”
“이게 무슨… 왕족 시해죄라니……!”
당황해하는 다한에게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온 드록의 기사 하나가 예를 갖추며 일의 전말에 대해 전해 주었다.
제1기사단은 모든 기사들 중 최강의 실력인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그곳의 기사단장인 다한은 모든 기사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저에게 전해지는 기사의 말을 들을수록 다한의 얼굴은 참담함으로 물들어갔다.
왕족 시해… 심지어 어린 아한의 목숨이라니. 르베나를 따라 몇 번 본 아한을 기억하는 다한의 눈이 떨렸다.
또다시, 눈앞에 지켜야 할 대상을 두고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다니.
‘왜 공주님은 항상 신분 때문에 이렇게 억눌려야 하지. 누구보다 자격이 있으신 분인데! 왜!’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지난 몇 년간 쉼 없이 수련하셨다. 그런 공주님을 보며 덩달아 제1기사단 모두가 더욱 피땀 흘려 수련했다. 다시는 7년 전 그때처럼 허망하게 르베나의 불행을 바라만 보지 않겠다 다짐하며.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혈에 젖어 있는 르베나를 바라보는 다한의 몸이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치욕으로 깊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순간이 다시 없을 전율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