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제1장 디오니스 (25)
“이, 이게 뭐야!!”
순간 제가 밀친 힘에 꼴좋게 넘어진 르베나를 보던 드록에게 무엇인가가 달려든 것이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것은 손바닥만 한 모양의 찰흙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미친 듯이 드록을 공격해 왔다는 것이다.
그 찰흙들은 제 손에 쥔 무기들을 드록에게 휘둘러대고 작은 크기로 드록의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병정 인형의 무기가 드록의 귓가를 스칠 때 나는 소리가 곧 제 귀를 배어내는 것 같아 드록은 철썩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력으로 만든 병정 인형을 처음 본 드록은 한동안 놀라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하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문득 제 손에 잡힌 그것을 잊지 않고 르베나에게 던져 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르베나의 몸에 부딪혀 터져 버린 찰흙이 주륵 흘러내린 순간.
그 모습을 본 아한의 눈이 사납게 드록을 향했다.
다짜고짜 르베나를 밀쳐낸 그에게 화가 나 던진 병정 인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 남자가 제가 아끼는 병정 인형마저 죽게 만들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정을 잘 주지 않는 아한으로서는 순식간에 찾아든 상실감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아직 어린 아한의 감정에 아한의 마력이 반응하며 가볍게 일렁였다.
“아한!!”
자신의 마력이 몸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힘을 담아 저를 부르는 르베나의 목소리에 작은 녹안이 억울함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에 이를 악물고 르베나를 바라보던 아한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르베나와 병정 인형.
아한이 가장 좋아하는 두 존재가 제 앞에서 험한 꼴을 당하니 어린 아한이라도 서럽고 화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지금 아한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전했고 아한이 눌러 담는 화와 서러움은 눈물이 되어 버렸다.
르베나는 아한이 이 이상 동요하지 않도록 일어나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마법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드록의 앞에서 아한이 마력을 드러내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록은 역시나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비켜! 저 빌어먹을 놈의 꼬마가 나에게 무기를 던졌어! 저 새끼를 반역죄로 즉각 사형시켜 버리겠어! 비키라고, 이 마녀 새끼야!!”
드록은 그깟 찰흙 인형에 질겁한 본인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제가 욕심내던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와의 친분을 저 조그마한 녀석이 르베나에게 안겨 주었다고 생각하자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놈을 잡아! 저 꼬마 놈을 왕족 시해죄로 잡으라고!!”
곁에 선 기사들에게 고함치는 드록을 보던 르베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그리고 저것은 인형일 뿐 사람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만류에도 드록은 화가 잔뜩 담긴 눈으로 아한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건방진 꼬마 주제에 날 놀라게 해? 하! 지 할애비만 믿고 설치는 꼴이라니. 여기가 누구의 궁인지 확실히 보여 주마!’
눈앞 드록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르베나는 재빨리 사나에게 눈짓했다. 사나 역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냉큼 아한을 안아 들고는 외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드록의 눈은 분노로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 명령도 없이 누굴 데려가는 거야! 내 말 안 들려,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저 새끼를 잡으라고! 잡아서 내 앞에 갖다 놓으란 말이야!!”
감히 저의 명령에도 냉큼 꼬맹이를 데리고 가는 시녀도, 제 명령에 움직이지 않는 기사들도, 그 앞을 가로막는 르베나도. 모두 드록의 분노를 부채질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드록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도 죽을 맛이었다. 물론 왕족에게 시해를 가한 것은 시도만으로 즉결처분이 가능한 큰 죄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가 보아도 아한의 행동은 드록에게 시해를 가했다 보기 힘들었다. 또한 아한은 디오니스 최고의 베이라, 가스트의 손자였다.
손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디오니스 모두가 알 정도였다. 그러니 그의 손자에게 상해를 가하면 아무리 착한 가스트라 하여도 이를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 생각 없이 날뛰는 드록의 명에는 따르지 말라던 세나르의 명이 있었기에 기사들은 길길이 날뛰는 드록의 모습에도 선뜻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드록의 분노는 점점 더 극에 달했고 그의 인내도 점점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때, 기회를 놓칠세라 이아린이 재빨리 드록의 옆에 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왕자님, 노여움을 푸세요. 이것이 어찌 여기 있는 기사들의 탓이겠습니까? 이는 사실 모두… 제 사람 관리를 못한 이의 탓이 아니겠습니까?”
제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가 극에 달아있던 드록의 눈이 이아린의 말에 제 앞을 가로막은 르베나에게 향하였다. 그러고는 번들거리는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구나… 다 저년 때문이야. 제 궁에 있는 애새끼 하나 간수를 못 해서 감히 왕족을 시해하게 만들어? 그것도 모자라 내 명을 어기고 그 애새끼를 빼돌리기까지 했단 말이지… 그래… 그렇게도 감싸고 싶다면… 그래… 네년이 그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무감각하게 떠진 르베나의 붉은 눈에 씨익 웃는 드록의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하늘은 높았고 그 하늘 가득 아한의 머리카락을 닮은 회색 먹구름들이 점점이 모여들고 있었다. 왠지 오늘이 결코 짧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르베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 * *
사악.
삭.
그어지는 칼날에 검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왕자님!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울며 애원하는 사나의 목소리가 후원을 가득 에워쌌다.
“비켜!!”
제게 달라붙는 사나를 밀쳐낸 드록의 손에 들린 칼날이 다시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다시 한번 그어지는 칼날이 이번에는 르베나의 팔을 그어냈다. 그리고 르베나의 팔은 붉은 선혈에 젖어 들었다.
“아아… 제발… 제발… 흑…….”
나무에 묶여 여기저기 찢어진 옷과 선혈에 물들어 있는 르베나의 모습에 사나의 눈이 붉게 짓물러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 모습마져 사나의 눈물에 번져 가고 있었다.
조금 전, 드록은 아한의 죄를 보호자인 르베나에게 묻겠다 하였다.
“제게 묻겠다 하심은?”
르베나의 말에 드록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네년이 검술을 좀 한다지? 그러니 나랑 대련을 하자. 네가 이기면 내가 저놈의 죄를 용서하마. 하지만 네가 진다면 내 기필코 왕족 시해의 죄를 물어 저놈의 목을 치겠다.”
드록의 말에 르베나는 사나에게 안겨 멀어지는 아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어리고 드록의 목숨을 위협하지 못했어도, 아니 그럴 마음이 없었어도 왕족 시해 시도 자체가 큰 죄였다. 만약 평민이 드록에게 같은 죄를 지어 지금처럼 드록의 몸에 생채기가 났다면 즉결처분에도 아무런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귀족 역시 마찬가지다. 왕족 시해는 때에 따라 반역으로까지 보일 수 있는 죄였다. 단지 아한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가스트의 손자라는 것 때문에 드록의 기사들이 쉽사리 명을 따르지 못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세나르 쪽에서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한다면 사형까지는 막더라도 가스트와 아한은 그에 상응하는 아주 큰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세나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같은 것 말이다.
르베나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드록에게 말했다.
“그럼 이 일은 여기서 끝내 주실 겁니까?”
르베나의 말에 드록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네가 이긴다면 이 일을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나 드록 드 디오니스가 디오니스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성을 걸고 하는 맹세를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벌을 대신한다.
그러니 제아무리 막무가내인 드록이라도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디오니스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었다.
르베나가 드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르베나는 간단한 승낙만큼이나 그때의 상황에 자신이 있었다. 드록, 그는 마력 따위가 없어도 르베나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르베나는 그만큼 검술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으며, 그간의 노력 역시 결코 헛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돌아서 준비를 하려는 르베나에게 드록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대신, 너는 죄인을 대변하는 만큼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아이구, 이를 어찌한다. 내가 검술에 능하지 않아서 하하하.”
사악.
다시 그어진 드록의 검날에 르베나의 오른쪽 뺨에 사선의 선혈이 그어졌다. 스윽 그어지는 칼날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 뚜렷하고 뜨거운 통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공주님!!!”
르베나에게 선혈이 드리워질 때마다 사나는 곧 정신을 놓을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탈진한 듯 어느새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때마다 르베나의 눈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드록의 조건은 간단했다.
“내 너를 묶어놓고 시작하겠다. 내가 요즘 몸이 좀 굳어서 말이야. 대신 내가 몸을 풀 겸 너를 묶은 밧줄을 칼로 잘라내면 그때부터 결투의 시작이다. 당연히 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저 녀석을 지금 당장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드록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열한 그의 속셈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록은 재미없게도 뻔한 놈이었다. 예상 그대로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르베나는 참았다. 상처 따위야 마력으로 치유하면 금방이었다.
심지어 가스트가 있으니 꼭 르베나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통증 역시 충분히 참을 만한 것들이었다. 다만 드록의 꼴이 하도 같잖아 마력으로 밧줄을 자를까도 생각했지만, 가스트가 궁 안에 없는 상황에서 마력을 쓰면 루드바하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될까 봐 이마저도 참았다.
이 고통도, 분노도 르베나는 모두 참을 수 있었다.
몸을 조금씩 비틀며 드록의 칼에 밧줄의 일부분이라도 갖다 대고 있는 덕분에 아주 더디지만 밧줄도 끊어지고 있었다. 이 밧줄이 끊어지는 순간 르베나는 제 발치에 드리운 검을 들어 드록의 목을 겨눌 것을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 르베나가 참을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어느새 시녀들의 만류에도 외궁에서 뛰쳐나와 르베나를 보며 잔뜩 울먹이는 아한.
그리고…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부짖는 사나.
르베나는 딱 그것들이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한의 마력이 아한의 감정에 동요할까 봐 걱정이었다.
‘가스트가 마력을 억제하도록 마법을 걸고 갔으니 안심이긴 하지만…….’
그 순간 눈물이 가득한 아한과 눈을 마주친 르베나가 조금은 안심하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기특하게도 아한이 아직 제 감정에 먹히지 않고 있었다.
‘절대로 감정에 흔들리지 마라, 아한. 감정에 마력이 날뛰게 두지 마. 너는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해’
르베나가 아한을 보며 끊임없이 제 마음을 전하는 그때. 계속 르베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쏟던 아한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더니 다다다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이를 본 누군가의 가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머, 우리 공주님을 이리 만든 꼬마는 나 몰라라 도망가 버렸네. 이를 어째요, 공주님?”
아한의 모습에 티 테이블에 앉아 본인의 시녀들이 챙겨 온 쿠키와 티를 마시며 구경하던 이아린이 조소였다. 하지만 르베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
어린 아한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차라리 아한이 어디 가서 마음을 좀 가라 앉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때, 또다시 그어진 드록의 검에 맞춰 몸을 움직인 덕에 르베나의 밧줄이 살갗과 함께 조금 베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드록의 검날에 조금씩 제 몸을 묶은 밧줄을 가져다 대는 르베나의 몸에 선혈의 향이 짙어졌다.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으로 칼을 휘두르는 드록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에도 날카로운 살기의 향이 짙어져 갔다.